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누구인가-김유철]

지난달에 이어 우리신학연구소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다. 우리신학연구소 입장에서는 이제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기억하기 싫은 상처를 덮어두길 바라겠지만 그동안의 일이 ‘사태’라는 표현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그 상처의 아픔은 넓고 깊었다.

지난달 필자가 기고한 칼럼 <우신연와 나꼼수>에서 처음으로 우리신학연구소 문제를 언급하자 독자 중 한 분이 댓글을 통해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이 댓글은 편집자가 필자의 동의 없이 칼럼을 내렸다가 항의를 받고 다시 올리는 과정 중 사라졌다- “무슨 일”에 대한 보도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몫이었다.

추기경 비판하긴 쉬워도 안면 바치는 선후배 목에 방울 달긴 어려워

그러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일련의 일을 친구 집 부부싸움으로 치부했고 외면한 채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신학연구소 사태가 빨리 해결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우리가 말하는 교회대안언론의 용기부족과 신념부족 혹은 인연 줄서기거나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망상 강박관념과 다름 아닌 것이다.

멀리 있는 교황이나 얼굴대고 접할 일 없는 추기경을 비판하는 일은 쉬워도 가까이 지내는 사제는 물론이거니와 이른바 ‘안면 바치는’ 선배나 후배의 목에 방울 다는 일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이번 칼럼의 주제는 아니니 -한 번 날은 잡아보도록 하고- 오늘은 새 출발을 다짐하는 우리신학연구소(이하 우신연)에 바라는 바를 쓰고자한다.

▲ 우리신학연구소 홈페이지 갈무리

글이 너무 딱딱한 것 같아 남우세스러운 말을 한 번 해야겠다.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는 얼마 전까지 무소속 이름표를 줄창 달고 있던 김두관선생이 도지사로 있는 경상남도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경남도지사는 야권단일후보가 당선되었지만 도의회는 새누리당(옛 한나라당)이 다수당이다. 그래서 김두관지사는 도정을 해나가는데 있어 연일 악전고투다.

그러던 차, 2011년 경상남도 추경예산을 만들 때 도정부가 제출한 예산중 많은 부분이 당시 한나라당 도의원들에 의해 삭감되었다. 삭감되거나 아예 상정조차 되지못한 예산들 중 많은 이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던 것은 그 예산들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민족’ ‘통일’ ‘독립’ ‘민주’란 단어 탓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독립영화협회’ 예산은 엉뚱하게 유탄을 맞기까지 했다. 그 독립은 유관순 누나의 독립과는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학은 신‘학’이지 신‘악’이 아니다

‘민족’ ‘통일’ ‘독립’ ‘민주’라는 말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신학연구소가 내걸은 ‘우리’라는 말에 자지러지는 사람이나 집단은 혹시 없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라는 말은 ‘누구’라는 인칭 대명사라기보다는 ‘무엇’이라는 목적어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우신연은 1994년 창립총회를 하면서 스스로 연구소의 목적으로 삼은 것이“‘우리신학’을 형성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 밝힌 바 있다.(정관 제1장 제3조)

그러기에 우신연은 자신들의 영문표기마저도 ‘WE’ 가 아닌 ‘WOORI’라고 했으니 그들 스스로도 ‘우리’라는 개념이 지니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제 우신연은 창립 17년차에 들어왔으니 그동안의 성과나 활동에 있어서 얼마나 ‘우리신학’을 형성 발전하였는지 뒤돌아보고 동시에 앞으로의 지향점으로도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첫 번째 일이다.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 이런 말을 했다. “음악은 음‘악’이지 음‘학’이 아니다.” 필자는 똑같은 의미로 우신연의 연구위원들에게 말하고 싶다. “신학은 신‘학’이지 신‘악’이 아니”라고 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신‘학’을 강조한 의미가 사람이 아닌 하느님하고만 놀라는 의미는 아니며 신학을 통해 뜬 구름 잡으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신학을 신악으로 만들어 스스로 즐기는 부류, 그 용어 해설이나 해설을 위한 해설로 밥벌이에 급급한 부류는 신학자라기보다는 신악자들인 것이며 신학이 그들을 위한 지적배설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신학연구소’가 ‘우리신악연구소’가 되고 안 되는 것은 새 출발을 맡은 자들의 중요한 소임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동시에 “신학은 교실에서 시작해 시장에서 마무리 한다”는 말 역시 잊지 말아야한다. 적어도 교회에서 ‘신학’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교회의 학문임에 틀림없다. 사회교리의 잣대로 현 시대의 많은 갈등과 부조리를 해소하려 하지만 애초에 그 자리는 신학의 온전한 자리여야 한다. 그 어떤 신학도 예수를 외면하고 넘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청소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인적요인 뿐만 아니라 교회를 둘러싼 수많은 난제들, 세기말적인 자연재해와 세계경제의 난맥상을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우리신학’으로 성찰하고 해석하는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대해야 한다. 스스로 고고한 신학연구소로 남는 것이 아니라 교회내의 단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나라, 다른 종교, 다른 연구소와 함께 연대해서 나가야 한다. 역량부족, 예산부족보다 더 연구소를 위축시키는 것은 의욕부족이거나 지향점 상실임을 연구소의 관계자들은 아프지만 스스로 절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내부갈등으로 그토록 긴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으니 우신연 구성원 모두의 잘못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사장이나 이사회가 경영자 혹은 사(使)가 아니듯, 상근자나 활동가는 노(勞)가 아니다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소통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단체 할 것 없이 이사장이나 이사회는 경영자 혹은 사(使)가 아니며 상근자나 활동가, 연구위원은 노(勞)가 아닌 것이다. 또한 후원회원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구경꾼 취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단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행인1, 행인2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우신연에서는 이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인드라망이라는 불교적 용어가 아니라도 모두가 서로를 비추는 물방울이며 상대방이 있어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유기체인 것이다.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존재를 ‘하느님’이라 부르고 ‘아버지’로 고백하는 신앙의 공동체에게 이런 어려운 시기를 초대한 것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앙공동체는 죽음을 끝이라 부르지 않으며 새로운 부활의 발판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고백이라 부른다. 예수는 그토록 사랑하고 돌봐줬던 제자의 배반과 외면으로 십자가에서 죽어갔지만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빵을 나누었으며, 갈릴래아 고기잡이로 돌아간 애비 잃은 것 같은 제자들을 위해 고기를 구워서 그들을 소리 내어 불렀다. 우리는 그런 예수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창립20주년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신학연구소의 알찬 발걸음을 기원한다. 교회 안에서 씨를 얻어 세상 안에서 꽃을 피울 많은 연구위원들과 동반자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비오는 날은 궂은 날이 아니라 그런 날이 있어야 온 천지에 물 흐르고 언 땅이 녹는 법이다. 나는 여전히 우신연의 제1호 후원회원임을 자랑스러워한다.

김유철 (한국작가회의 시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경남민언련 이사. 창원민예총 대표. 저서 <그대였나요>, <그림자숨소리>,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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