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변영국]

이거 원...
또 누군가를 찍어야 한단다.
민주주의 국가를 살아가는 민주 시민으로서, 혹은 너무나도 거룩하고 숭고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시민으로서, 누군가를 찍지 않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배웠고 떠들었으니 누군가를 찍긴 찍어야 할텐데....
이거 원....
TV를 도배하는 정치모리배들의 낯판떼기는 어찌 그리 구역질이 나는지...

구역질을 참아가며 투표를 하는 기분은 마치 토사물 위에 얹혀, 버려져 있는 만원짜리를 줍는 것처럼 처참하고 궁상맞은 일임을 나는 수십 년의 경험으로 안다.

사실 이제까지 나는 ‘투표를 했다’기 보다는 투표를 ‘얼른 해 치워’ 왔다. 그래도 대통령을 뽑는 대선은 나름의 기대도 하고 조바심도 내며 투표를 했지만, 국회의원 뽑는 투표는 그들이 뽑혀서 뭘 어떻게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바 그저 ‘민주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만을 해 치워 왔던 것이다.
정말이지, 건강한 시민의식으로 투표를 기다리는 많은 분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파란 색에서 붉은 색으로 유니폼을 바꿔 맞춰 입고, 마치 고장 난 머리 핀, 혹은 이빨 교정기의 철사를 방불케 하는 기상천외한 로고를 채택하는가 하면 한나라당 뺨치게 절절한 ‘우리말 사랑’의 결정인 <새누리당>을 당명으로 채택해, 오로지 이 국면만을 위해 절치부심, 절차탁마, 불문곡직, 노심초사, 와신상담 하시던 박 모 후계자님을 사령관으로 들어앉힌 양반들의 개그적 국가 사랑을 보면서 어느 누구에게 투표를 할 것이며, 그나마 진보적인 양반들이라고 믿었던 분들이 매우 진보적인 밥그릇 챙기기에서 벗어나기 힘겨워 하는 꼴을 보면서 뭔놈의 민주시민의 의무를 운운한다는 말인가. (새누리당에 비해 나머지 분들에 대한 묘사가 다소 빈약한 것은 그저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내 맘이니까.)

▲ 새누리당 홈페이지에는 이 로고와 심벌의 의미를 "국민의 소망을 담고 갈등과 다름을 품고 국민의 소리를 듣고 그래서 함께 웃는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생각으로 거리를 헤메다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없어지기는커녕 바득바득 이를 갈며 존재한다) 명동에서 을지로로 건너가는 횡단보도 바로 앞에 가로 걸린 펼침막에 ‘친박연대’라는 당명이 적혀 있는 것을 봤다. 말하자면 박정희와 친하고 싶은 사람들이 연대한 당이라는 뜻일테고 이즈음에 그런 펼침막을 내걸었다는 것은 후보를 내겠다는 것인 바, 새누리당의 총선 캠프를 지휘하는 분하고 이 분들의 관계는 과연 뭔가 하는 생각도 나고....

내가 처음 가톨릭교회에서 영세를 받을 때의 마음은 이랬다.
아... 그래도 여기는 원주의 지학순 주교님이나 정의구현사제단이니 문정현이니 하는 신부님들이나... 무엇보다도 김수환 추기경님이 떡 버티고 계시니 얼마나 진보적이고 고상하고 멋질까...

그런데 세례를 받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나는 성당에서 말을 조심해야 했다.
“토마스, 뭔가 모르고 있나본데 박정희 전두환 어쩌구 하지마. 침묵하는 다수는 다 그들 편이야. 토마스가 뭘 안다고 그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거 지금 뭐 하는 거야.”
“노무현이 가톨릭을 믿는다는구만. 말세야 말세...”

내 대부님을 포함한 성당의 어르신들은 정말이지 예외 없이 이런 말들을 쏟아내셨다. (얼마나 울분들이 치미셨는지는 몰라도 술자리에서 마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어야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욕설을 포함한 고함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조금 진보적인 보좌 신부님이 강론을 하실 때 점잖게 일어나서 문을 쾅 닫고 나가시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아.... 친박연대...... 그 지겨운 친박연대.. 박... 박....

구역질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조금은 진지해져야 하는 이유를 나는 발견했다. 나는 그 양반들, 말하자면 친박연대를 포함한 수구 꼴통 분들을 그저 비웃어 왔다. 사람이 머리에 뇌수를 가지고 사는 한 어찌 저런 생각을 진지하게 할 수 있을까 의심해 왔다.

그런데 이제 곰곰 돌이켜보니 그 양반들.... 정말 엄청나게 진지하시고 불변하신다. 그런데 나는 그저 농담이나 하고 낄낄거리고 있으니 이게 참 문제라 이 말이다. 물론 무거운 것 보다는 가벼운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죄는 아닐 테고, 더구나 요즘의 세태는 그저 앞다퉈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세태이니 나만 가벼운 것은 아닐테지만, 저 양반들이 너무 무겁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스런 젊은이들이여, 온라인의 촌철살인을 그만두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다)

저 양반들 너무 무거워서 이번 투표는 이제와는 아주 다르게, 진지하게 해보려 한다.
그나저나...
우리 동네에는 누가 나오나? 저 쪽 붉은 티셔츠와 이빨 교정기 팀에서는 누가 나오는 것 같던데...

변영국(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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