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행동주교연수 교회쇄신과 사회교리 강조
[교회는 누구인가-황경훈]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식상한 제목이지만 자꾸만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내가 대학생활을 보낸 1980년대부터 익히 들어온 말인데도 여전히 반갑고 때론 마음이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그 안에서 내 젊은 날의 초상을 본 때문일까, 다하지 못한 미련이 남아서일까. 글은 써 나가야 하는데 마음은 거기서 한발자국도 더 나가기 싫은 듯 서성인다.

올해 설에 차례상 앞에서 아버님 영정에 절도 못한 채, 얼굴이 벌겋게 그을리면서도 타이와 미얀마의 국경 근처 미얀마 난민촌에서 난민들을 만나고 그 삶의 현장에서 보낸 노력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 말을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이 주최한 회의에서 다시 듣는 기쁨을 누렸다. 이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1월 25일자에 난민촌 방문기사에서 썼듯이, 이 현장 체험 프로그램은 1월 17-25일 방콕에서 열렸던 FABC 인간발전사무국(OHD) 주최로 열린 연수의 일환이었다. 이번에 열린 8차 사회행동주교연수(BISA VIII)는 1986년 7차 연수를 끝으로 실로 25년 만에 다시 부활한 셈이니, 나 개인의 감정을 넘어 아시아 교회 차원에서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방콕 카밀리안 사목센터에 모인 8차 사회행동주교연수 참가자들

“아시아의 가난한 이, 소외된 이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낸 최종 메시지에서 17개 나라에서 온 37명의 참가자들은 이 연수의 목적이 교회를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도록 돕는 데 있음을 재차 확인했다. 여기서 ‘재차’ 확인했다고 함은, 이미 FABC에서는 이 말을 사용했다는 뜻이니까 이를 먼저 설명하는 게 얘기를 풀어나가는 순서겠다.

바오로 6세 "아시아는 거대한 빈곤의 바다에 떠있는 섬과 같다" 

FABC 인간발전사무국 설립은 FABC 1차 총회가 열린 1974년, 아니 교황청이 FABC를 공식 인정한 1972년보다도 더 전인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은 교황 바오로 6세의 선구적이고도 중요한 회칙으로 평가받는 <민족들의 발전> (Progressio Populorum, 1967)이 나온 바로 이듬해이며, 눈썰미 있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예상했을 법하게 인간발전사무국이라는 이름도 이 회칙에서 받은 영감으로 붙이게 됐다.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공의회를 끝까지 이끌었던 바오로 6세 교황은, 1970년 처음으로 아시아주교들과 마닐라에 모여 아시아는 거대한 빈곤의 바다에 떠있는 섬과 같으므로 아시아 교회는 마땅히 가난한 이의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주교들은 이에 호응해 발전의 개념과 전망을 ‘전인적이며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교회는 가난한 이의 교회가 돼야 한다고 천명했다.

‘전인적’(the whole person)이라는 말은 경제적 발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가치가 도덕적, 종교적, 곧 영적 가치에 이르는 수직적 차원을 말하며, ‘모든 이’(all person)라는 것은 이런 전인적 발전은 개인-사회-국가-타문화로 확산하는, 보다 평등한 수평적 차원을 뜻한다. 한마디로, 더 많은 사람이 밥을 배불리 먹되 늘 하늘을 우러르며 살아야 한다고, 이 둘 중 어느 것이 빠져도 올바른 발전은 아니라고 정의한 것이다.

신학계에도 친숙한 켄 윌버(Ken Wilber)라는 널리 알려진 현대 영성가가 근래에 이런 수직/수평차원을 지닌 영성을 ‘홀아키’(hol-archy)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아시아 교회는 이미 1970년에 인간발전사무국을 설치해 이를 실천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신학적, 영성적으로 앞서 나가고 있었는지 가히 놀랄만하다고 하겠다. (한국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혹은 카리타스 코리아의 전신인 인성회(人成會)의 이름은 인간발전의 이런 정신을 잘 담아냈다고 보인다. 한국교회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혜안을 갖고 멀리 보면서 묵묵히 일하는 이런 선각자들, 교회 일꾼들 덕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8차 사회행동주교연수 참가자들. 카밀리안 사목센터에서 파견 미사 뒤 기념촬영 장면

다시 한번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아시아 교회
"사회교리가 우선 실현돼야 하는 곳은 본당, 교회 단체 및 기관들이다"

그러나 1974년에 인간발전사무국이 FABC 산하의 첫 사무국으로 공식 설립되면서, 이런 두 차원의 조화가 깨지지 시작했고, 모든 이 특히 가난한 이의 발전보다는 ‘가난한 이를 위한’, 그리하여 교회가 가난한 이에게 물적, 영적으로 무엇인가를 ‘베풀어 준다’는 측면으로 제도화하기 이르렀다. 얼핏 보면 별 차이 아닌 듯하지만, 여기서 가난한 이는 이론상으로나마 이제 발전의 ‘주체’가 아니라 교회의 자선 활동의 ‘대상’이 돼 버린 것이다. 심각한 신학적 후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이지만, 1974년부터 사무국은 사회행동주교연수를 1986년까지 지역별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눈높이에서 고민하도록 현장체험과 회의를 성실히 조직해 나갔다.

이를 조직한 전 사무국장 중 한 명은 아시아 주교들이 가난한 이의 발전이나 가난한 이의 교회를 명시적으로 공식화한 적은 없다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1970년 마닐라에서 처음 주교들이 모여 낸 선언문과 1-7차 연수회의 메시지, 최종 선언문을 보면, 전체는 아니더라도 이 연수에 참가한 아시아 주교들이 끊임없이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는 것의 의미를 묻고 그에 응답하기 위해 애써왔던 사실을 인정하는데 인색하기보다는, 이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본다.

이제 25년의 긴 침묵을 깨고 다시 한번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기 위한 목표를 계속하기 위해 사회행동주교연수의 필요성을 확인했으니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더욱이 이번에 발표한 최종 메시지는 사회교리가 교회 내에서는 ‘숨겨야할 최대의 비밀’로 여겨지는 현실에 주목하면서, 교회쇄신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인다. 곧 참가자들은 사회교리의 가르침이 우선 실현돼야 하는 곳으로 본당, 교회 단체 및 기관을 들고,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할 것, 적절한 노동환경을 제공할 것, 의사결정 구조에서 남녀 평신도의 참여와 대표성을 인정할 것 등 세 가지를 무엇보다도 먼저 꼽고 있다.

또한 참가자들은 이민의 날, 난민의 날, 여성의 날, 토착민의 날, 소수자의 날 등을 통해 교회와 사회에 가장 소외되고 약한 이들의 문제를 널리 알리고 많은 관심을 갖게 하도록 교육하자고 결의했다.

이 두 가지는 크게는 FABC, 작게는 인간발전사무국이 얼마나 건강하고 자신에 차있고 힘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 힘은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데서, 곧 교회 자신부터 철저히 반성하고 그 성찰의 힘으로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실천지침으로까지 제시한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최종 메시지는 사회교리와 교회의 실천을 명백하게 보여줌으로써, 주교시노드 문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서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3차 세계주교시노드 문서인 <세상속의 정의>(1971)와 깊이 공명하고 있음은, 올 해 13차 세계주교시노드가 열리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복음화’를 중심 개념과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시노드 <의제개요>가 이미 나왔지만, 아시아를 비롯해 이른바 ‘제3세계’의 현실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우려의 소리를 그냥 흘려 들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사회행동주교연수 최종 메시지에서 언급한 난민, 여성, 토착민, 소수자 등은 아시아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절박한 삶의 목소리요 현장임에도, <의제개요> 어디에서도 이들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FABC가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아시아 교회가 전체 교회에 공헌하고 있는 점은 높게 평가되어야 마땅하고, 특히 인간발전사무국 의장과 사무총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가난한 이에 대한 깊은 일체감으로써 25년의 공백을 뛰어 넘어 이 연수를 되살려 낸 데 대해 아시아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축하해 마지않는 바이다.

▲ 연수에 참가한 한 주교가 에이즈 환자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다.

가난한 이는 우리 영성의 ‘마르지 않는 원천’(untapped source)

그럼에도 이 대목에서 이번 연수의 전 과정에 참가한 한 참가자의 입장에서 FABC와 인간발전사무국 또 아시아신학을 위해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사회행동주교연수는 제목에서 보이듯이 ‘주교’ 연수임에 틀림이 없는 만큼 더 많은 주교가 참가하도록 해야 하지만, 주교의 단체성(collegiality)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조금 더 확고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연수가 주교 중심으로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참여하는 방식이긴 했지만, 주교를 제외한 나머지를 ‘끼워준다’는 의식이 아니라 이들이 ‘친교의 공동체’로서 연수회를 온전하고 충만하게 한다는 의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연수에도 주요 주제에 대한 강의와 논평, 제안 등을 평신도 전문가가 감당 한데서 보이듯이, 각기 삶의 현장에서 가져 온 이들의 영성으로 더욱 충만하고 역동적인 연수회가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다른 하나는 이번 연수에서 사회교리와 영성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할 중요한 대목이라는 점이다. 이번 연수에서도 가난한 이를 우리 영성의 ‘마르지 않는 원천’(untapped source)이며 이들의 체험이야말로 아시아의 종교성을 드러내주는 중요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지만, 이는 이미 30년 전에 피어리스 같은 아시아신학자가 말한 데서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는 점은 지적해야 하겠다. 더욱이 가난한 이를 경제적 의미로만 계급화하고 나아가 객관적 실체로 대상화한다면, 그 계급을 절대화하고 신비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가난한 이는 예수의 케노시스, 곧 자기비움(self-emptiness)에 가장 가까이 노출된 이들 일 수 있지만, 경제적 가난이 자동적으로 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각기 다른 문화 속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 특히 가난한 이들이 체험하는 하느님을 다양함과 깊이의 언어로 보여주는 데에서 아시아 신학의 가능성을 찾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곧 아시아 신학은 세계 토착민의 70퍼센트가 아시아에 산다는 그러한 문화적 삶의 다양함으로, 세계 4대종교의 발원지라는 그 깊이로 십자가의 수직/수평적 의미를 가장 풍요롭게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가난한 이의 영성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며, 아시아 교회는 이런 영성과 신학을 서로 만나게 하고 실험하게 하는 데 더욱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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