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가 성인으로 추대되지 못한다면...
그건 바티칸이 로메로 대주교의 사회정의의 가르침과 저력을 과소평가하는 것"

▲ 로메로 대주교 서거 30주기를 맞은 2010년, 산살바도르의 한 아이가 대주교를 가리키고 있다.
매년 봄, 노스캐롤라이나 주 애슈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캔들러 카운티(Candler county) 인근의 작은 성당은 몰려드는 신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활짝 연다. 성 잔다르크 성당(St. Joan Arc Church)의 신자인 에디스 세고비아(Edith Segovia, 38세)에 따르면, 3월 24일 즈음해서는 성당 안에 빈자리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젊은 신자들이 특히나 점점 더 눈에 많이 띠는 추세라는데, 그 모두가 자신들이 미처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남자의 삶을 기리기 위해서라는 게 정말 의외일 따름이었다.

젊은 신자들에게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에 대해 설명하느라 한창 열을 올리던 세고비아는 “이 사람들은 로메로 대주교님을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로 여긴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 역시도 엘살바도르 태생이기도 한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회를 찾은 젊은 신자들에게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1980년 3월 24일에 선종한 로메로 대주교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12년이 지난 1992년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종지부를 찍은 기나긴 엘살바도르 내전의 7만 5천 명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미국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 출신들에게는 비록 30여 년이라는 세월의 강물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내전의 참상과 혼란에 대한 기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뇌리 깊숙이 남겨져 있다. 그와 동시에, 그 시대를 되돌아볼 때면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기억 속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로메로 대주교였다. 그리고 이제 그가 남긴 메시지는 내전의 상흔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2세, 3세들에게까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거주하는 마르따 듀나스(Martha Duenas, 28세)의 부모는 로메로 대주교가 (산살바도르의) 병원 마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살해된 바로 다음 날 엘살바도르를 떠났다. 듀나스는 그런 부모로부터 로메로 대주교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살인을 중단하라고 군인들에게 호소했던 그의 용기에 대해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난 세대였다. <가톨릭뉴스 서비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녀는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요. 저희 집에서는 항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죠”라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스와나노아 시에 거주하는 아르만도 가르시아(Armando Garcia, 28세) 역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엘살바도르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오기 전까지는 로메로 주교의 삶에 별다른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다룬 영화 한 편이 그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그 때부터 로메로 대주교의 인생 역정을 존경하게 됐어요. 우리처럼 단점도 가진 평범한 인간인 그를 말이죠.” 가르시아는 조용하고 이지적인 대주교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로메로 대주교의 변화를 그린 영화와 그의 강론을 들으며 “소름이 돋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가르시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젊은 가톨릭 신자들이 대주교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육성을 담은 오디오와 영상, 사진 등의 자료들이 큰 몫을 담당했다. 젊은이들은 아이팟으로 강론을 내려 받고 유튜브 영상을 친구들과 돌려보며 로메로 대주교의 삶에 한걸음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호세 아르티가(Jose Artiga)는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이야기하다보면 폭력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결코 빠질 수 없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태어난 자신의 세 아들에게는 로메로 대주교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들려줬다고 말했다. 미국에 사는 엘살바도르인들을 돕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어간 엘살바도르사람들의 뜻을 이어가자는 취지로 설립된 쉐어 재단(SHARE Foundation)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에 비유하면서 그 날의 비극은 절대 그냥 묻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암살 부대원들이 어디서나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르던 그 시절, 수많은 생명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신문에는 기사 한 줄나지 않았다. 그러다 대주교라는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성직자가, 그것도 미사 도중에 살해됐다는 충격적인 사실로 인해 전 세계 언론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대서특필 하면서 비로소 엘살바도르에서 자행되던 만행이 만천하에 알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르티가 부부는 해마다 로메로 대주교의 기일이 다가올 때면 자녀들을 미사에 데려간다. 미사에서는 당시의 비극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있은 뒤 수십 년 간에 걸쳐 진행된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고 아르티가는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산살바도르 대성당 지하에 묻혀있는 로메로 대주교를 참배하기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직접 엘살바도르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소원을 빌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엘살바도르 국민들이 지금도 여전히 로메로 대주교가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줄 거라 믿고 그를 존경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르티가는 아이들이 분명 “로메로 대주교가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대학생 엘사 플로레스 뽀르띠요(Elsa Flores Portillo, 24세) 역시도 엘살바도르 출신의 부모에게서 로메로 대주교의 삶에 대해 배운 케이스였다. 특히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는 틈만 나면 로메로 대주교와 사회 정의를 위한 그의 투쟁을 되새겨주곤 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어머니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어머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셨어요”라고 플로레스는 말했다. 이를테면, 플로레스 자매에게 힘없는 노인들을 도우라거나 교회에서 자리를 양보하라고 한다든지, 혹은 그녀들이 불평을 늘어놓기라고 하면 너희보다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면서 야단을 치시곤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플로레스가 정말로 로메로 대주교를 깊이 존경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바로 워싱턴의 성심성당(Sacred Heart Church)에서 열린 추모행사로, 여러 사제들과 신자들이 모여서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기리며 그의 삶을 되짚어보는 자리였다. 특히나 그 성당은 내전을 피해 엘살바도르를 떠나온 사람들을 보듬어 안았던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녀는 “세상에는 온갖 오락거리와 첨단기기들이 넘쳐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들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사이에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았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예요. 남에게 베푸는 작은 행동 하나가 그 사람의 삶에는 참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깨달음 같은 거 말이에요.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기리다보니까 ‘이 사회를 위해 내가 한 게 과연 뭐가 있을까’하는 질문도 던져보게 되고, 또한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기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더라고요.”

앞에서 언급한 아르티가의 주장에 따르면, 로메로 대주교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그를 존경하던 엘살바도르 출신 가정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다가 점점 사회 정의에 관심이 있는 대학이나 모임, 지역 공동체들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디트로이트 시에 사는 낸시 켈시(Nancy Kelsey)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올해 29살인 낸시의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은 내전으로 인해 엘살바도르를 떠나온 난민 출신들이었다. 고국에서 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빈곤한 삶을 살았으며, 로메로 대주교가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바로 그 불의한 현실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크레이튼(Creighton)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주최한 수련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그녀는 대주교의 삶에 관한 글을 읽고 그의 강론을 들으며 그의 가르침이 오늘날 이 세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내린 답은 로메로 대주교가 전한 메시지는 세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의란 엘살바도르 같은 특정한 공간이나 시대에 한정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그녀는 힘겨운 청춘의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로메로 대주교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고도 했다. “꼭 대단한 사람들만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거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젊은층과 노년층 사이에서는 로메로 대주교를 성인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바티칸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기 위한 검토 작업이 몇 년 째 진행 중에 있기도 하다. 아메리카 선주민인 포타와토미(Potawatomi) 족의 혈통이 섞여 있기도 한 낸시는 역시 같은 아메리카 선주민 부족인 알곤킨(Algonquin)과 이로쿼이(Iroquois) 출신의 여성 평신도였던 복녀 캐서린(Katherine)의 성인 시복식을 앞두고 미국 선주민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로메로 대주교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정말 좋겠다는 바람을 솔직히 드러냈다.

“복녀 캐서린이 선주민들의 영웅이라면, 로메로 대주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죠. 만약 그가 성인으로 추대되지 못한다면, 그건 바티칸이 로메로 대주교가 전한 사회 정의의 가르침과 저력을 과소평가하는 거라고 봐요. 그의 가르침은 단순히 내전 상황을 떠나서 보편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기사 원문 출처/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12-3-22
리나 귀도스 (Rhina Guidos, Catholic News Service)
번역/ 한수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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