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 영화]<언터처블: 1%의 우정> 감독 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톨레다노

‘언터처블’은 ‘건드릴 수 없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는 접촉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영화에 그럴 듯한 제목이지요. 두 남자는 희망하지 않았던 비정상적 상황에서 서로를 알게 됩니다.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구제불능의 20대 청년 드리스(오마 사이 분)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3번의 구직 희망 경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 발로 필립(프랑수와 클루제 분)의 집에 걸어 들어가지요. 필립은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장애인이고, 24시간 내내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드리스는 갱스터스러운 옷차림과 몰상식한 언행을 내세워 '고용 불가'라는 결과를 단칼에 얻기 원합니다. 필립의 캐릭터가 빛나는 것은 이 지점입니다. 그는 사고 이전에 모험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육체에 갇혀있지만 도전과 실험 정신은 훼손당하지 않은 인간이었던 것이지요.

이들이 첫눈에 서로의 내면과 영혼을 꿰뚫어본 것은 아닙니다. 필립은 일하지 않고 복지제도에 기대어 먹고 살려는 드리스를 경멸합니다. 그를 채용하는 행위는 드리스의 형식적인 구직 행위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려는 의도 반, 그리고 투철한 봉사 정신과 뛰어난 인성을 내세우는 천편일률적인 사회복지사와 다른 인간형에 대한 호기심 반에 따른 것입니다.

필립이 간파한 것처럼 드리스는 성인의 육체를 지녔으되, 내면은 철딱서니 없는 아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이 놓여보지 못한 상태에 대한 그의 무감함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필립의 감각 잃은 육체를 테스트하기 위해 뜨거운 찻물을 붓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행동을 낄낄거리면서 행하지요. 감독들은 이것을 선입견 없음으로 해석합니다. 이를 인내하면서 지지하는 것이 바로 상위 1%에 해당하는 지성과 교양을 갖춘 필립이라는 캐릭터입니다.

영화는 접점이 없는 두 인간이 소통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호기심과 유머를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는 드리스가 지닌 강점입니다. 그의 호기심이 환상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필립의, 죽음처럼 끔찍한 고통에 이를 때, 이들은 서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드리스는 필립을 휠체어에 태우고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지요. 필립에게 필요한 것이 싱싱한 생의 공기와 감각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입니다. 밤 문화는 아프리카계 이민자인 드리스의 전공 영역입니다. 여자, 한밤의 카페, 흡연처럼 금지되었던 것을 받아들이면서 필립은 장애인 이전에 인간인,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간과해 왔던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게 됩니다.

<언터처블>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웃음과 유머라는 당의정을 입힘으로써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소통을 지향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지점이지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일반 인식은 박애의 휴머니즘에 기반합니다. 불쌍한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인지상정의 마음이요 정치적으로 지극히 올바른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 선의의 결과로, 장애를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보통의 지위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부자유함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인간적 관계나 욕구 등이 불가능하거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박애의 휴머니즘에 덧붙여 필요한 것이, 평등의 휴머니즘이라 하겠습니다. 필립이 사고뭉치 드리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은 자신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 평등의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필립이 상위 1%의 부와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설정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장애인은 육체의 부자유함과 더불어 빈곤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니까요. 그래도 실화에 근거한 이야기라니, 영화에 딴죽 걸 이유가 줄어들게 됩니다. 그 대가로 관객은 박애보다 평등을 앞세우는 필립의 처지에 편안하게 동승하게 됩니다.

수년 전 ‘장애우’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은 평등의 휴머니즘이 배제된 사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이해합니다만, 장애인에게, 장애우라는 호칭상의 승격(?)은 애완동물을 반려동물이라고 바꿔 부르자는 운동을 연상시킵니다. '친구'라는 말에는 '장애'라는 불편한 현실을 중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만인의 벗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장애우'는 장애인의 친구 선택권을 무시하는 명명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맹학교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 30년 간 우정을 키워온 김영일, 남형두 교수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조선대 특수교육학과 교수가 된 김영일 씨는 “장애는 하나의 개성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식으로 '얼어붙은' 사회적 통념을 깨부수는 '도끼 같은'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 어디 없을까요? 덧붙이자면, 장르는 절대적으로 코미디여야 합니다. 이 반계몽주의의 시대에 인상을 써야 하는 진지한 이야기는 대다수에게 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이야기로 비춰질 테니까요. 가슴 저린 감동과 웃음이 교차하는 멋진 영화를 머릿속에서나마 그려 봅니다.
 

 
 
진수미(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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