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안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젊은이들의 대화내용을 듣는 것이 더 재미있을 때가 많으니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날이 더해가는 세상 흐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힘들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지난 해 오셨던 독일의 영성신학자 안셀름 그륀 신부는 현대인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것은 '두려움'과 '우울감'이다.
두려움은 지나치게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오고,
우울감은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장애물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두려움과 우울감은 우리에게 옳은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도록 독려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중년의 어려움을 좀 심하게 겪고 있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기쁜소식(福音)'이 되어주었다.

늦은 밤. 전철을 타고 오면서 또 다시 속도적응의 어려움에 머물러 있을 때, 한 떼의 젊은이들이 내리면서 나눈 대화가 먹먹한 가슴에 파문처럼 다가왔다.

"흑인 애들은 왜 머리를 박박 미는지 알아?"
"머리카락이 자꾸 살로 파고들기 때문이지."

흑인들은 다 애들인가? 아니다. 어른도 있다. 그런데 왜 모두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흑인 애들'이라고 할까? 혹시 흑인에 대한 멸시감은 아닐까? 흑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멸시감은 고스란히 스스로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왜 모를까?



 

내가 겪은 몇 번의 비슷한 사례들이 떠오른다. 지난 해 2월 뉴질랜드에서 초청강의를 마친 후, 초청한 공동체의 배려로 여행을 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6시간을 달려 서쪽 바닷가에 있는 천혜의 비경 밀포드사운드 까지 갔다가 당일로 돌아오기 위해 새벽에 호텔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구촌 곳곳의 이름난 여행지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돈을 뿌려대던 시절은 가고,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그 몫을 해내고 있다는 풍문을 반영하듯, 호텔 손님의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기사가 내려오더니 급히 호텔 정문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짐을 싣기 위해서는 짐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5분 이상 지체되자 불만에 찬 볼멘소리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모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였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출발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기사 애는 어디 가서 안 오는 거야?"
"제가 아까 버스에서 내리는 걸 봤는데 애가 아니라 어른이던데요. 머리가 하얗게 쇠서 할아버지에 가까웠어요. 화장실에 가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시지요."

이 경우에도 버스 기사라는 신분에 대한 가벼운 멸시감이 섞여있다고 생각되며, 뉴질랜드 인들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멸시에 대한 느낌은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들이거나 그렇게 말한 사람의 몫이다. 더구나 뉴질랜드에서 버스운전사의 사회적 지위를 알아차린다면 이런 종류의 멸시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몇 년 전 외국인 노동자들의 여름철 물놀이를 동반 했을 때 일이다. 텐트를 치고 한여름의 불볕더위를 피해 해수욕을 즐기다 점심시간이 되어 바닷가 식당에서 단체로 점심을 먹을 때였다. 동남아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이 섞여 있었는데, 재간 있는 한국말 솜씨나 민첩한 몸놀림이 단연 돋보이게 튀는 청년이 있어서 담당자에게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쟤는 베트남앤데, 애가 성실하고 머리도 좋아서 참 맘에 드는 애예요."
"수녀님. 제가 보기에 애가 아니라 20대 중반이거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요."
"그냥 나이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거지요."
"그래도 성인에게 애라고 부르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요?"
"쟤네들은 잘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저 사람들은 못 알아듣기 때문에 '쟤들'이나 '저분들'이나 차이가 없지만, 알아듣는 우리들에게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해 오잖아요. '쟤들'이라고 부르면서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요.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존중받는 사람보다도 존중하는 나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해요. 다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그러셨겠지만 말이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분이 수도공동체에 돌아가서 이 날 있었던 일을 공동체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고, 수도자라고 해서 모든 면에 다 깨어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도와준 것에 대한 공동체의 고마움을 전해주었다. 수도자들에게나 있을 법한 참으로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결과였다.

세 번째는 오래 전에 겪었던 가슴 아픈 일이다. 오랫동안 명동성당 앞에서 박준(토마스) 형제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돕기 위한 거리모금공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명동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이웃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뇌성마비 장애인 신 베드로이다. 대구가 고향인 그는 장애를 지녔지만 스스로 독립하여 손수레에 생필품을 펼쳐놓고 팔아서 살아가는데, 어느 날 내게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형. 나 죽고 싶어. OO신문이 나를 취재해서 기사가 나왔는데 나보고 '정신지체아'래." 
그가 건네어 준 신문기사를 들여다보니 장애를 극복하고 자립한 그에 관한 기사가 감동적으로 잘 실려 있었다. 문제는 그에 대한 소개인데, 신OO(베드로/34세/정신지체아)라는 대목이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자꾸만 흔들거리는 신체 때문에 걸핏하면 비장애인들에게 정신지체 장애인으로 오해받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뇌성마비 장애인들 중에 오히려 천재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신 베드로도 일반적인 비장애인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명석하다. 한강으로 가서 죽고 싶다는 그에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말라고 달래놓고는 신문사로 전화를 했다. 상황 설명을 하고서 기사를 쓴 기자와의 통화를 요구했다. 몇 차례의 요구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연결시켜 주지 않더니 몇 사람을 거쳐 기사의 최종 책임자라는 분과 전화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아니, 김정식 씨. 그렇게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를 해주면 그 앞을 오고가는 교우들이 더 관심을 가져줄 것이고 결국 당사자를 돕는 일이 될 텐데, 뭘 별것 아닌 일로 그렇게 흥분을 해서 일을 시끄럽게 만드나요? 정신지체나 뇌성마비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그러세요?"
"아니, 신부님. 그렇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 때문에 당사자는 죽고 싶다잖아요. 살고 죽는 일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뇌성마비는 정신지체가 아니라 지체부자유라구요. 그리고 34살 된 어른을 어떻게 '정신지체아'라고 쓸 수가 있어요? 장애분류와 명명에 대해 잘 몰라서 무식한 것은 그렇다 치고, 취재하고 기사를 쓴 기자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을 '아(兒)'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무시 혹은 더 나아가 멸시 아닌가요?"
담당기자를 잘 교육시키고 정정기사를 내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특별히 가톨릭교회 안에 '생활성가'라는 장르를 개척하였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기쁜소식(福音)'을 나누는 일 때문에 초청되어 국내는 물론 지구촌 곳곳을 두루 다녔다. 동남아에 초청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그곳에 사는 한국인들이 현지인을 대하는 태도는 위험수위 이상이다. 얘들, 쟤들은 기본이고 나이가 든 어른들에게도 대부분 반말이거나 낮춤말이다. 우리말에 엄연히 존재하는 존댓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지인들은 한국말을 잘 모르기에 반말을 하건 존댓말을 하건 별 상관이 없겠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당사자나 함께 듣고 있는 가족들, 특별히 그들의 어린 자녀들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곳에서는 헬퍼(helper)라고 부르는 가사도우미를 식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없어진지 오래된, 멸시감이 담긴 이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간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미래시대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아이들조차 식모라고 부르면서 어른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이와 관계없이 반말을 쓰고 있다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몫이 되고 말 것이다. 기사라고 불리는 운전도우미들은 또 어떤가? 고용인들이 자국 내 가장 큰 성당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동안 열대의 땡볕을 가릴 아무런 시설도 없는 마당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하면서 몇 시간이고 그저 기다리는 일 밖에 아무 할 일이 없다. 대부분이 무슬림이기에 예배에 동참할 수도 없고, 언제 무슨 일로 부를지 모르니 어디 갈 수도 없다.

미사 후에 계속되는 회의나 신심단체 모임 혹은 친교로 까지 이어지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이들을 위해 무언가 프로그램을 마련한다거나, 아니면 쉴 수 있는 휴게실을 만들어 자기들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게 배려해야 되지 않느냐는 조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 이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살아왔기에 아무 문제가 없고, 뜨거운 태양 볕도 익숙해져서 특별한 어려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슬림은 결코 개종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잘 해줘도 선교효과가 없다는 귀엽도록 친절한 귀띔은 아픔보다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바깥의 이런 뜨거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간담이 서늘한 에어컨 바람 가득한 성전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기쁜소식(福音)이 선포되고 있다. ‘여러분 중에서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입니다(마태25장 40절)’라고.

남아시아의 미국령 섬나라 두 곳과 호주 뉴질랜드에 살면서는 ‘원주민 애들’‘키위 애들’, 미국과 유럽에서는 ‘백인 애들’‘흑인 애들’, 그리고 ‘중국 애들’‘일본 애들’. 그러다 우주가 개발되어 다른 별로 이민가면 ‘지구 애들’이 될까?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에 별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아직은 ‘두려움’과 ‘우울감’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다. 설령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타국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싶고,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이웃을 부르고 싶은 것이 ‘완벽추구’라고 따돌림을 받을지라도,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을 정신없이 쫒아 가기보다 느리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가다가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나는 그런 삶을 선택하고 싶다. ‘두려움’과 ‘우울감’을 간직한 채 좀 더 나은 길을 찾고 싶다. 내가 아직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사진 고태환

/김정식 200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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