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의 편집회의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있다. 편집국장을 비롯하여 객원기자들과 편집위원들이 모여 지난 기사나 글에 대한 반성도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의논도 하는 자리여서 일정이 없는 날이라면 기쁘게 함께 하고 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그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번 모임이 끝나고 나서 <생각의 나무>라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김지환 씨가 서울역 건너편에 있는 <빛나라 공부방>에 관심을 보였다. 이것저것 내가 드나들면서 보고 느낀 대로 얘기를 해 주었더니, 혹시 이면지가 필요한지 묻는다.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이면지가 많이 나오는데 매번 버리기가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A4용지는 이면지 활용도가 높은 반면 출판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커다란 A3용지는 이면에 복사할 경우 복사기 고장을 유발하기 때문에 대부분 버리게 된다. 그런데 공부방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허드레 종이로 활용할 수 있다면 매번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며칠 후 공부방에 갔을 때 책임자에게 물었더니 대환영이라고 했다. 다음 편집회의 때 김지환 씨를 만나게 되면 일부러 가져오는 수고를 덜기위해 모아두라고 부탁하고, 언제 자동차로 근처를 지날 때 들러서 가져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음 편집회의가 있는 날 김지환 씨는 그 동안 모아둔 종이뭉치를 들고 왔다. 신촌에 있는 출판사에서 홍대입구역까지 들고 가서 전철을 타고 영등포구청역까지 오는 동안 몇 개의 계단을 오르내렸으며, 편집회의가 있는 <우리신학연구소>까지 10여 분 정도를 등에 메고 왔으니 연구소가 3층에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영등포구청역까지 나와 방향이 같은 두현진 씨가 들어다 주었고, 마지막으로 내가 받아서 집까지 들고 왔으며, 언젠가 서울역 근처에 있는 공부방에 갈 때 가져다 주기위해 현관 한 켠에 보관중이다. 집에 와서 체중계에 달아보니 6.6kg에 지나지 않는데도 종이라서 그런지 꽤 무겁게 느껴졌다. 전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불편하고 무거운 수고로움을 기꺼이 자청하는가? 무엇이 이토록 비효율적인 삶에 모두 기쁘게 함께하게 도와주는가?

공부방 화장실에 들어가면 꼭 한 번씩 봐야하는 아름다운 격언이 있다. 화장지가 걸려 있는 곳에 '오줌 세 쪽 똥 여섯 쪽'이라고 투박한 글씨로 쓰여 있고, 아마도 여성을 위해서인듯 '오줌'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긋고 그 아래엔 ‘안 쓰면 더 좋아요’라고 쓰여 있으며, 맨 아래에는 '나무를 살려 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환경에 관심 있는 어느 교사의 배려겠지만 그곳을 드나드는 학생, 교사, 자원봉사자, 후원자에서 손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고, 이 아름다운 격언이 주는 향기는 아마도 다른 화장실에 가서도 떠오를 것 같다. 그저 성의 없는 인쇄체 글씨로 '화장지를 아껴 씁시다'라고 해 놓았거나, 관공서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물자절약'이 아니라 서류봉투 이면을 활용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그것도 따뜻한 손글씨로 쓰여 있는 이 아름다운 격언의 어디에서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가끔씩 성당화장실에 '환경보호', '화장지절약', '금연', '깨끗이 사용합시다'등을 코팅하여 붙여 놓았거나 '생명수호 지킴이'라는 자동차용 스티커를 만들어 나누어 주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코팅용 비닐이나 스티커 뒷면의 접착용제가 얼마나 환경과 생명을 해치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면지를 활용하여 '오줌 세 쪽 똥 여섯'이라고 쓴 이 손글씨가 더욱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가히 정점에 이른 기술혁명이 주는 편리함에 비하면 조금 불편하고 수고롭기는 하겠지만, 내가 불편하고 수고로움으로써 모든 이가 함께 누려야 할 자연과 환경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불편함과 수고로움이라는 사랑에 동참할 수 있겠다.

책임자에게 내가 물었다.
“오줌이나 똥 보다는 소변이나 대변이라는 말이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 아이들은 소변 대변이라는 말 보다는 오줌똥이 훨씬 친숙해요. 실제로 어린 친구들은 대변 소변이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도 있어요. 오줌똥이 그렇게 나쁜 말도 아니잖아요?”

친숙하다는 말은 편하게 다가온다는 뜻이다. 아무리 고상한 말이라도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자칫 거부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고 싶다면 통속(通俗)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마리아 길을 지나가던 예수님 먼 길에 지치셨을 때
물 긷는 여인에게 물을 청하며 조용히 말씀 하셨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아
내가 주는 물은 샘물처럼 솟아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니
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그 물을 제게 좀 주십시오. 다시 목마르지 않게.
(김정식 곡 '생명의 물' 전문)

군중들과 기쁜소식(福音)을 나누다가 지치신 예수께서 비천하다고 알려진 한 이방 여인에게 샘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 생명의 물을 나누었던 것처럼, 나 또한 가난하고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주변의 이웃들과 일상적인 작은 나눔을 주고받고 싶다. 그래서 다시는 영혼의 갈증으로 목마르지 않게 살고 싶다. 그런 염원을 지닌 채 살고 싶은 우리 모두가 오늘 함께 바라보고 있는 곳은 '오줌 세 쪽 똥 여섯 쪽(오줌-안 쓰면 더 좋아요)'이다.

조금만 불편할 수 있다면...
조금만 수고로울 수 있다면...

*위에 실은 모든 사진들은 <빛나라 공부방>의 전담교사가 재활용 종이들로 만들고 그려서
공부방 곳곳에 붙여놓은 것을 김정식이 찍었다.

/김정식 200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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