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의 삶과 노래]소통과 쇄신

 

 

오늘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다. 가톨릭 세례명 중에 아마도 상당수가 바로 이 대천사들의 이름일 것이다. 내 주변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기저기 축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저 평범하게 축일을 축하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맺혀 있던 마음을 풀어내기도 한다. 내게 무례했거나 실수를 해서 얼굴을 붉혔던 후배들에게 ‘축일을 축하한다. 지난번 화를 내서 미안했어.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기도한다.’라고 보낸 문자에, ‘형님. 감동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답이 왔다. 그 순간 내 가슴에도 감동이 일렁인다. 또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연락이 뜸한 지인에게도 ‘축일 축하합니다. 아픔을 딛고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보내었지만, 끝내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내 마음이 소중한 것이며, 그 용서란 한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이루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 신앙인들의 삶의 모범이 되어 가톨릭교회에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고유한 축일을 갖게 되고, 그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한 사람에게 축일은 생일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톨릭 신자들은 서로의 생일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성인들의 고유축일에 따라 지인들에게 축하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가톨릭신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이 서양식 세례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해프닝도 참으로 많다. 아마도 어휘가 풍부한 한글문화 때문이라고 짐작되니,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일 것이다. ‘남아선호’가 뚜렷한 남성중심문화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매우 흔하다. 딸만 계속 낳았기에 다시는 딸을 낳지 않겠다고 ‘다시안나’, 아이 낳게 해달라고 손을 비벼 기도드려 낳았다 하여 ‘비비안나’, 개월 수를 못 채우고 나와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기에 ‘유리안나’, 아무리 빌어도 원하는 아들은 안 주시고 딸만 계속 주시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으로 ‘막달레나’ 라고 지었다는 등의 얘기는 이미 전설처럼 되어있다. 이 밖에도 까불이(가브리엘),말대가리(말가리다),소다마(다마소),소붕알(알퐁소),시골로시집가(스콜라스티카),고루고루요(그레고리오),니꼬라지(니꼬나오),닥치시오(달치시오),마카로니(마카리오),바스러지오(바실리오),아킬레스(아킬레오),아라이요(야누아리오),애배시오(에벤시오),여보시오(에보디오),애보시오(에본시오),애비를낳으시오(에빌나시오),애터지시오(에우티치오),찌뿌리시오(치프리아노),억수로패시오(엑수페리오),알리시오(엘리세오),다시마(조시마),디지털피아노(지스틸리아노) 등등, 재미를 유발하는 세례명은 끝이 없다.

예전에 한 동네에 살았던 스콜라스티카 아주머니는 입담이 좋은 분이었다. 그런데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남편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성당에서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을까. 당신이 하도 수다를 많이 떠니까 ‘콜라 먹고 스티카나 붙이고 있으라’는 뜻으로 그런 거 아니야?”

그 본당 신부님의 세례명은 멜키올이었다. 집무실에 「Father. Melchior」이라고 쓰인 것을 나와 함께 놀러간 내 후배가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신부님 성함이 멸치예요? 참 재미있는 이름도 있네요. ‘멜치요오~.’ 하하하.”

전라도와 충청도 이남에서는 구개음화 현상으로 인하여 ‘ㄱ’발음을 ‘ㅈ’발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길’을 ‘질’이라고 한다. 고향이 논산인 베로니카 할머니는 ‘글라라’를 꼭 ‘질라라’라고 하여 모두를 웃게 하셨다.

내 고등학교 친구 중에 도밍고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받으셨다.

“도밍고 있어요?”
“아니. 우리 집에 거문고는 없는디~.”

 

 

이 세례명 때문에 따돌림이 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놀림 때문에 상처가 된다거나, 그 상처 때문에 공동체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에 민감한 청소년들의 상황이다. 언젠가 지인 댁에 갔을 때, 그 댁 막내의 세례명을 물었더니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아빠로부터 세례명이 ‘말가리다’인데 친구들이 ‘말대가리’라고 놀려서 성당에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무척 아픔이 많았겠구나. 나도 세례명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었기에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말가리다’라는 이름이 원래는 ‘마아가렛’이야. 마아가렛이라는 꽃 알지? 그걸 옛날 사람들이 발음을 잘못하여 ‘말가리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 ‘마아가렛’이라고 부른다니까. 어때 예쁜 이름이지?”

“정말 이예요? 그럼 나도 내 세례명을 ‘마아가렛’이라고 해도 돼요?”

“그럼.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다니까. 라틴어로 읽으면 ‘마르가리따’가 되겠지만 영어식으로는 ‘마아가렛’이야.” 


내 세례명은 로제인데 부르기 쉽게 로제리오라고 한다. 그런데 친구들 중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우편배달부께서 ‘이 집에 머저리가 사세요?’ 라고 웃으면서 물으셨다. 내게 온 편지 겉봉에는 ‘김머저리요’라고 쓰여 있었다. 내년이면 고딩이가 되는 우리 집 막내 이랑이가 유치원 다닐 때 일이다. 우리 집에 오는 모든 전화는 다 이랑이를 거쳐서 받게 된다. 야무진 이랑이가 우리 집 교환원인 셈이다. 누군가 전화를 했는데 어린애가 받으니 아빠의 세례명을 물었나보다.

“로짜 제짜 리짜 오짜예요.”

라고 또박또박 말하고서 나를 바꾸어 주었다. 나중에 물으니 어른의 이름을 말할 때는 한 자씩 말하는 것이라고 배웠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세례명을 따라간다는 미신 비슷한 것이 있다. 그 성인의 거룩한 삶을 따라 살아간다는 내용이면 참 좋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 세례명이 갖는 어감이라던가 아니면 통계적으로 그런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그렇다던가 하는 것이다. 아녜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이 대체로 순하다던가, 안젤라라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이 뚱뚱하다던가, 세실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들이 노래를 잘한다던가 하는 그야말로 전혀 근거 없는 속설이다. 그렇게 치면 발레리아는 무용을 잘 해야 하는데 말도 안 된다. 이런 내용과 연관하여 가톨릭신자들의 삶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미신적인 요소가 적지 않다. 띠와 관련한 속설이나 혈액형 또는 애니어그램 유형에 맹신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 중에 가톨릭신자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가톨릭신자들끼리의 모임자리에 앉으면 심심치 않게 이런 미신을 만나게 된다. ‘닭띠 들은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잘 헤집는다’ ‘양띠들이 유순하다’ ‘남자보다 여자가 큰 짐승이면 부부 금슬이 안 좋다’ ‘B형들은 소심하다’ ‘보스 기질이 있는 걸 보니 애니어그램 8번 유형이다’ 등등이 그것이다. 점입가경이라고 재미있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예수님의 실제 나이를 따져보니 ‘소띠’다. 부처님도 ‘소띠’며 올해로 탄생 2,000년을 맞은 사도 바오로는 ‘용띠’다. 성품과 삶의 모습을 잘 견주어 보시길...

 


오래전에 했다는 가톨릭신자 신앙실태 설문조사가 기억난다. ‘왜 가톨릭신자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서양식 이름을 하나 갖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상당수 나왔다고 한다. 이런 결과를 기대하며 설문 문항을 작성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동네 반상회에서도 신자를 만나면 꼭 가톨릭 세례명을 주고받는다.

“마리안나씨. 오늘 바쁜 일 있었어?”
“무신 말이 안 나와. 말만 잘 허는구만. 바쁘다고 말이 안나와?”
라고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앞집 할머니가 ‘벨라뎃다’라는 이름을 듣더니,
“아 또 뭘 버려놨다는 것이여?”

이런 이름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이웃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우리네 보편정서를 따라 oo엄마 혹은 ooo씨가 훨씬 친근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왜 모를까. 교회공동체 내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가톨릭신자들은 남성에게는 ‘형제님’ 여성에게는 ‘자매님’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20대 여자가 80대 할머니에게도 서슴없이 ‘ooo자매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쌍방간의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고, 듣는 사람도 별 불만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안다. 그래도 우리 한국식의 정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연세가 높으신 분에게는 정겨운 우리말로 형님, 누님,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님,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름으로써 하느님 백성들끼리의 평등을 얘기하거나, 나이나 세대 차이를 극복하여 쌍방간의 인권이 존중되는 측면도 없지 않겠으나, 언어습관이란 일반사회의 보편정서에 따르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못할 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23년 전 내 어머니는 5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당시 내가 성당에 근무를 했기에 많은 신자들이 문상을 왔었고, 어머니가 레지오 단원이셨기에 2,000 여명의 레지오 단원들이 오셔서 연도를 하고 가셨다. 레지오들의 상급단체인 꾸리아 단장님께서 가능하면 자리를 지키시다가 고인을 위한 기도문 선창을 해 주셨는데, 이웃 교우 집에서 또 초상이 났기에 단장님은 양쪽 집을 오고가며 선창을 하셨다. 그런데 막걸리를 한 잔 하신데다 자주 오가다보니 실수를 하셨다. 우리 어머니의 세례명은 ‘수산나’인데 번번이 ‘마리아’라고 하신 것이다. 아마 조금 전에 다녀오신 곳과 혼돈되었나 보다. 젊은 며느리를 앞서 보내신 우리 할머니는 ‘죽은 마리아’라고 당신의 세례명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뜨끔뜨끔 하셨을 것 같았다. 이런 웃지못할 일은 한국식 이름으로 불렀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과격한 이는 이제 더 이상 서양식 세례명이 의미가 없으니 자신의 한국이름으로 세례명을 삼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서양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 사람들의 비슷비슷한 생김새와 비슷비슷한 이름들을 구분할 수 없어서 나름의 대책으로 성인들의 이름을 붙여준 것이 서양식 세례명의 유래가 되었으니 이제는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세례와 함께 입적이 되기에 자신의 세례명이 그대로 이름이 되어 이런 혼란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우리 한국인들은 전혀 비 일반적인 서양이름을 하나씩 더 갖게 되니, 교회와 사회를 연결하는 데서 소통장애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우선 시급하게 쇄신되어야 할 것은 세속명이라고 부르는 우리말 이름을 본명이라고 하고, 가톨릭교회에서 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세례명이라고 정착시키는 일이라고 본다.

물론 좋은 면도 얼마든지 있다. 세례명 안에 담긴 말의 뜻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살아간다거나, 그 이름의 원주인이었던 성인의 삶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이사악(하느님의 웃음), 막달레나(눈물샘), 베로니카(참얼굴), 글로리아(하느님의 영광), 그라시아(은혜로움) 등, 세례명 안에 담긴 좋은 뜻을 잘 새긴다면 삶의 이정표가 되어줄 수도 있다.

천사들의 축일을 맞아 세례명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를 두서없이 해 보았지만, 어떤 일에든지 양면이 있다. 잘 활용하면 좋을 수 있지만 그 반대일 경우 아닌 것만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모쪼록 서양식 세례명을 지난 채 살아가는 가톨릭 신자들이 또 하나의 이름 때문에 이웃들 안에서 걸림돌이 되기보다, 그 이름으로 하여 삶이 더욱 기뻐지고 풍요로워지기를 기도해 본다.

사진 - 고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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