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영화] <달팽이의 별>, 이승준 감독, 3월 22일 개봉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남자와 아주 작은 여자. 두 사람은 손가락으로 대화한다. 한 사람의 손가락을 상대편 손등 쪽 손가락 마디에 꼭꼭 눌러 대화하는 ‘점화’라는 방식이다. 시청각장애인 영찬씨와 척추장애인 순호씨는 그렇게 손가락으로 소통하며 느리게 세상을 헤쳐나간다.

춤추듯 움직이는 손가락과, 거친 풍파에도 고요함을 간직한 아름다운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이 영화는 장애인 부부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달팽이의 별>을 만든 이승준 감독은 한국 다큐가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EBS, 일본 NHK, 핀란드 공영방송사 YLE와의 공동제작, 미국 선댄스 다큐멘터리 펀드 지원, 아시안 사이드 오브 더 독, 유로독 공식 프로젝트 선정 등으로 한국 다큐의 국제공동제작 선례를 낳는 것으로 화제를 낳더니 큰 일을 냈다.

다큐멘터리의 칸느영화제라고 불리며, 다큐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영화제로 인정받는 암스테르담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작년 11월에 대상을 받았고, 올 4월에는 미국 트라이베카 영화제 월드다큐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이미 미국 공영방송인 PBS의 POV란 프로그램에서 2011년 최고 다큐멘터리 12위에 올랐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한국 다큐의 세계 시장 진출의 가시적 성과를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달팽이의 별>과는 사뭇 스타일이 다른 작품들이었다. 전쟁 한복판에서 1인칭 시점으로 현장을 고발하는 작품, 제3세계 나라 어느 사창가에서 펼쳐지는 긴박한 드라마가 있는 작품 등 현장감과 동적인 움직임으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작품들 가운데 느린 리듬을 가진 <달팽이의 별>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심사위원단의 감식안은 이 영화에 대상을 수여하는 동시에 드러났다. 이 영화는 단박에 사로잡는 매력보다는 고요하게 몰입하다 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멋으로 충만한 작품이다. 시적인 이미지와 미세한 숨소리도 잡아내는 입체적인 사운드의 힘에 동양적인 여백이 느껴지는 영화의 리듬감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자신을 우주인으로 표현하는 영찬씨는 시인이고 수필가이자 극작가이며, 조각가이고 히브리어 통역사 준비생이다. 그는 이 모든 행위를 손가락을 통해 달성한다. 아주 느리게 느리게… 그리고 그 옆에서는 아내가 있다. 시각과 청각은 우주 어느 곳에 떠돌다가 자신에게로 다시 오게 될 것이라고 믿고, 별의 존재는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순수한 이 남자에게 아내인 순호씨는 하늘이 준 선물이다.

어느 날 다가와 눈과 귀가 되어준 그녀. 영화는 아내의 입장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지는 않고 있으며, 혹자는 이 점에서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애인을 동정이나 연민으로 바라보지 않고, 매력 있는 한 인간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의 일관된 시선 속에 그녀의 육체적 힘겨움 보다는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영화에는 여러 가지 특별한 에피소드들이 많다. 방의 형광등을 가는 일이란 키가 작아 손이 닿지 않는 아내와 눈이 보이지 않아 조준할 수 없는 남편의 협업에도 온 하루를 소요해야 할 큰 행사다. 그렇지만 이 형광등 에피소드는 이 부부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매우 느리지만 두 사람이 한 유기체가 되어 돕고 결국은 해내고야 마는 것. 처음으로 홀로 외출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창가에 선 작은 아내. 나무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느끼고, 솔방울을 쥐고 함박웃음을 웃으며, 바다와 바람 소리를 듣는 작은 행복을 잘 아는 남자. 이 남자 영찬씨는 어린 왕자처럼 멋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흔히 접하던 휴먼다큐와는 많이 다르다.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없다. 그들의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는 회상도 없다.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도 최소화한다. 흔히 다큐는 말이 많지만, <달팽이의 별>은 묵언이 주는 통찰의 순간을 중시한다.

객관적인 위치에서 거리를 두는 카메라는 두 사람의 현재를 따라간다. 그 길에 극적인 사건이나 가슴 울리는 비통한 사연, 혹은 눈물을 자아내는 센티멘털리즘은 없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으로 빛나는 두 사람의 얼굴과 손가락으로 나누는 대화면 충분하다. 육체의 병과 생활고 문제를 안고 있는 처지가 몇몇 장면에서 표현되기도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에서 희망을 보는 낙관적인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간 카메라를 통해 함께 한다는 것의 기쁨이 흐뭇하게 다가온다. 이 봄에 살아있는 멜로를 느끼고 싶다면, 세계적인 다큐멘터리의 퀄리티가 궁금하다면, 그건 <달팽이의 별>이다.

*3월 22일 개봉.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글자막과 산울림 김창완씨의 음성해설을 삽입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 버전을 한국영화 최초로 시도.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