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 교수의 <믿는다는 것> -6

믿음은 관심이다

이제까지 믿음이 어떻게 성립되는지, 그리고 지성, 사랑, 의지, 용기, 기대, 희망 등 믿음의 속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이들을 종합하는 개념을 하나 더 정리할 필요가 있다. ‘관심’이라는 말이다.

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외모, 돈, 친구, 가족 등등에 관심을 기울일 테고, 입시, 직업, 명예, 칭찬 등에도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관심은 우리가 기울이는 여러 관심들 중 일부이다.

그에 비해 믿음은 좀 더 깊고 전인적인 관심이다. 어떤 것을 믿는다면, 그때의 믿음은 단순히 그 어떤 것에 대한 기질적인 이끌림 정도가 아니다. 그 대상을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다. 정말 믿는다면 믿음의 주체와 대상 간에 거리가 없다. 그 대상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바를 위해서는 목숨마저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폴 틸리히는 이러한 상태를 신앙(faith)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그는 신앙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풀어 쓴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말은 전존재적 관심, 즉 나의 모든 것을 다해 기울이는 관심이라는 뜻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울이는 관심이나 사랑에 빠진 애인 사이의 관심과도 비슷하지만, 원칙적으로 그 이상이다. 만일 사랑을 ‘나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정리한다면, 궁극적 관심은 사랑의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신앙과 사랑은 상통한다는 뜻이다.

어찌되었든 신앙은 모든 것을 다 내어 줄 만큼 깊이 있는 상태이다. 하느님 또는 세상의 존재 원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긴 행위이자, 그와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순수한 의미의 사랑이기도 하고, 경외이기도 하고, 헌신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듯이, 신앙은 나의 모든 것을 다 기울이고 있는 관심의 상태를 뜻한다. 그것이 궁극적 관심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신앙의 내용 및 범주는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믿음의 내용 및 범주와 상당 부분 겹친다. 이제는 그 겹치는 부분과 겹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정리해보자. 


믿음과 신앙

이미 말했듯이, 믿음은 어떤 가치나 사실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내적 상태(state)이다. 신앙도 일종의 내적 상태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한다. 하지만 둘 다 일종의 내적 상태이면서도, 믿음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나 사실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면, 신앙은 그런 가치나 사실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본래적인 능력이나 자질(quality)에 무게 중심이 있다. 믿음이 일상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곳에 쓰이는 낱말인데 비해 신앙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주로 사용된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신앙은 현실 안에 살면서도 현실의 근원 혹은 현실 너머를 상상하고 지향할 줄 아는 능력이기도 하고, 초월적 신을 느끼게 해 주고 인식하게 해 주는 타고난 자질이기도 하다.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신앙(faith)을 현실 안에 있으면서 현실 너머, 즉 초월과 교감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바탕이나 자질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런 자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실제로 상상할 수 있고, 그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너머 혹은 근원의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그에 어울리게 살아갈 때 ‘종교적으로 산다’고 말한다. 신앙은 그저 세속적 삶에 머무는 것이 아닌, 세속 너머 또는 근원에 대한 통찰이자 전체 삶으로 응답하는 과정 혹은 자세이다. 그것이 종교적 자세인 것이다.

이에 비해 ‘믿는’ 행위는 좀 더 구체적이다. 특히 믿음의 대상이 더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친구에 대한 믿음, 남편이나 아내 혹은 부모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에 잘 담겨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처럼 광범위하고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믿음은 대체로 그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에 제한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내용이 이런 것이라거나 저런 것이라거나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신앙은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좀 더 깊은 차원을 의미한다. 앞에서 본대로 신앙은 신이든 진리이든 삶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며, 그에 어울리게 변화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 22,37)고 말했다. 마음, 목숨, 정신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단체에 열심히 참여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 최고의 진리에 모든 것을 걸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특히 인격이 달라진다. 당연히 인격에 변화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나 마커스 보그(Marcus Borg)가 고대 유대인의 언어를 빌려 faith를 인간의 ‘심장’에 비유한 것은 적절하다. 심장이 멈추면 생명이 끝나듯이, 신앙은 인간됨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사실을 믿지 않고도 살 수는 있지만, 인간의 삶 전체가 인간을 인간되게 해 주는 근원 -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불교에서는 불성, 이슬람에서는 알라, 한자 문화권에서는 도(道) 등으로 부르는 - 과 어울리지 못한다면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특정 종교 단체에 속해야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faith라는 말의 의미가 그렇듯이, 현실에만 타협하지 않고 삶 전체가 좀 더 깊고 일관된 인격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faith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전체와 관련된 자세이다.

그런 점에서 한자 문화권에서 faith를 단순히 ‘믿음’[信]이라 번역하지 않고, 믿는 상태(信)와 우러르는 행위(仰)를 모두 포함하는 ‘신앙’으로 번역한 것은 번역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한자어 신앙(信仰)은 높은 인격적 신을 믿고 우러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영어 faith와 뉘앙스가 다소 다르지만, 신을 믿고 우러를 수 있으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자어 信仰도 외적 행위와 내적 자세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적 자세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학의 눈으로 보면, ‘믿음’보다는 ‘신앙’이 더 큰 범주가 된다. 신앙을 가진다는 말은 어떤 주장들에 대해 동의하는 정도를 넘어, 그 주장이 지시하는 세계에 나의 가장 깊은 차원을 바친다 혹은 헌신한다는 뜻이고, 그것을 충분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현실 종교계에서 신앙이라는 말을 어떤 명제나 선언을 받아들이는 인식적 행위 정도로 축소하기도 하지만, 본래 신앙은 그 어떤 대상에 나의 삶 전체를 바친다는 뜻이다. 신앙은 전적인 사랑이기도 하고 헌신이기도 하고 변화이기도 하고 경외이기도 하다. 신앙은 문자로 된 교리를 수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리와 신조가 가리키는 세계, 하느님의 세계에, 일원상의 진리에 충성하는 것이다. 신 혹은 일원상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나의 모든 삶이 바로 그 진리의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거나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념과 신뢰

신앙의 특정한 형태 중 하나가 belief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의 믿음은 영어 belief에 비해서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범주를 구분하려면, belief는 ‘신념’이라 번역하는 것이 나을 때가 많다. 신념은 믿음(信)과 생각(念)을 합한 말이다. 신념의 ‘념’(念)은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마음에 품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신념은 어떤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마음으로 믿고 품는 행위를 말한다. 영어 belief도 대체로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점에서 신념(belief)은 인간의 본래적 능력인 신앙(faith)의 구체적 표현 중 하나이다. 앞에서 규정한대로, 신앙은 인간 삶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며, 그에 어울리게 변화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상태이다. 다소 광범위하고 어찌 보면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그에 비해 신념은 어떤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주 구체적인 자세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다”는 말은 괜찮지만, “신에 대한 신념이 있다”고 말하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라”는 말에서처럼, 신념은 ‘이것이 옳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단정이고 기대이다. 신념 역시 현실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의 본래적 능력의 구체적 표현이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를 통해 그의 내적 신앙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신념 혹은 공동의 믿음을 가진 이들 사이의 관계가 튼실해질 때, 그 튼실한 관계성을 영어로 ‘trust’라 한다. 우리말로는 ‘신뢰’라 번역한다. 신뢰는 믿고[信] 의지하는[賴] 자세 또는 행위이다. 신뢰는 나와 비슷한 차원의 존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신을 신뢰한다’는 말보다는 ‘친구를 신뢰한다’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신념은 신뢰라고 하는 사회적 관계망으로 이어진다. 내가 친구에게 돈을 빌린다면 반드시 갚는다고 생각하고 빌리는 것이다. 빌려 주는 친구도 내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빌려 준다. 그리고 때가 되면 돈을 갚는다. 그렇게 약속이 지켜질 때 서로 더 신뢰하게 된다.

공자는 한 제자가 평생 실천할 수 있는 한마디의 가르침을 달라고 하자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논어』 안연편)는 문장으로 답을 했다. 예수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말했고, 소태산은 “다른 사람의 은혜를 받고자 하거든 내가 먼저 은혜를 베풀라”(『대종경』 요훈품 14장)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에는 모두 남을 나와 같은 차원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서로가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생각할 때 친구 간에, 가족 간에, 이웃 간에 신뢰라고 하는 관계망이 형성된다. 이 관계망이 계속 이어진다면 신뢰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뢰를 믿는다. 신뢰는 신뢰를 낳는다.....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종교는 이런 관계망을 적절히 이루고 활용한다. 가령 종교인들은 예배나 예불 혹은 법회 같은 종교 의례를 행한다. 종교 의례는 내적 신앙을 확인하고 그 신앙의 원천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그때 내적 상태를 언어로 표현한 경전을 읽고 그 압축적인 뜻인 교리 혹은 가르침들을 되새긴다. 노래와 기도를 하기도 하고, 교리에 대한 신념을 갖는 이들도 생긴다. 그러는 과정에 공동체도 형성된다. 공동체는 신뢰의 관계가 있어야 가능하다.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신앙에 기반을 둔 신뢰의 관계를 종교 의례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이찬수 (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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