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은행에 간다. 은행은 늘 만원이어서 번호표를 뽑고 한참이나 기다려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편리함과 쾌적함을 향유하고 싶어 하고, 그것들을 현실적으로 돈이 다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돈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그런 믿음을 매번 확인하는 소란스럽고 삭막한 그곳에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현금이나 수표 그리고 통장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과 익숙한 손놀림으로 떡 주무르듯 돈다발을 다루는 은행원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서 나도 통장과 현금을 들고 내 번호가 떠 있는 창구로 갔다. 입금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서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요 앞 길가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 수표 좀 현금으로 바꿔 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물건을 그대로 길가에 벌려놓고 와서 순서를 기다릴 수가 없네요.”
“아 네. 그런데 이 수표는 다른 은행 것이어서 추심료를 내셔야 해요. 세 장이니 삼천 원이네요. 이 은행으로 직접 가면 추심료 없이 바꿀 수 있는데 전철로 한 정거장 가셔야 해요.”
“삼천 원이면 너무 많이 받네요. 그렇다고 물건을 두고 그 은행까지 다녀올 수도 없구요. 왕복 40분은 족히 걸리겠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은행에서 그렇게 정해놓은 거라서 제게는 달리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분께 내가 말을 걸었다.

“아 그렇다면 제가 현금 34만원을 입금하려고 하는데 그 수표를 저를 주시고 제 돈을 가져가셔요. 입금할 때는 추심료가 없으니까요. 언제 전철을 타고 거기까지 다녀오시겠어요.”
“아니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지만 일면식도 없는데 그런 신세를 지다니요.”
“어차피 저는 입금할 돈이니 수표나 현금이나 똑 같아요. 그러니 신세라고 생각지 마셔요.”

입금을 처리하고 나오려는데 기다리고 있던 아저씨가 다시 다가왔다.

“정말 고맙습니다. 물건을 길바닥에 두고 산 너머까지 다녀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삼 천원을 내자니 너무 아까웠는데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커피라도 한 잔 드시지요.”
“제가 수면장애가 있어서 커피를 잘 안 마시거든요. 그러니 고맙게 마신 걸로 할께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고마운 분과 그냥 헤어질 수가 있나요. 그렇다면 요구르트라도 한 병 드시고 가셔요.”
하시면서 손수레에 실려 있는 요구르트 한 병을 꺼내어 마개를 따서 내게 건네어 준다.
“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새콤달콤한 요구르트 한 병이 싱싱한 기쁨으로 나를 채운다.
그렇다. 사랑이란 무엇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이든 물건이든...
주는 일 뿐 아니라 받는 일도 아름답게 잘 하고 싶다.
아무리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물질만능의 세상이라고 해도, 사랑은 어디에나 스며있다.
창가에 스며드는 봄볕처럼.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 입가에서 노래가 번져 나온다.

한 곡의 노래가 순간의 기쁨을 불어 넣을 수 있고
한 번의 웃음이 회색빛 우울을 날려 보낼 수 있어
한 자루 촛불이 캄캄한 어둠을 몰아 낼 수 있고
하나의 별빛이 머나먼 바다의 배를 이끌 수 있어
한 그루 나무가 숲의 시작이고
한 마리 어린 새가 새봄을 알려주며
한 송이 들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고
한 줄기 햇살이 세상을 채울 수 있어
하나의 희망이 당신의 영혼을 더욱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어
한 발짝 걸음이 여행의 시작이고
한 마디 바램이 기도의 시작이며
한 사람 가슴이 진실을 알릴 수 있고
한 사람 참 삶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
하나의 희망이 당신의 영혼을 더욱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어
(틱냩한 스님 정리/김정식 곡「당신에게 달린 일」전문)

사진 고태환

/김정식 200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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