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인터넷언론<지금여기>의 고정필자들이 모여 신년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떤 분이 ‘그 사람은 영세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성이 부족하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맞나요? 그러니까 영성이 신앙생활을 오래 해야만 생기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지요. 영세한지 오래 되었다고 영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 국수집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걸 보면 꼭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서만 영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영성이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성에 대해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니 내가 겪은 일이 떠오른다. 언젠가 우연히 어떤 모임에 함께 하게 되었는데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노래를 통해 삶의 영성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듣고 있던 신부님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영성이라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쓰지 마세요. 사람들이 영성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영성이란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 안에 담겨있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넘어서서 절대자에게 속해 있는 것이 영혼이고, 그 절대자에게 귀의하여 머물고자 하는 것이 영성이 아닌가요? 쉽게 말씀드려서 본질적인 삶의 가치를 물질과 정신에만 두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영적인 것에 두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노래를 매개로 하여 그런 삶의 가치를 나누려는 사람이구요.”

“그 말씀의 뜻을 잘 알겠는데요. 여기서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영성이란 그것이 전부가 아니예요. 그러니 영성에 대해 아무데서나 너무 쉽게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네. 그러지요. 제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 보다는, 그런 노래가 떠오르게 된 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복음적인 시각으로 나누는 일에 더 가치를 두고 있어요. 그래서 가수나 작곡가라기보다 ‘노래를 통해 삶의 영성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영성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 말라고 하시니 앞으로 저를 소개할 내용을 새롭게 연구해 봐야겠네요.”

그런데 오늘 민들레국수집의 서영남 형님의 말씀을 들으니 영성이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닌 것 같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신앙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신앙이나 종교를 잘 몰라도 얼마든지 영성적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나 종교를 갖지 않고서도 하느님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방으로 초청강의를 가는 중이었다.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하여 톨게이트에서 통행료 카드를 뽑아 든 순간 내 지갑에 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들은 여러 장씩 가지고 다니는 신용카드도 없었기에 난감했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가장 가까운 휴게소로 들어가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방송을 하고 있는 아가씨에게 사정 얘기를 했고, 돌아오면서 꼭 돌려드릴 테니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처음 만나는 남자의 횡설수설한 얘기를 다 들은 아가씨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자신의 지갑을 꺼내었다.

“청주까지 가신다고 했지요? 오천 원이면 되겠네요. 돌아오실 때라면 저는 근무가 끝난 후라서 다른 분이 계실 거예요. 그 분에게 맡기시든지 아니면 일부러 반대 방향인 이곳까지 차를 돌리지 마시고 다음에 언제 다시 이곳을 지나실 때 주세요.”

“아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시면서 안돌려 주면 어쩌시려구요?”
“십자가를 매신 걸 보니 그런 분 같지는 않네요. 그리고 설령 안돌려 주신다 해도 어려운 사람을 도운 셈 치면 되지요. 뭐.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다녀오세요.”
“혹시 교회에 나가시나요?”
“아뇨. 종교는 없어요.”

내 입장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착한 일을 특별히 생색도 내지 않은 채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아가씨를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영성’이었다. 그렇게 착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종교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내 심증이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각박한 세상 한 가운데서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온 그녀가 삶의 가치는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렇게 처신하겠다는 결심을 삶의 정신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내게 베푼 친절은 ‘영성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굳이 종교나 신앙을 말하지 않아도 인간에게 속해 있는 물질과 정신을 넘어서서 신에게 속해있는 영적인 것을 갈망하고 있고, 그것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살아낸 그녀는 분명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지며 그런 그녀의 삶은 지극히 영성적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성인들이나 교부들은 그런 작고 단순한 영성을 얻기 위해 은둔과 극기로 일생을 채웠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니던 고속도로 휴게소 한 켠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만난 기쁨을 누구에겐가 전하고 싶었다. 봄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차 안으로 밀려드는 그리 진하지 않은 민들레 향기를 바로 그 순간에 꼭 나누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휴대전화가 울렸다. 행복이 묻어나는 내 얘기를 다 들은 친구가 복음(기쁜소식)을 전해준다. 마침 30분 후에 같은 곳을 통과할 예정이니 내 대신 돈을 돌려주면서 쵸컬릿 한 상자를 선물하겠다고 했다. 기쁨은 기쁨을 낳고 행복은 행복을 낳는다. 나 또한 매 순간 만나게 될 이웃과 이런 영성을 일상처럼 나누며 살고 싶다.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포도주처럼 따르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그만 틈을 내어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박해석 시/김정식 곡 「기쁜 마음으로」 전문)


여러분은 재물을 땅 위에 쌓지 많고 하늘나라에 쌓아 두시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사진 고태환 
/김정식 200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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