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29일 목요일 오전 9시 민주사회장

‘도시빈민의 대부’로 알려졌던 허병섭 목사(71세)가 3월 27일 4시 30분경 패혈증으로 선종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6호실이며, 29일 목요일 오전 9시에 민주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한다. 당일 10시경 발인해 오후 2시에 벽제에서 화장한 뒤 마석 모란공원묘지 납골묘에 안치될 예정이다.

▲ 허병섭 목사.
허병섭 목사는 1974년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빈민운동을 시작해, 청계천 등 서울의 ‘꼬방동네’(판자촌)를 찾아다니며 도시 빈민들의 벗으로 살았다. 허 목사는 이동철(본명 이철용·전 국회의원)의 소설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에 빈민운동가로 등장하는 공병두 목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1976년에는 서울 하월곡동 달동네로 들어가 동월교회를 세웠으며, 이 민중교회에서 판소리로 설교하고, 국악 찬송가를 부르고, 심지어 굿을 하면서 예배를 보기도 했다. 또한 유신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면서 20여 차례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도 하고,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에는 최초의 빈민탁아방인 '똘배의 집'을 세웠고, 이 집은 탁아소 입법화의 계기가 됐다. 그 시절 펴낸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책은 최초의 한국적 민중교육이론서로 평가받는다. 그는 책에서 "민중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조건만 주어지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된다"고 전했다.

1988년에는 '더 낮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목사 신분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도시빈민 노동자가 되어 넝마주이 생활도 하고, 막노동판에서 담배와 술도 배웠다. 급기야 미장일을 익히며 노동자들과 함께 '건축일꾼 두레'라는 노가다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1994년에 독신으로 살던 허병섭 목사는 해직교사 후원회, 참교육시민모임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던 이정진 씨를 만나 결혼하고 1996년 전북 무주로 진도리로 귀농해서 농부로 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생태마을을 꿈꾸어 귀농자들이 정착할 마당을 마련했는데, 2001년에 부부가 함께 펴낸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에서는 "결국 도시 사람은 상업화와 산업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생태적 노동이 가능한 시골살이를 추천했다. 그는 무주에서 대안학교인 '푸른꿈 고등학교'를 세우는데 일조했으며, '녹색대학'에도 깊이 관여했다. 

허병섭 목사 부부는 2008년 부부 명의의 전재산인 임야 6만3000㎡(1만9000여평)을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증했으며, 2009년 부부 함께 '상세불명 뇌손상'이란 진단을 받고 요양원과 병원 등지에서 투병생활을 이어가다가 선종했다.

▲ 허병섭 목사 부부가 집 안마당에서 포즈를 취했다. 쓰러지기 직전인 2008년 자연환경국민신탁에 전 재산을 기부할 당시 사진. ⓒ허병섭, 이정진 선생 쾌유를 위한 카페 http://cafe.daum.net/echocou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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