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의 삶과 노래]지속가능한 삶 3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외국에서의 식생활은 늘 어려웠다. 적어도 일년에 두, 세 차례 정도는 외국나들이가 있기에 이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채로 익숙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나들이가 영 없는 것만은 아니다. 프렌치 정식이나 스파겔이라는 독일요리를 비롯한 몇 가지 유럽음식은 언제 어디서 먹어도 갑자기 행복해질 만큼 특별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스파라가스의 어린 순을 버터를 넣고 살짝 삶아서 홀란다스 소스를 얹어 쉥켄이나 살라미 같은 훈제육과 함께 먹는 스파겔은 오월 중순경이 제 철이어서, 이 시기의 독일초청은 늘 내게 무지개 빛 꿈이다.

2005년에는 오월 한달을 독일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매일 스파겔을 먹었다. 초청자들도 나를 위해 스파겔 요리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난 도심과 시골의 식당을 골고루 찾아다니면서 즐기게 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는데, 떠나오는 날 아침에 아스파라가스 농장에 가서 막 수확한 스파겔을 사서 미리 준비한 홀란다스 소스, 살라미, 쉥켄과 함께 잘 포장하여 비행기에 실어 주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어야 했기에 약간은 맛이 떨어졌겠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그 결과는 7kg의 일시적인 체중증가를 가져왔고 3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원상회복은 되지 않고 있다.

올여름, 미국과 캐나다의 8개 도시를 다니며 초청강의를 했을 때도 그랬다. 보통으로 하루에 두 번 정도는 외식이었다. 한식은 물론 중식, 일식, 양식, 태국음식 그리고 베트남음식에 이르기까지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을 두루 먹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동안 별 생각 없이 먹었기에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어떤 음식에나 대부분 들어가 있는 재료가 깐새우라는 사실이다. 먹지 않고 골라내어 쌓아놓고 보면 그 양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새우를 싫어하시나 봐요?”
“아니요. 새우를 못 먹어요.”
“네? 새우를 못 먹다니요. 정말 독특하시다. 사람마다 싫어하는 음식도 가지가지일 것이고, 안 먹는 음식도 더러 있겠지만 새우를 안 드시는 분은 또 첨이네요. 왜 안 드세요?”
“안 먹는 것이 아니고 못 먹는다니까요. 안 줘서 못 먹고 없어서 못 먹어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 멀쩡한 새우를 다 골라내시면서...”


“이건 새우가 아니고 깐새우예요. 저는 새우를 엄청 좋아하는데 새우는 없고 깐새우만 있잖아요.”
“아니 무슨 그런 궤변 같은 말씀을. 새우나 깐새우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지요.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이곳에 계셔서 전혀 모르시는 모양인데요. 최근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깐새우 양식실태에 관한 잠입취재 보도와 미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가짜생선에 관한 보도입니다.”
“저희는 금시초문인데요.”
“그러니 「세상이 넓을수록 정보는 어둡다」는 속담이 생겨나지요.”
"그런 속담도 있나요?“

“지금 제가 만들었지요. 미국 뉴욕의 여고생 두 명이 학교의 탐구과제로 생선에 관한 연구조사를 하던 중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뉴욕 일대의 식당과 점포에서 유통되는 생선 중 상당수가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됩니다. 먹거리에 관한 한 가장 호들갑스럽다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경악 그 자체입니다. 궁금하시면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미국 가짜생선」이라고 검색을 해 보시면 줄줄이 나올 겁니다.”

식사를 이어가면서 깐새우에 관한 끔찍한 얘기가 계속되었고, 모두 점입가경이 되어 내 얘기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하나 둘 깐새우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깐새우 얘기는 이렇다. 올해 초, 문화방송이 ‘W’라는 프로그램에서 숲과 바다와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태국의 새우양식업에 대한 심층취재를 했다. 세계인의 미각을 유혹하여 해마다 수요에 따른 생산량이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세계 새우수출 1위국인 태국의 한 마을이 소개되었다.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기간수확이 불가피하기에 양식장에 뿌려대는 항생제는 몇 년도 못가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열대 기후 어종 중 75%는 일생의 어느 한 시기에 반드시 머무른다는 망그로브 숲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생태적인 재앙이지만, 무분별하게 살포된 항생제 속에서 자란 새우를 식탁에서 만나야 된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우리나라도 벌써 오래전부터 새우수입국이다. 값이 싸다는 이유로 재래시장에서부터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는 태국산 양식 깐새우는 먹거리라기 보다 독극물에 가깝게 여겨진다. 세계 제일의 새우수입국인 미국 내에서 유통되는 태국산 깐새우의 양이 얼마인지를 안다면 아마도 소동을 넘어서 폭동이라도 날 것 같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쓰임새 때문에 유통이 잘되는 어린 새우를 까기 위해 국경을 넘어와 새우공장에서 일하는 미얀마 아이들의 실태를 보고나면 더 이상 깐새우를 먹기는 힘들어진다. 어린 새우를 까기에는 어른보다 손이 작은 아이들이 능률이 높은 반면 낮은 임금으로 부릴 수 있기에, 명백한 불법인 아동노동이 높은 철문 뒤 공장에서 밤을 새워 자행되고 있었다. 오래 못가 쓰러질 것은 너무나 뻔한 이치이지만, 자국에 비해 그래도 임금이 높은 일거리를 위해 국경을 넘는 아이들은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었다. ‘W’는 방송을 통해 손놀림이 빠르지 않다거나 졸음을 참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공장주의 손찌검을 참아가며 아이들이 밤을 새워 새우를 까는 동안, 한쪽에서는 새우를 양식하는 해변이 무더기로 뿌려대는 항생제를 이기지 못하고 썩어가고 있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나도 그 전까지는 정말 몰랐다. 우리가 밖에서 먹는 음식 안에 깐새우가 그렇게 많이 들어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먹어왔다. 어린 시절 바닷가와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살았던 나에게 새우는 늘 자주 먹을 수 없는 고급음식에 속했다. 명절이나 큰 제사 때면 차례상에 오르는 탕국에서 만날 수 있는 깐새우는 참으로 고소하고 맛있었다. 그렇게 귀한 깐새우가 요즘에는 어떤 음식에나 무더기로 들어있다. 중국음식과 일본음식은 물론이고, 흔히 먹는 해물탕과 심지어 된장찌개에도 수십 마리씩 들어있다. 모두가 싸디싼 수입 깐새우임은 물론이다. 우리 동네 재래시장에서 큰 봉지 가득 든 냉동 깐새우 한 봉지가 삼 천원이니 대형 할인마트나 수산물 전문시장에서는 더 쌀 것이다. 요식업주에게 값 싸고 좋은 맛을 내는 깐새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버금가는 것이라면 지나친 비유일까?

이런 끔찍한 얘기를 하면서도 우리가 식욕을 잃지 않고 식사를 잘 마칠 수 있다는 것은 신비에 가까운 일이다. 결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흥미롭게 끌고 가는 타고난 입담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갈수록 높아지는 먹거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유야 어쨌거나 모두들 열심히 내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같이 깐새우를 골라내어 쌓아놓고서, 그 양을 헤아리며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깐새우가 많이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이렇게 끔찍한 내용을 모른 채, 가져다주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고 있었다는 거 아냐.’

스스로 인식하고 있을 만큼 편협한 사고와 편향적인 삶의 방식을 지니고 사는 나는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보편성이나 일반성이 없어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또한 부드러운 듯 보이면서도 강한 설득력으로 듣는 이가 기쁘게 동참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의 삶 뿐 만 아니라 이웃들까지 더 나은 삶으로 이끌었던 공로가 인정되어 휴먼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로부터 ‘생활 속의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매사에 까다로워 보일 수밖에 없는 나에게 이웃들은 늘 너그러웠다. 노래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평온한 서정 때문에, 평생 그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여기면서, 때로 못마땅한 일도 너그럽게 봐주는 것 같다.

요즘도 어쩔 수 없이 외식을 할 때면,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어떤 메뉴에서나 필연적으로 깐새우를 만나게 된다. 주메뉴에 없더라도 국이나 찌게 혹은 반찬에 반드시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바삐 식사를 할지라도 깐새우 골라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깨어 사는 일에 열심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고마운 것은 내 얘기를 듣고 난 이웃들의 반응이다. 유난스럽고 까다롭다고 핀잔을 주기보다는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깐새우 골라내는 일에 열심히 동참해 준다. 이런 이웃들의 선하고도 천진한 얼굴에서 지속가능한 삶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 고태환

/김정식 2008.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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