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 영화] <철의 여인> 필리다 로이드 감독 (2월 23일 개봉)

여성 버전, 영국판 ‘뿌리 깊은 나무’의 마지막 회이다. 극장 문을 빠져나오면서 머리에 떠오른 첫 문장이 그랬다. 이 드라마의 최종회를 나는 특히 사랑했다. 사건이 모두 매듭지어진 후, ‘무휼이 없고 소이가 없고 똘복이도 없는’ 세종의 그 쓸쓸했던 산책이 마음을 오랫동안 울렸다. “감히 뿌나를 이 영화에!”라며 공분할 얼굴 몇몇이 떠오르지만 <철의 여인>의 포커스가 마가렛 대처의 정치 인생이 아니라 노년의 고독과 혼란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이 짝짓기를 물리지는 않을 터이다.

동화나 민담의 현자가 대개 노인인 까닭에 우리는 노년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정작 노인 자신은 어떨까. 처음부터 노인이 아니었을 테니, 순간순간이 낯설고 혼란스럽지 않을까. 세종의 말을 빌린다면, “이곳엔 없다. 너무도 낯설다. (모두가 떠나간) 이곳은 있었나 싶게 낯선 곳이다.” 같은 심정이랄까. 철의 여인으로 동서를 호령했던 대처에게도 이러한 순간의 도래는 지당지사. 병원에 방문했다는 자신의 뉴스를 TV로 보면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이젠 내 모습도 못 알아보겠군.”

안구의 초점이 흔들리고 정상궤도를 약간 이탈한 듯한, 한 노파가 식료품점에서 우유를 사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1980년대 대처의 위용을 기억하는 이에게는 충격적인 출발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1925년에 태어나 2010년대를 살고 있는 마가렛 대처이다. 딸 캐럴이 자서전에 묘사한 것처럼 그녀는 2000년에 시작된 치매 증세로 고통 받고 있으며, 2003년 사망한 남편 데니스와 함께 살고 있다는 환각에 시달린다. 영광과 퇴락의 순간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삽화로 현재에 틈입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의 정치적 공과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철의 여인>은 지루하고 무의미한 영화이다. 앞선 회 없이 방영된 ‘뿌리 깊은 나무’ 24회처럼 말이다. 더구나 이 TV 극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업적(외국의 한 언어학자는 문자 창제라는 인류사적 사건을 기념하여 한글날에 휴강을 한다)을 이룬 성군 세종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대처는 노조 탄압과 복지예산 삭감과 같은 정책으로 여전히 논란이 되는 정치인이다. 실제로 영국 언론이 대처를 인간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를 하자, 'I STILL HATE THATCHER'라는 문구가 박힌 셔츠가 제작되었고 현재도 판매 중이다.

감독 필리다 로이드는 안전한 선택을 했다. 비극의 파토스는 위대한 인물의 전락에서 비롯된다. <철의 여인>은 대처의 정치 성과에 공감대를 갖든 그렇지 않든 인정할 수 있는 위대함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는 런던 북부 지방 도시에서 식료품점 둘째 딸로 태어나 여성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보수당 총수가 되었고, 영국 총리가 되었고, 3선에 성공하여 11년간 선출직을 유지했던 놀라운 인물이다.

한국의 추미애는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해 과거 자기 PR을 했고, 미국의 민주당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현재 ‘좌파 대처’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대처는 분명 여성 정치인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입지전적 인물에게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고, 그로 인해 영광의 자리에서 굴욕적으로 내려오는 운명이 주어진다. 그리고 힘겨운 노년의 시간이 이 인물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필리다 로이드는 2010년대의 관점에서 마가렛 대처를 보편적인 인간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리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성격은 운명이다. 그리고 인간의 과오에 대한 관용적 시선의 최대치는 문제를 성격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 양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원래가 그런 성격인 걸”이라는 말로 한 인간의 부정적인 면모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가족 간에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 특히 유용한 관점이다. <철의 여인>이 취한 관점이 바로 이것이다.

영화는 대처의 딸이 펴낸 회고록에 많은 부분을 의지한다. 운전 연습을 직접 지도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캐롤 대처는 불우했던 어린 날을 극복한 사례로 심리학 도서에 인용될 만큼 어머니의 그늘 밑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대처가 망상 속의 남편에게 던지는 대사는 강철처럼 엄격했던 어머니에게 캐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당신도 행복했었나요? 진실을 말해줘요.” 대처의 성취와 영광을 전제로 한 영화인 까닭에 이에 대한 답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철의 여인>이 가족적 시선에서 도출된 그녀에 대한 뛰어난 변명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철의 여인>은 좋은 영화이다. 야심 있는 여성이 20세기 후반 사회에서 받아 온 도전을 섬세하고 흥미롭게 묘사했고, 대처의 인간적으로 미비한 점을 회피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무엇을 상상하든 기대 이상을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의 놀라운 연기가 관람의 절대적 포인트가 된다는 점, 대처를 통해 모든 이에게 다가올 노년이라는 낯선 시간을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겨울의 끝자락, 사색을 즐기고 싶은 이에게 권하고 싶은 수작이다.

 

 
 
진수미(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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