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으로 오십 평생을 살아가면서 개인연주회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교회기관이나 방송사 혹은 사회단체 및 자선단체의 요청이나 초청에 의해 이루어진 연주회는 수없이 많지만 내 개인의 의도로 스스로 기획된 연주회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좋은 뜻이 있으면 앞으로는 그럴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까지는 이웃 앞에 나서서 내 노래만을 들어달라고 부탁할 명분을 찾지 못한 셈이다.

15년 쯤 지난 일이다. 대구와 광주에서 비슷한 목적으로 대규모 초청연주회를 갖게 되었는데, 두 곳에서 똑 같은 일을 겪었다. 전자의 경우 성전증축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이었고 후자는 성전건축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이었다. 초청한 본당의 요청으로 내가 1부와 2부의 연주를 맡고 중간에 본당 어머니성가대의 찬조출연이 있는데 내가 만든 노래 중 두 곡을 부르게 되어 있었다. 어려움이 생긴 것은 사전연습 때이다. 전체적으로 혼자서 노래를 하게 되는 무대에는 악기와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성가대원들은 자신들이 딛고 서야할 합창단 전용 발판을 사용하겠다고 우겼다.

준비를 도와주던 공연장 관계자들께서 이 연주회에서 합창은 단지 찬조출연일 뿐이니 두세 줄로 서더라도 겹치지 않게 서면 지휘자와 호흡을 맞추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발판은 크고 무거워서 공연 도중에 옮길 수 없으니 꼭 발판을 써야한다면 처음부터 설치를 해 놓아야 하고, 한 번 설치하면 끝까지 그대로 둘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합창단이 서 있지 않을 때는 보기 싫은 나무판의 모양새가 다 드러나 보이게 되고 공연을 보러 오신 분들은 내내 그런 상황을 견뎌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양해를 구해 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공연장 관계자들과 성가대원들이 가벼운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 까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객석에 있던 아빠들이 가세한 것이다. 아무리 찬조출연이지만 그래도 합창인데 단상 없이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단상을 놓아주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웅성거렸다. 너무 과격하다 싶어 그 쪽을 바라보다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열대여섯 대쯤의 캠코더가 삼각대에 얹힌 채 객석의 맨 앞 쪽에서 도열하고 있지 않는가.

모두들 자기 가족의 얼굴을 담기 위해서 가장 잘 보이는 쪽을 선택하여 설치해 놓았는데 발판이 없다면 앞 사람에 가려 잘 안 잡힌다는 것이 그들의 또 다른 입장이었다.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심정정리가 잘 안되었고, 함께 서있던 관계자들의 뜨악한 표정을 마주하기가 민망했다. 내가 같은 종교 공동체 일원이라는 사실도 부끄러웠다. 캠코더 한 개를 가지고 찍은 다음에 서로 나누어 보면 될 것을 각각 하나씩 찍어 불편하지 않게 보겠다는 속셈일 것이니 풍요를 유감으로 생각할 수 밖에...

다행히 한 곳은 본당책임자인 수사신부께서 중재를 나서서 발판을 치운 채 진행되었지만, 나머지 한 곳은 끝내 3단으로 된 나무발판을 놓은 상태로 연주회를 하게 되었다. 볼썽 사나운 나무판을 무대 장식용 오브제처럼 활용하기 위해 그곳을 오르내리거나 잠깐 앉기도 하는 등의 튀는 연출을 했던 씁쓸한 기억이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있다. 캠코더를 설치해 둔 남편 들이 공연의 주요 장면보다는 아내들이 노래할 때만 열심히 찍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이다. 성전을 세우거나 증축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기쁘게 표를 사서 노래를 들으러 오신 분들을 만나는 일이었으니 공연 자체는 한없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의 불편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공동체와 그런 공동체들을 위한 성전건립에 내 가난한 노래가 일조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풍광은 본당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행사나 청소년행사, 그리고 본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행사 등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또한 그럴 때마다 크고 작게 상처받는 계층은 풍요를 누릴 수 없어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소외된 이웃들일 수 밖에 없다.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내 맘대로 혹은 나 하고 싶은 대로만 해 버릴 때 그것 때문에 누군가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더 나아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하면 좋겠다.

비록 그 욕심과 이기심이 믿음의 한 표현일지라도...

/김정식 200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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