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 영화] 변영주 감독, <화차>

<화차>는 이제는 486세대가 된, 386세대 감독이 사회적 테마를 놓지 않으면서 상업 영화계에 안착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변영주 감독의 1990년대는 위안부 할머니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린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로 요약됩니다. 이 당시 순정만화의 남주인공 같은 외모를 지녔던 변영주 감독은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고 영화를 꿈꾸던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었죠. 2000년대 변감독은 상업 영화계로 진출, <밀애>(2002), <발레교습소>(2004)를 거쳐 2012년 3월 <화차>를 들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세월만큼 둥글어진 표정과 모습으로 말이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화차>는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약간의 설정 변화를 제외한다면,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영화입니다. 화차(火車)는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 나르는 불수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는, 권선징악적 의미가 뚜렷한 단어인건데 영화를 이미 보신 분이라면 약간 어리둥절할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선악이라는 가치 평가는 두드러지는 요소가 아니거든요.

영화는 서로 다른 목적을 동력으로 하는 두 남자의 버디무비에 가깝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약혼녀(가짜 강선영/차경선, 김민희 분)가 갑자기 사라져버려 혼란에 빠진 예비 새신랑 이선균(장문호 역)은 전직 형사인 외사촌 형 조성하(김종근 역)에게 사건을 의뢰합니다. 이선균은 약혼녀를 찾아 사랑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목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면 조성하는 김민희의 실종에 살인사건이 숨어있음을 확신하고 범인을 찾고자, 경찰과 협력하면서 동분서주합니다. 이 갈라진 동선은 영화의 결말까지 이어지고, 그 결과 다소 이질적인 감상 포인트가 만들어집니다. 이선균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멜로드라마로 영화에 접근한다면, 관객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면 세련된 추리물을 기대하면서 조성하에게 무게 중심을 싣는다면, 안타깝게도 만족스럽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변영주는 멜로드라마를 강화하는 쪽으로 원작에 변형을 가합니다. 사라져버린 약혼녀(원작에서는 신조 교코)가 타인의 신분을 도용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원작의 약혼자 가즈야는 사건에서 손을 털고 사라집니다. 대신 신조 교코가 사칭한 인물이면서 그녀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세키네 쇼코의 소꿉친구 다쓰모가 수사에 참여하면서 멜로적 요소가 매우 가냘프게나마 명맥을 유지합니다. 변영주는 이 지점을 놓지 않고 가즈야와 다쓰모의 역할을 이선균에게 모두 심어놓음으로써 원작의 복잡한 내러티브를 단순화합니다.

이것은 장점이면서 단점이 됩니다. 장점은 멜로드라마의 감정선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업영화로서는 영리한 선택이지요. 마지막까지 여주인공의 무죄를 믿고자 하는 순정남이라니, 관객들이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는 좋은 캐릭터가 아니겠습니까. 반면, 진짜 강선영(차수연 분, 원작에서는 세키네 쇼코)의 역할이 축소됨에 따라 사회파 드라마로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을 낳습니다. 원작자는 세키네 쇼코가 개인파산을 하게 된 전말을 사회적 문제로 부각시킵니다. 1990년대 일본의 신용카드 대란, 즉 무분별한 소비와 개인 파산자 급증 같은 문제를 개인의 탓만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서구의 신용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한 교육이 부재했던, 전사회적 책임 방기의 문제로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이지요. 살해당한 세키네 쇼코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시선은 그녀를 잊지 못하는 다쓰모를 통해 소설의 마지막 순간까지 견지됩니다.

하지만 변영주의 <화차>에서 진짜 강선영(원작의 세키네 쇼코)은 살인사건을 입증할 시체로서만 현실성을 갖습니다. 나머지는 불행한 과거사를 가진 한 여성의 환영으로 다루어질 뿐이지요. 이것은 강선영에게 닥친 비극의 양을 줄임으로써 여주인공 차경선의 악행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한 원작의 신조 교코가 저질렀던 살인미수 행위가 차경선의 출산과 아이의 사망으로 대체됨에 따라 차경선의 여성적 비극과 수난이 강화됩니다. 관객은 이선균의 사랑에 따른 방황과 고뇌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원작이 여주인공에 의해 희생된 세키네 쇼코를 동정하면서 사회적 드라마와 추리물의 교배를 보여주었다면, 변영주의 <화차>는 여주인공 김민희의 수난사와 멜로드라마에 관심이 보다 많습니다.

화차의 악마성이 약해진 자리에 변영주는 자신의 실존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는 인간 보편의 욕망을 채워 넣습니다. 내가 아닌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은 플로베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보봐리즘이라고 부릅니다. 더 멀리는 장자의 호접지몽이 있었지요. <화차>의 차경선은 나비를 애완용으로 키우고 싶어합니다. 나비는 김민희의 스키니한 몸매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어울리는 동물이기도 하지요. 그녀의 마지막 발길이 용산역 행이었던 것도 함평의 나비축제를 보러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나비였으면 하는 욕망은 사회적 스트레스가 클수록 더 커집니다. 나비축제에서는 ‘나비가 아니라 내가 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비들은 날갯짓에 몰두하느라 그 아름다운 비행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다가오는 축제를 그리며 잠시나마 평화와 위로를 떠올리는 아침입니다.

 
 
진수미(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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