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쇄신]

기도의 응답이 안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내가 바라는 답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사순절을 지내는 동안, 올리브산의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드렸던 예수의 기도를 자주 기억합니다.

"아버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 단순한 기도 안에는,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과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내 뜻과는 다르더라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이 순한 고백이 곧 응답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가 원하는 응답을 얻어내기 보다는, 나의 뜻과 바램을 그분께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내 뜻과 다를 수도 있는 그분의 뜻을 잘 알아차리며, 그것이 나의 바램과 다르다고 해도 그분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받아들임은 고통을 이겨내는 길이 되어줍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단 하나의 길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이 응답에서 힘을 얻어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는 도저히 겪어낼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신 십자가의 고통을 마침내 넘어서서 부활이라는 기쁨의 강가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메타노이아(Metanoia 回心회심)되었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가서 쉬고 싶은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이 메타노이아는 예수께서 잘못된 생각을 고치거나 죄를 뉘우쳐서 이룬 것이 아니라, 거둘 수만 있으면 거두어 달라고 청했던 마음에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회심되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메타노이아는 말 자체로도 느낌이 참 좋아서 만트라 처럼 자꾸 입에서 맴돕니다. 이 말의 어원인 그리스어 Metanoeo 혹은 Metanoia의 뿌리가 돌아보기, 달리 생각하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회심의 가장 중요한 단서는 바로 이‘돌아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돌아감에 대해 폴 부르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종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돌아감은 언제든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바로 가능해집니다. 독일의 영성신학자인 안셀름 그륀 신부는 내 안 깊숙한 곳에 나와 하느님만 공유할 수 있는 ‘내적공간’을 마련해 놓고 틈나는 대로 자주 그곳을 드나들라고 권합니다. 나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입장을 허락할 수 없는 ‘내적공간’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쉬는 것은 바로 메타노이아 되는 것을 말합니다.

메타노이아(회심)라고 하는 이‘돌아감’에 대해, 교회 공동체에서는 일반적으로 悔改(회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어휘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부정적인 어감이 때때로 거부감을 넘어서서 억압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익숙함에 길들여져서 교회 밖으로까지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꼭 회개라는 말을 써야한다면 回改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 한자말은 고쳐서 돌아감을 뜻하고, 고쳐서 돌아가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1.멈추고 2.고쳐서 3.돌아감이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멈추고 고치는’ 일에 너무 집착하여 메타노이아의 본질적인 개념인 '돌아감'을 간과하게 됩니다. 회개의 본디 말인 메타노이아가 ‘돌아감’을 중요한 뜻으로 담고 있는데도 그것보다는 참회하는 것쯤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사순시기에 판공성사라는 의무 고백성사를 보면 참회했으니 회개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메타노이아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멈춤과 고침 그리고 뉘우침’을 과정 삼아 ‘돌아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회개를 통해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나 회심을 생각할 때 ‘멈추고 고치고 뉘우치는’ 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돌아감’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돌아갈 생각을 하니 멈추어지고, 멈추고 보니 고치고 싶고 뉘우치고 싶어져야 합니다. 또한 이 따뜻한 시선은 나를 돌아볼 때나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나 똑 같아야 합니다. 가족이나 이웃을 ‘멈추고 고치고 뉘우치게’ 일깨워 주기보다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니 잘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래 기다리고 견뎌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움과 동경 그리고 기쁨과 설레임을 간직한 채 ‘돌아감’을 이루는 것과, 그것을 통해 다른 이에게 ‘돌아감’에 대한 기쁨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또 한 번의 메타노이아(회심)가 되어줍니다.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 즉 메타노이아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끊임없는 삶의 지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이 지향을 간직하기 위해 저는 회개라는 말 대신 메타노이아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우리 메타노이아 합시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삶을 지향 합시다'라는 말이겠지요. 그곳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의 본질적인 곳, 우리가 나온 곳이자 돌아가야 할 곳, 믿는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누구나 가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곳, 모두가 함께 가야할 곳, 마음만 돌리면(회심)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겠지요. 참회를 잘 하고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참회를 잘 못했더라도 돌아갈 곳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지향하는 것이 메타노이아(회심 혹은 회개)의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극심한 고통의 길에 동반했던 죄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이 돌아감에 대한 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늘 당신이 메타노이아(회심)하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이 메타노이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당신은 이미 메타노이아 되어 있소."

단지 그곳에 계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청했을 뿐인데도, 기억이라는 지향만으로도 충분히 회심되었으며 이미 메타노이아를 이루었다고 하는 이 기쁜소식(福音)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이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이 오른쪽 도둑이 일상의 삶을 얼마나 나쁘게 살았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삶 속에서도 메타노이아(돌아감)에 대한 지향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늘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 ‘돌아감’의 시선을 따라 나도 돌아가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바라보셨던 그곳을 나도 함께 바라보고 싶습니다. 또한 막연하게나마 그리움과 동경을 간직한 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웃들이 이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모두가 아름다운 ‘돌아감’을 이룰 수 있도록 순한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 김정식 200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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