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도서관 나들이] 김해자, <당신을 사랑합니다>, 삶이보이는창, 2012

“우리는 알고 있다. 온 지구에 산소를 대어주는 살림의 90퍼센트가 하늘로 쭉쭉 뻗어 오른 전나무, 삼나무 숲이 아니라 들쭉날쭉 엉망인 잡목 숲이라는 사실을. 어디 똑바로 쓰기에는 무늬고 재질이고 영 마뜩찮은, 때로 꼭대기까지 덩굴에 휘감겨 하루하루 곤고하게 헐떡이는 나무들이 전 세계 모든 생명들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 김해자(아녜스)가 이번에 내어놓은 민중열전 <당신을 사랑합니다>(삶이 보이는 창, 2012)에 추천글을 쓴 소설가 윤영수의 말이다. 윤영수는 <사랑하라, 희망없이>(민음사, 1994)를 통해 내게도 퍽 큰 감동을 안겨준 문제작을 세상에 던져준 작가다. 세상의 상처받고 가련한 인생들에게서 희망을 건져올리는 사람이 윤영수이고 또 김해자다.

▲ 김해자 시인은 청춘을 노동운동에 바치고, 미싱사로 지내다 마흔이 다 되어 <무화과는 없다>로 등단했다. 요즘 전주에서 텃밭도 가꾸고 바느질에 열심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한땀 한땀 그가 받아적은 민중열전이다.   

내 가벼운 삶을 뿌리내리게 하는

김해자 시인은 잡지 <공동선>에 민중열전을 싣기 시작하면서 지난 10수년 동안 <삶이 보이는 창> 등에 지속적으로 연재해서 이제야 한 권으로 책을 묶어낼 수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마장동 우시장 윤주심 씨, 농사꾼 김낙희 씨, 바보 장인 이영철 씨, 아벨서점 곽현숙 씨, 반찬공장 심정희 씨, 평화시장 무명씨, 택시드라이버 김인수 씨, 해녀 김석봉 씨, 방글라데시에서 온 레자 등 이주노동자, 마웅저 등 망명객, 선원들, 노동운동가 최명아 등 더러는 지난 몇 년 동안에 이미 이승을 떠난 이들도 있다. 여성잡지에 등장하는 그야말로 ‘잘 나가는’ 인생들은 아무데도 없다.

이를 두고 윤영수는 “그 볼품없는 나무들, 흐르는 것 같지도 않게 나뭇잎 밑을 흐르다가 때로 땅에 스며든 가느다란 물줄기들의 이야기”라고 적었다. 이를 두고 김해자 시인은 “묵묵히 사는 나무, 그저 제 할 일을 하는 나무, 삭풍이 불고 때로 눈보라쳐도 잎도 나오고 꽃도 열매도 맺는 믿음직한 우리들의 나무가 당신”이라고 전한다. 그의 시 ‘나무,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들이다.

산다는 건 저런 것이다.
비 오면 비에 젖고
눈 오면 허옇게 얼며
천지사방 오는 바람
온몸으로 받는 것이다.
부스럼 난 살갗 부딪혀 간
수많은 자국들 버리지 않는 것이다.
얻어맞으며 얼어터지며
그 흉터들 제 속에 담아
또 한 겹의 무늬를 새기는 것이다.
봄빛 따스하면
연둣빛 새순 밀어 올리고
뜨거운 여름날 제 속으로 깊어져
그늘이 되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도 모르는 나무는
자기도 모르게 발등 내주어
장작이 되고 의자가 되는 것이다.
나무, 관세음보살
(김해자, ‘나무, 관세음보살’)

김해자는 그래서 말문을 열며 “누추하고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적막하고 때로 끝나지 않을 싸움터 같은 세상에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중심으로 귀 기울이는 순간 내 아버지가 되고 내 어머니가 되고 내가 된다”며 “가진 것 배운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이 육신 하나 고단하게 움직여 밥이 되고 약이 되고 위로가 된 보살 같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뜬 모처럼 살아온 내 가벼운 삶이 논바닥에 뿌리내렸는지도 모른다”고 제 심경을 고백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다 “어둠 속 나무뿌리 같이 굳건하고 아름답고 자비로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서른 안팎 무렵, 20여 년 전 김해자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저 반지하방에 살던 A급 미싱사 한 살 터울 누님이었다. 어려워도 구김살 없던 그 시절처럼 오늘도 그녀는 함박웃음 지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보살 같은 그들 “거지가 되어도 철학이 있어야..”

바보 장인 이영철 전(傳)에서, 이영철(프란치스코)은 “기술자는 많은데, 장인은 별로 없다”면서, “장인이란 나무를 다듬고 물건 하나 맹글 때마다 정성을 다하는기 장인”이란다. 가구 장인이었던 이영철은 지금 암투병 중이다. 그에게 시련은 그치지 않지만 언제나 바보처럼 웃어제끼는 이가 또한 이영철이다.

“사는 거이 터널 같은 때가 있지유.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터널 말이유. 우찌게 터널을 통과하느냐고유? 한 발 잘 걸으면 돼유. 더듬거림서도 바로 한 발 앞만 보고 걷는 거쥬. 이 발끝에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말이유.”

고생해도 돈벌이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하던 일 놓을 수 없고, ‘몸땡이’는 병들었지만 그는 “뭐 우찌겄슈? 그래도 받아들여야쥬” 말한다.

이영철은 “나는 잘해야 나무 만지는 목공이지만 우리 어머닌 인간 장인”이라며 어머니를 존경한다. 충남 당진 장승백이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아가다)는 유난히 꽃을 좋아해서 꽃씨만 보면 무조건 산다. 사서 성당 마당에도 뿌리고, 당신 집 안마당에도 뿌리고 길에도 뿌린다. 왜 길에다 뿌리냐고 묻자 “꽃이 이렇게 이쁜디, 나만 볼 수 있간디요” 한다. 성탄절에는 성당 다녀오는 길에 만난 자선냄비에 차비로 남겨둔 500원을 넣고, 20리 길을 걸어서 귀가하는 분이다.

▲아벨서점 곽현숙 씨

책방지기 곽현숙은 “순수한 촌놈 아벨처럼 순수한 첫마음을 지키고 살자는 바램”으로 ‘아벨서점’이라 이름 지었다. 그녀는 물처럼 낮은 데로 흐르는 게 ‘하느님의 사랑’이라며 “지상에서 각자의 삶은 사랑으로 가는 통로니까, 직접적이고 완전하게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현재 조건에서 발을 빼지 말고 사람 속에서 같이 뒹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떠들어대는 사랑’이 아니라 ‘남의 마음 줄을 타고 움직여, 거짓 없이 안아주고, 사람을 통해 신명을 통해 함께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게 예수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 오신 까닭이라고 설명한다.

스무살에 결혼하고 아들 낳은 지 8개월만에 홀몸이 되어 월부책장사며 버스차장이며 공장일이며 노가다 판까지 험한 일이란 일은 다 한 그녀가 헌책방을 하면서 쌓은 내공이 대단했다. 곽현숙은 “앎을 향한 갈증이야말로 고귀하고 진짜 사랑의 그릇이 되는 준비과정”이라고 전한다.

“거지가 되어도 철학이 있는 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야. 낮은 자리에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이게 해주는지 몰라. 가여운 마음을 가지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사람들은 세상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어”라고 말하는 곽현숙은 무엇인가 남에게 줄 때도 ‘미안해하면서, 친구처럼 감사하면서 줘야지 선심 쓰듯 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한때 시골에서 책방하는 게 꿈이었지만, 혼자서 자연을 누리기에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는 그녀다.

해녀 김석봉은 나이가 들수록 물질을 할 때 “내 물깊이를 알아야 한다”며 평생 일하다, 당뇨합병증으로 이승을 떠났다. 그 둘째딸은 어머니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집에 갈란다 집에 데려다 줘, 하시더니 축산(물질 하던 바닷가) 돌아간 지 얼마 안 돼서, 어머니는 목숨 줄을 놓았니더. 평생 물질하고 살아온 데로 돌아간 거지요. 어머니 고향인 제주에선 이어도가요, 참말로 좋은 데라고 하대요. 배도 안 고프고 아프지도 않고 서로 미워하거나 할퀴지도 않고, 뭐 하나 안 숨겨도 되는 꿈구는 세상이었지 싶네요. 그런 편한 데로 어머니가 가 계시면 참말로 좋겠니더. 평생 바다 보고 평생 물질하고 바다에서 살았으니 바다 속에 숨어 있다는 그 이어도로 가셨을 겁니다. 저는 그래 믿니더”

▲김해자 시인은 '만남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다. 눈앞에 놓인 존재를 늘 편안하게 다독거리는 사람이었다. 퍼주고 행복한 가난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헌책처럼 '낡은 옷'이 좋다고, 오래 묵은 사람이 좋다고 했다.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위로해 주는..

시인 김해자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거침없이 몸으로 살아온 이들에게서 지혜를 배웠다. 이들처럼 가엾지만 든든한 나무들은 봄에 꽃을 피우고 나서도 “늦봄부터 여름 가을 겨울까지 꽃을 숨기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기사 나무가 꽃 땜시 열매 땜시 피것소? 그냥 묵묵히 사는 것 아니것소? 그저 제 할 일 하는 것 뿐이겄지”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 같고 땅 같고 나무 같은 당신”이고, 그래서 “겁나게 사랑하요이”라고 거룩한 탄성을 지른다.

지난 4월 13일 인천 배다리에 있는 ‘아벨서점’에서 김해자 시인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출판기념회가 마련되었다. 시인이 청춘을 나누었던 인천노동자문학회와 구로노동자문학회 회원들과 민중열전에 주인공으로 나왔던 몇몇 ‘민중’들이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다. 책방에 빼곡히 들어찬 헌책들. 누군가의 손길에 닿아 헤어지고 때 묻은 책들이 마치 ‘민중열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인양 얼굴을 내밀었다.

책방에서 만난 김해자 시인은 여전히 해맑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주변을 따뜻한 기운으로 데웠다. 그녀가 민중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겁나게’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정화된 에너지를 받고, 위로를 받기 때문이었다. 김해자 시인은 “그들은 주로 가난하고 몸으로 산 사람”이라며 “그것이 주는 근원적 에너지가 있다”고 말한다.

“작가든 누구든 지식인들과 달리 이분들은 지구라는 행성을 몸으로 통과해간 사람들이다. 여기서 어떤 힘을 느낀다. 이 책은 이들이 너무 가난해서 고생했기 때문에 연민이나 배려 차원에서 적은 기록이 아니다. 지구를 온몸으로 통과해 간 이들이 주는 족적과 그것이 주는 정화작용 때문에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종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영성이 깃들어 있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내가 많이 정화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걸 느낀다.”

김해자 시인은 에너지가 탕진되어 “마음속 깊은 우물에서 바가지 긁는 소리가 나도록 고갈되었다가도 이들을 만나고 오면 저절로 물이 솟아나와 그 물 위에 내가 떠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이들이 토해낸 언어는 가난 속에서도 강팍한 노동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존재 고유한 언어이며, 그 언어가 나로 하여금 나를 되찾게 돕는다고 고백했다.

▲민중열전 <당신을 사랑합니다>에는 현기영, 도종환 시인이 추천사를 썼다. 그러나 정작 출판기념회는 아벨서점 다락방에서 옛 동지들과 노동자문학회 지인들이 모여 소박한 말 밥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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