[서영남의 민들레국수집]

성탄절 사흘 전에 주안1동 성당 수녀님께서 성탄절 준비로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짬을 내셔서 민들레국수집에 설거지를 하러 오셨습니다. 시장에 물건 사러 다녀오신다고 핑계를 대고 설거지를 하러 오셨습니다. 한 시간 쯤 열심히 설거지를 하시다가 돌아가시면서 두툼한 봉투를 주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라고 적힌 봉투입니다. 봉투를 주신 분이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하셨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써주십시오.”라고 적힌 두툼한 봉투를 앞에 놓고 민들레 식구인 대성씨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돈을 밑천으로 우리 손님들 중에 어느 분의 방을 하나 마련해드리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다가 덕남씨를 위해서 방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덕남씨는 쉰여섯이라고는 하지만 언제가 생일인지 모릅니다.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짐자전거를 끌고 종이와 고물을 줍습니다. 연안부두에서 혼자 노숙을 합니다. 여름부터 추워지기 전에 방이라도 하나 얻어야겠다며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지금껏 모은 돈이 20만원입니다. 그런데도 수입이 좀 좋은 날에는 반찬 사는데 보태라며 만 원을 선뜻 내어놓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밤에는 덕남씨가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 있게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 23일에 방을 구했습니다. 허름한 집이지만 혼자 살기에는 아주 좋습니다. 냉장고와 세탁기도 그냥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증금 오십만 원에 월 십만 원으로 집주인과 타협하려고 했는데 보증금이 백만 원이라야 한답니다. 힘없이 국수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마음이 아픈 분이라고 합니다. 몸으로 봉사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면서 봉투를 주십니다. 월세 보증금이 해결되었습니다. 곧바로 복덕방으로 가서 월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집 열쇠도 받아 왔습니다.

덕남씨가 참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조건 없이 도와준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냥 연안부두에서 노숙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늦더라도 자기 힘으로 돈을 모아서 방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평생을 살면서 조건 없이 도와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왕에 얻어 놓은 방입니다. 다른 분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마침 민식씨가 식사하러 왔습니다. 식사 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민식씨는 총각입니다. 70년생입니다. IMF 이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해서 속이 쓰리고 아픕니다. 신용불량자가 되어서 주민등록도 말소되었답니다. 전단지도 돌리고 일거리도 찾아보았지만 점점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년 전에 우연히 국수집을 지나가다가 젊은 사람이라도 밥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겨우 살았다고 합니다. 민식씨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살만하면 갚아도 되고 안 갚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단지 월세 보증금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써야하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고 낮 12시에 이삿짐을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낮 12시에 민식씨가 조그만 가방 하나 들고 왔습니다. 봉사자들과 함께 이불과 전기장판 그리고 밥솥과 수건 등등을 손에 손에 들고 민식씨가 살 집으로 갔습니다. 독채입니다. 민식씨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자기가 살아도 되는지 물어봅니다. 열쇠를 드렸습니다.

“민식씨, 성탄 선물입니다.”

성탄 선물로 민들레 식구가 된 민식씨가 자기 방을 가지고선 실수 연발입니다. 밤새 떨었다고 합니다. 이상해서 같이 집에 가 보았습니다. 전기장판이 구석에 그냥 있습니다. 전기장판을 깔아주고 비싼 석유 두 말 사서 보일러 가동을 시켰더니 좀 따뜻해집니다.

민식씨는 며칠을 앓았습니다. 긴장이 풀렸나봅니다. 잠을 실컷 잤다고 합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자 보았다고 합니다. 쌀과 라면 그리고 반찬을 챙기고 그릇과 냄비들도 마련해 드렸습니다. 담배값도 조금 나눠드렸습니다.

민식씨는 주민등록도 말소되어있고, 건강보험증도 없습니다. 오랜 노숙생활로 속이 아픕니다. 염치 불구하고 민들레국수집의 든든한 은인이신 의사선생님을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습니다. 사진도 찍고 검사도 했습니다. 위염이 있고, 간수치가 아주 높다고 합니다. 마음 편하게 먹고 푹 쉬면서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약도 그냥 처방해 주십니다. 돈도 한 푼 받지 않으십니다. 민식씨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서영남 200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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