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따라 걷는데 장애물인가, 길동무인가?”
[가톨릭도서관 나들이] 왈벗 뷜만,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감을 받아 ‘복음선교’에 대한 탁월한 저작들을 내어놓았던 카푸친회 수도자인 왈벗 뷜만의 생각을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빌어 소개하고자 한다. 왈벗 뷜만의 책은 그동안 우리나라에 분도출판사를 통해 <선민과 만민>(1983년),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1991년), <볼 눈이 있는 사람은>(1992년), <하느님의 넉넉한 품으로>(1996년)가 번역출간되었다.

오늘은 먼저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을 통해 뷜만이 바라본 예수에 대한 인상기(印象記)를 소개하려고 한다. 뷜만은 “인류 역사란 느릿느릿 강물처럼 흐르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면서 탈출구가 없던 시대마다 돌연 질적 비약을 낳았던 사건들을 나열하며, 현대인이 기원원년으로 삼고 있는 ‘예수가 태어난 때’의 운세를 살핀다.

하느님의 놀라운 모험, 예수

▲ 욀벗 뷜만은 카푸친회 소속으로 저명한 선교학자로, 지금은 스위스 아르트에 있는 '고요의 집'에서 살고 있다. 
베들레헴 초원의 천사 이야기, 동방에서 온 현자 이야기, 에집트 피난 이야기 등으로 시작되는 예수 이야기는 “믿고 싶지 않은 사람도 꼭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본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신화’ 형식으로 장식한 것이라고 전한다. 곧 예수 사건은 모험을 즐기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두 번 다시 없는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인류에게 선사하신 것이라고 소개한다.

뷜만은 예수 사건을 하느님이 무슨 기적으로 사물의 운행에 개입한 게 아니라고 전한다. “예수는 어둠에서 나오듯이 나타나셨고, 어디서 또 어떻게 그분이 처음 서른 해를 보내셨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고 고백한다. 아마 바오로처럼 랍비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겠지만 읽고 쓸 줄은 아셨다. 아무튼 그저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은 거기 계셨고,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찬양을 받으셨다”(루카 4,15)

그러나 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이 돌출자의 모습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고, 미심쩍어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이 사람한테 이런 지혜와 기적들이 내렸을까? 이 사람은 장인의 아들이 아닌가?” 물었다. 결국 회당에 모였던 이들은 분통을 터드리며 들고 일어나 예수를 고을 밖으로 끌어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그러나 예수는 흐트러짐이 없이 유랑설교가로서 두루 다니며 하느님 나라를,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굽어살피심과 사랑을 선포했다. 이 경이로운 가르침을 믿을만하게 하기 위해 그분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주린 이를 배부르게 하시고, 귀신 들린 이를 풀어주셨고, 죄인을 용서했으며, 묻는 이에게 대답해 주시고, 남녀 제자들에게 율법 대신에 조언과 권고를,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예수, 하느님 자비에 대한 ‘아멘’이라는 긍정

그러나 그분이 참아낼 수 없었던 인간이 있으니, 율법의 멍에를 가련한 인생을 억누르는 이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예수의 가르침이 먹혀들지 않았다. 거듭해서 그분과 논쟁을 벌이고, 결국 집권 점령세력과 결탁해 그분을 십자가로 끌고 갔다. 그런데 여관방마저 거절당하고 구유에 눕혔던 이 아기, 믿음을 얻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갔던 이 사나이를 가리켜 ‘메시야’로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부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메시지를 믿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아멘’이라는 최종적인 ‘긍정’의 언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이 하느님이 될 수 있게 했다. 이리하여 우리 모두는 고통받는 인간 실존의 좁은 한계를 깨뜨릴 수 있었다. 뷜만은 이를 두고 “예수 안에서 이상인 인간, 꿈인 인간이 현실로 우리 앞에 있으며, 이분이 또한 우리도 당신을 따르며 당신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도록 부르고 계신다”고 전했다. 이처럼 하느님 신비 안으로 투신해서 인간존재의 궁극적 하나를 성취한 예수를 두고 폰 발타사르는 ‘세상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신비 앞에 ‘승복’하는 것으로 족하다.

역사상 팔레스티나에서 잠시 나타나신 뒤에 그분은 ‘세상에 내어준 몸과 피’의 형상으로 영원히 인류와 교회 안에 각인되고 현존하신다. 더군다나 예수의 현존은 모든 사람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과 맺는 연대 안에서 발견된다. 그분은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셨기 때문이다. “사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시게 해주었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이 얼마나 뜻밖의 인간 평가인가?”라고 뷜만은 묻는다. 위인과 권력자들이 존대받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겪는 일이지만, 소인과 천민들마저 예수와 동등한 자리에 놓인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영에 의한 상상력에서만 솟아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이처럼 예수의 친척에 속한다. 특히 땅바닥을 기어가는 사람을 예수는 하느님 곁에서 대변해 주고 계신다.

복음, 신비와 정치의 어우러짐

여기서 뷜만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히에 있는 예수성심선교회의 집에 걸려있는 ‘자비행업’이란 제목의 융단에 그려진 화폭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선행을 베푸는 이가 아니라 선행을 받는 이에게 성인의 후광(後光)이 걸려 있다. 예수는 자신을 도움이 아쉬운 이들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어 뷜만은 예수께서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례를 가리키며, “성찬례를 행하는 교회는 모름지기 교회 밖에서, 세계 도처에서 고문당하고 질병과 착취로 신음하는 이들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떠올리며, 이들이 해방되어 부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도 먼 미래의 이상향이 아니라, 예수가 사흗날에 부활했듯이, 곧장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신비(성찬례)와 정치(이웃사랑)’이 깊이 어우러지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꿈이 깨지고, 그분의 역사는 진행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남은 것은 그분에 대한 회상뿐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분의 현존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당신 아버지에게 온전히 의지하셨던 예수가 그만 버림받고 만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그분께 받아들여졌고, 새 생명으로 일으켜지셨고, 그래서 온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다고 믿었다.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은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 당신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아시아인의 종교, 은총의 다른 통로

▲ 왈벗 뷜만,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 분도출판사, 1991
이 예수사건은 5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전해졌고,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절반이,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의 4천6백만 신자를 세지 않는다면 1.74%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아시아 고등종교의 모든 이들을 교회는 ‘이방인’ ‘우상숭배자’ ‘불신자’로 불렀다. 공의회 이후에야 그 종교들의 종교적 가치를 좋게 말하기 시작했으며, 정직하게 양심에 따라 하느님을 추구한다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공의회 이후 신학은 다른 종교들 역시 ‘은총의 길’로 해석한다. 이렇게 새삼 그리스도 신비의 우주적 차원이 열리고 있다.

여기서 뷜만은 “우리는 예수를 교회의 한계 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며, 더는 아시아 종교의 신앙인들을 ‘불신자’로 판단하면 안 되고, 그들과 더불어 기도하고, 공동으로 더 나은 세계를 위해 행동할 수 있다고 전한다.

뷜만은 그동안 그리스도교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게도 얼마나 적은 인간에게만 구원의 희망이 남아 있었던가!” 묻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원둘레를 넓혀서 “양심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히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 무신론자라 해도 덮어놓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공희회는 이처럼 에둘러 표현한다. “자기 탓이 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아니하신다.”(교회헌장, 16항)

마지막으로 뷜만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나란히 한 종교로서 자유경쟁 속에 놓여있다면서, “이제는 예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께로 나아가는 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많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돌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라 걷게 하는 길동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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