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주위에서는 ‘개고생’이라고 말렸다. 작년 여름에 약사(藥師)라는 사실을 감추고 위장취업을 했다. “고졸. 약제실 보조 경력 있음”이라고 쓴 이력서를 들고 병원을 찾았다. 중소형 병원의 약사 보조직이다. 말이 보조이지 약제실을 맡아서 약사의 몫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야한다.

경력자라는 이유로 경쟁자를 물리치고 즉시 채용이 되었다. 급여를 따지자면 약사와 보조 두 몫을 받아야 하지만 학력과 면허증 앞에서 경력은 무용지물이다. 위장취업 8개월, 그동안의 고생이 생생하다. 작년 여름 100년만의 물난리를 만나 지하 약창고의 물을 밤새도록 퍼내던 일, 빗물에 젖어 솜뭉치가 된 약품들을 일일이 건져서 7층 옥상까지 옮기던 일, 생전 해보지 않은 전산업무를 배우느라 신입 경리의 비위를 맞춰야 하던일, 하루에도 몇 번씩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위장취업 밖에는. 경순 언니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경순 언니는 신입 약사때 대학병원에서 만난 약제실 보조직원이다. 다섯 명의 보조 가운데 나이와 경력에서 베테랑 노처녀였는데, 늘씬한 키와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한 말투와 엉뚱하고 천연덕스런 돌발행동으로 주위에 웃음을 주는 약제실의 비타민이었다. 게다가 궂은일은 혼자 도맡아 하는 살림꾼 천사였으니 약제실을 거쳐간 약사들 중 그녀의 신세를 한번쯤은 크게 졌던 영원한 언니였다.

나 역시 대형사고를 치고 그녀의 신세를 졌다. 첫 당직 날, 긴장과 불안 때문인지 결국 실수를 하고 말았다. 동명이인의 환자에게 약을 바꿔 준 것이다. 실수를 발견했지만 이미 늦었다. 환자는 사라졌고 연락처조차 없다. 환자는 여든 살의 할아버지인데다 설상가상 주소는 경기도 근처의 시골, 시간이 없었다. 당뇨약 대신 간질환자의 약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약제실의 비상연락망을 통했지만 연휴라 응답이 없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사지에 혼자 버려진 신세였다. 발을 동동구르고 있는데 그때 약제실 문이 열렸다. 경순언니였다. “언니!” 구세주였다. 혹시나 걱정이 돼서 왔단다.

경순언니는 할아버지의 주소를 들고 약제실을 나섰다. 영하 15도의 한파였다. 시외버스로 2시간을 가서 꽁꽁 언 논둑길을 한참 걸었다. 독거노인 댁이었다.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밤 열시가 돼서야 경순 언니는 돌아왔고, 꽁꽁 언 손을 녹이며 예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시골동네라 춥긴 춥네.”

경순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결혼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 셋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병원 시절 고운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정수기 외판일을 하고 있었다. 장삿속이 없는 탓에 잘 될 리가 없었다. 그후 피씨방에서 일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동대문 시장 뒷골목의 재개발 지역이었다.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올라가니 철거를 앞 둔 건물 지하에 피씨방이 있었다. 실내는 담배연기와 퀴퀴한 냄새로 숨통이 막혔다. 허물어져가는 내부는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금이 간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느라 양동이가 늘려있었고 여기저기 구석자리엔 뜨내기손님들이 잠을 청하고 있어 피씨방이라기 보다는 뒷골목의 싸구려 여인숙이었다.

나는 도망치듯 피씨방을 빠져 나왔다. 지하감옥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그날 비로소 경순언니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동안의 ‘개고생’도 끝나간다. 내가 떠나면 이 자리는 지금 결핵요양원에서 돌아오는 경순언니의 새 일터가 된다. 이 자리에서 경순언니가 옛날의 실력을 발휘하며 세 아이들과 새 둥지를 만들기 바란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오려는 순간 사람은 들을 수 없지만 어미닭은 알 속에서 제 새끼의 몸부림을 듣는다. 세상에 나오고 싶어하는 애타는 두드림이다. 비좁은 알 속에서 주둥이로 껍질을 두드리면 어미닭은 용케도 알아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 숨구멍을 만든다.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 병아리가 몸을 뒤척이며 버르적거리면 몸이 부풀게 되고 어미가 쪼아 댄 곳에서부터 알껍질은 금이 가면서 깨져 나간다. 이때 병아리가 안에서 소리를 내는 것을 줄(崒), 어미가 밖에서 알을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줄탁동시(崒啄同時).

한마리의 병아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일에도 스스로의 힘과 밖에서 돕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도 앞길이 꽉 막혀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을때 누군가가 내가 갇힌 껍질을 밖에서 깨어 줄때 새로운 세계 새 희망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새봄이 온다. 이제 막 껍질을 깨고 나온 노란 병아리,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의 첫 울음소리가 기대된다. 경순언니의 새출발에 건투를 빈다. 어미닭의 마음으로.

심명희/ 마리아. 약사. 2000년 4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요셉의원에서 상근 봉사자로 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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