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도원 기행-16]

로마 안셀모 수도원. 이곳에서 산지도 벌써 8년이 되어간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더니, 내가 바로 그 꼴이다. 학문은 아직 진행형인데 소년, 청년 다 지나고 어느새 중년에 접어들었다. 어느 날 문득 로마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 손꼽아 보다가, 내가 이곳에서 왜관 수도원, 요셉 수도원에서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 지냈어도 여기서는 왠지 수도원이라기보다는 늘 독서실에서 사는 느낌이 든다. 한국 형제들과 떨어져 혼자서 고군분투해야하는 장소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안셀모 수도원에 없는 딱 한 가지

안셀모 수도원도 생활면에서는 일반 베네딕도회 수도원들과 다른 점이 없다. 아빠스, 원장, 당가도 있고, 장로회, 참사회 같은 것도 있으며, 시간 전례, 식당 독서, 식당 봉사까지 여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갖추어야할 것이 다 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안셀모 수도원에 없는 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정주(定住)’다. 안셀모 수도원에 정주해서 살아가는 수사들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이곳의 수석아빠스 역시 선거를 통해 주어진 임기 동안만 정주하는 것이니, 안셀모 수도원이 뼈를 묻어야 할 평생 수도원은 아닌 셈이다.

베네딕도회의 수사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이곳은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수도원보다는 학교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현재 안셀모 수도원이 전 세계 베네딕도회 21개 연합회의 중심이 되는 수도원이자, 그 일치의 상징인 수석아빠스가 상주하는 수석아빠스좌 수도원인 점을 고려하면, 학교보다는 수도원으로서 훨씬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며 살아온 수많은 수도원들이 안셀모 수도원의 시작과 더불어 비로소 베네딕도회 총연합을 이루며, 이른바 “베네딕도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로마 아벤티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베네딕도회 학교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오래 살아온 탓에 독립심과 자율성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큰 조직에 소속되어 거대한 미션의 한 부분을 잘 수행해내는 일에는 익숙치 않은 반면, 땅에 뿌리를 박고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해나가는 데는 선수들이다. 천생 시골 농부 마인드로 살아가던 이들을 한데 묶은 이가 있으니, 바로 교황 레오 13세(재위 1878-1903)이다.

이미 17세기말부터 지금 안셀모 수도원의 전신격인 베네딕도회 수도자 학교가 로마 성바오로 대성당 수도원에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8세기를 지나면서 문을 닫았다. 이 사라진 학교가 레오 13세 교황 덕분에 1887년 지금의 로마 아벤티노 언덕 위에 다시 세워졌다. 재위하자마자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신학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의 신학을 천명할 정도로 스콜라 신학의 부흥을 꾀한 교황이었으니, 스콜라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안셀모(1033-1109)를 새 학교의 주보로 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성 안셀모 성인 상, 수도원 성당 앞 정원

성 안셀모,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인

사실 안셀모 성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베네딕도회 학교를 위해 이보다 더 적합한 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실력뿐만 아니라 경력도 화려하다. 태어난 곳은 이태리요, 수도원에 입회하고 살다가 아빠스까지 된 곳은 프랑스이고, 그러다 너무 유명해져 대주교로 발탁되어 간 곳이 영국, 여기서 또 너무 열심히 교회 개혁하다가 왕한테 미움을 사서 쫓겨 간 곳이 로마, 마침내 로마와 영국이 화해한 뒤 돌아와 생을 마친 곳은 다시 영국이었다.

이러한 안셀모 성인의 지성적이고 국제적인 면모가 그대로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 이어졌다. 실제로 레오 13세 교황이 베네딕도 수도자들을 위해 학교를 만든 것도 실은 동방교회와 대화할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가톨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방교회도 가톨릭 베네딕도 수도자들만큼은 존중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셀모 성인의 모토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신앙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가며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하면서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의 폭이 넓어지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끼리의 대화의 폭도 아울러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서로간의 이해도 깊어지게 된다. 이렇게 배움을 통해 일치에 이른다는 이상은 안셀모 대학의 시작과 더불어 “베네딕도회 총연합”의 결성이라는 첫 열매를 맺었다.

전 세계 베네딕도회의 수장이 계신 곳

▲ 노트켈 볼프 수석아빠스(왼쪽)
1893년 처음으로 13개 연합회를 구성원으로 한 베네딕도회 총연합이 결성되었다. 최초의 수석아빠스는 레오 13세 교황이 지명한 벨기에 마렛쭈(Maredsous) 수도원의 일데브랑디 드 헴프틴느(Hildebrandi de Hemptinne) 아빠스가 되었다. 이후로는 4년마다 전 세계 아빠스들이 안셀모 수도원에 모여서 선거를 통해 수석아빠스를 뽑고 있다.

현 수석아빠스는 왜관 수도원이 속한 오딜리아 연합회의 전 총아빠스이셨던 노트켈 볼프(Notker Wolf). 전 세계 베네딕도회원의 수장이 되셨어도 한국과의 인연이 여전히 각별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 북한 선교를 위해 예전과 같이 지금도 최선두에 서서 일하고 계신다. 안셀모 수도원의 아빠스이지만 전 세계의 8,000여명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수장이다 보니 세계 곳곳을 방문하느라 수도원을 비울 때가 많다. 그래서 안셀모 수도원은 수석아빠스가 임명한 원장 신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곳이다. 수석아빠스가 대외적으로 많은 신경을 쏟아야한다면, 원장 신부는 직접적으로 안셀모 수도원 집안일을 챙기는 엄마 역할이다. 수도원이 국제 공동체이다 보니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양성 안에 일치를 배우는 배움터

수도원에 사는 사람 수는 약 백 명인데, 이들의 국적 수는 서른 개도 넘는다. 다양하다 못해 ‘인종 전시장’같은 안셀모 수도원이지만 너무나 잘 어울려 지낸다. 보통 수도원에서 하듯 성당에서 함께 기도하고 식당에서 같이 밥 먹고 봉사하고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때때로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는데, 나와 생판 다른 환경의 수도원 이야기를 하는데도 마치 왜관 수도원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한번 놀라고, 그 속에서 겪는 희노애락이 우리랑 너무 닮아서 두번 놀라고, 끝으로 그 희노애락을 대처하는 태도나 사고방식이 다들 너무 달라서 세번 놀란다.

같은 점이 많으니 공감할 부분이 많고 다른 점이 확실하여 사고의 폭이 넓어질 기회가 많으니, 안셀모 수도원이야말로 “다양성 안의 일치”를 배우는 최고의 배움터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그린 바닥 모자이크가 안셀모 수도원 문간 바닥에 있어서 참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안셀모 수도원을 짓다가 땅속에서 발견된 것이라는데, 이교 신화의 내용이 담긴 모자이크를 복원해서 수도원 입구에 떡하니 깔아놓은 데는 사실 까닭이 있었다. 음악의 재능이 뛰어났던 오르페우스가 노래와 리라 연주로 야생 동물들까지 순하게 길들여 춤까지 추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교회 교부들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대양 육대주에서 온 야생 동물들이 로마에서 순하게 길들여져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은 역시 아름다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며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 오르페우스 신화를 그린 모자이크

사막의 땀방울과 오아시스의 시원함이 공존하는 곳

넓은 수도원 건물 안에는 두 개의 회랑으로 이루어진 중앙정원이 있다. 성당, 식당, 강의실, 학교 사무실, 문간 등이 중앙정원을 둘러싸고 회랑을 따라 서로 이어져 있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청거북이 서너 마리와 어른 팔뚝만한 비단잉어들이 자기네들끼리 어울려 수도생활하는 작은 연못이 있다. 사방이 건물로 봉쇄된 정원이 좀 답답하게 느껴지다가도 연못으로 눈을 돌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회랑 아래의 벤치에 앉아 연못 가운데에서 분수처럼 퐁퐁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한참 보고 있으면,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적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 정신을 깨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분수 앞으로 다가가보면, 연못 안 쌓아놓은 돌 더미 위엔 목을 쭉 빼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청거북이들이 미동도 않은 채 해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 주로 기숙생들의 침방이 있는 건물 2, 3층에서 연못과 정원을 내려다보노라면, 수도원이란 밖에서 보면 사막이어도 안에서 느끼는 것은 오아시스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에덴동산 같은 곳은 절대 아니다. 사막의 땀방울과 오아시스의 시원함이 공존하는 곳이라 해야 맞겠다.

▲ 부활성야미사
노동을 통해 땀을 흘린 뒤 마시는 물 한 잔이 더욱 시원한 법. 하느님의 일인 공동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면 갈증이 풀리고, 명령받은 일인 개인 소임에도 최선을 다한 뒤면 약속의 땅이 보일 것이며, 자진해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까지 맡아서 일한 뒤라면 약속의 땅에 젖과 꿀까지 흐르지 않을까. 거북이를 바라보다가 생각이 그만 천국까지 올라갔다. 내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이 일광욕을 벌써 끝낸 청거북이는 어느새 연못 속을 열심히 헤엄쳐 다니고 있다. 생활 속의 관상가 청거북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거북이, 정말 네가 나보다 낫다.”

교황청립 대학

잠에서 깨어나 일상 속으로 뛰어들면 공부라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안셀모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안셀모 대학에는 약 400여명의 일반 학생들이 통학하고 있다. 대개는 신부, 수사, 수녀들인데, 간혹 평신도 학생들도 있다.

안셀모 대학에는 여러 학부가 신설되어 있다. 일반 신학교처럼 기본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 학부, 베네딕도회의 역사에 중점을 두면서 수도승 전통을 가르치는 수도승 신학 학부가 먼저 생겼고, 이후에 교황청립 전례연구소, 성사신학 학부, 신학사 학부, 철학 학부가 생겼다. 통학 학생의 절반 정도가 전례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전례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상당수도 이곳 안셀모 대학 출신이다.

▲ 수도원 중정에서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
1962년에 설립된 이 교황청립 전례연구소는 1978년에 들어 자체적으로 전례학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안셀모 대학이 시작된 백 년 전만 해도 주로 독일어권의 베네딕도회 남자 수도자들이 와서 가르치고 배우고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수와 학생 모두 이제는 비 베네딕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교구 사제, 평신도의 비율이 늘어났다. 더욱이 안셀모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안셀모 수도원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안셀모 수도원에는 베네딕도회원인 나 말고도 전례를 공부하는 한국인 교구 사제 5명이 함께 살고 있다. 수도자들과 똑같이 짧게는 이삼 년, 길게는 십 년씩 수도원에서 살고 있으니, 이분들은 유학생활동안 공부에 덤으로 “수도생활 체험학교”까지 다니는 셈이다.

베네딕도회 유대와 일치의 구심점

안셀모 수도원의 뿌리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도 바오로의 무덤이 있는 성 바오로 대성당 수도원이다. 안셀모 대학의 모태였다는 점 말고도 성 바오로 대성당은 안셀모 수도원을 지을 때에도 문자 그대로 모태가 되었다. 19세기에 성 바오로 대성당을 복원하고 남은 대리석 기둥들로 안셀모 수도원 성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백 년 세월이 지난 지금 안셀모 수도원은 성 바오로 대성당 수도원을 넘어서서 상징적으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베네딕도회의 모태가 되고 있다.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이 안셀모 수도원으로 수사들을 꾸준히 보내고, 이곳에서 공부한 수사들이 또 본국에 돌아가면 자기 수도원에서 나름 필요한 역할을 해낸다. 그런데 학생을 보내는 것은 자기 수도원의 필요를 위해 보내는 것이니까 그렇다 쳐도, 빠듯한 인원에 일도 많은 수도원에서 안셀모 수도원을 위해 교수도 보내고 수도원 행정이나 살림을 맡아볼 수사들까지 보내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 베네딕도회 수도원들간의 일치와 유대가 안셀모 수도원 공동체 안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다 자기 수도원의 이익보다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이런 통 큰 수도원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을 배우는 학교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원이 ‘주님을 섬기는 학원’(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 머리말 45)이 되기를 바랐다. 배움터라는 관점에서 보면, 안셀모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직업훈련소라고 할까. 문화, 인종, 국가, 모두 천차만별이라도 서로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면서 사랑하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하나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 데 모여 사는 것!”(시편 133,1)이 가능한지 안셀모 수도원에서 충분히 실습을 한 뒤, 때가 되어 과정을 마치면 수사들은 모두 떠나간다. 고생하며 배운 기술을 실전을 통해 더욱 갈고 닦기 위해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은 자기가 평생 뿌리박고 살겠다고 정주 서원을 한 사랑의 학교! 사랑이 넘쳐나는 학교가 아니라 사랑을 땀 흘려 배우는 학교이다. 안셀모 수도원이 어디에 붙었는지 거기에 누가 사는지 몰라도, 종치면 일어나 기도하고, 때 되면 일하러 나가고, 또 종치면 식당에 모여 독서를 들으며 같이 밥 먹고, 끝기도를 마치면 꿈나라로 직행하는 그런 수도 형제들이 사는 내 집이다. 한 지붕 한 식탁에서 가끔 아웅다웅 했어도, 이제 돌아보니 그게 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배우려 노력하며 살았는가 하는 반증 같다. 안셀모 수도원 생활을 끝내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수도원 우리 형제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지지고 볶고 바람 잘 날 없어도, 삶의 열정만은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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