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주말 영화] 미셸 아자나비슈스 감독의 <아티스트>, 2012

아카데미 시즌이 왔다. 매년 2월말이면 미국 LA에서는 일명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세계 3대 영화제에는 들어갈 턱이 없고, 영화의 예술적 질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지도 않으며, 외국어 영화상이라는 부문상이 있지만 오로지 미국영화 만세를 외치는 폐쇄적 영화제라 남의 잔치 구경이지만, 늘 그렇듯 관심이 간다.

할리우드가 영화산업의 메카로 위치를 공고히 하고 유성영화가 전면적으로 도입된 시기인 1929년에 첫 회를 치른 유서 깊은 이 영화제는, 칸느, 베를린, 베니스와는 달리 예술상이라기보다는 인기상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래저래 말들이 많지만, 어쨌든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 꼬리표를 달면 칸느 수상작보다는 대중적 관심을 끄는데 더 유리한 것이 사실.

2월부터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작품들이 속속 개봉하니, 수상작을 미리 점쳐보는 흥미진진한 게임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국내외적으로 한국영화가 1996년부터 2000년대까지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고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도 여러 차례 했건만, 숙원인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는 한번도 성사된 일이 없어, 어쨌거나 올해 행사도 남의 나라 잔치다. 그러나 이 특수 시기에 훌륭한 영어권 영화들이 대거 개봉되는 것은 어쨌건 반가운 일이다.

 

이미 2011년 칸느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고, 2012년 아카데미 영화제에 무려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아티스트>가 이 특수의 포문을 연다. 이 작품은 ‘흑백’이며 ‘무성’ 영화다. 필름에 사운드를 입힌 유성영화가 선보인 해가 1927년이고, 컬러영화가 도입된 해는 1935년이다. 그 후로 80년도 훌쩍 흐른 지금, 디지털 시대이자 3D, 4D 영화의 시대가 되었다.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인해 시각적으로 점점 더 강력해지고, 청각적으로도 더욱 복잡해졌다. 바야흐로 온몸의 감각으로 영화를 느끼는 햅틱의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 <아티스트>는 낡은 방식을 채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 너무도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영화 보기의 원체험을 전해준다고 할까. 작은 몸짓과 표정에도 디테일한 의미가 담겨있고, 대사와 소음이 없이도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 복잡한 내러티브 안에 거창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전달되는 소박한 감동. 이 영화는 만들기도 예스러운 방식이지만, 영화 초창기 역사에서 영화를 순수한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던 그때의 관객이 되어보는, 옛날로의 여행을 허락한다. 시청각 매체들이 난무하는 지금, 무성영화가 뭔지 도저히 알 리 없는 어린 세대에게는 진기한 체험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1920년대 말 할리우드. 출연 영화마다 흥행을 이어가던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인 조지(장 뒤자르댕)는 배우 지망생 페피(베레니스 베조)를 만나고, 두 사람은 첫 만남에 호감을 가진다. 유성영화가 도래하며 페피는 최고의 여배우로 성장하지만, 조지는 졸지에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신인 시절, 조지의 영화에 출연하며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페피는 인기스타가 된 뒤에도 조지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며, 절망에 빠진 그를 남몰래 돕는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조지는 페피의 호의를 오해하고 둘 사이는 점점 위기에 빠진다.

영화에는 목소리 대사가 없다. 전달해야 할 정보는 자막을 통해 전한다. 일부분을 제외하고 영화 대부분에는 배경음악이 깔리며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 영화는 1920년대 할리우드에 대한 오마주이자,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반성적 시선이 놓여있다. 영화는 그 시대의 제작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초당 22 프레임(현재는 초당 24 프레임)으로 찍고, 고전적 화면 비율인 1:1.33의 화면비를 유지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감각적으로 인물간의 공기를 맡는다.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의 로맨스라도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적 결을 가지고 있고, 이 도전적인 멜로드라마는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 아픈 떨림을 미세하게 전달한다. 가령, 영화 속 영화에서 스파이 역할을 하는 조지가 엑스트라인 페피와 연기하면서 계속해서 NG를 내며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장면이다. 조지가 처음으로 페피의 존재를 느끼게 되는 순간인데,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리고 서서히 감정이 증폭되며 실수를 범하고, 그리고 고민하고 진지해지는 모습은, 짧은 시간에 웃음에서 아픔으로 이어지는 찰나의 과정을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꿈틀대는 눈썹,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매, 깊어지는 눈빛을 통해 우리는 남자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영화의 원체험이 주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음향 효과가 분위기를 더하지 않아도, 그의 망설임과 근심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이 영화는 많은 참조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연출과 각본을 겸한 미셸 아자나비슈스는 프랑스 출신으로 전설적인 영화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 시기로 넘어가는 스타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1952), 찬란했던 무성영화 시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과거의 스타를 그린 느와르 <선셋 대로>(1950), 스타로 발돋움한 여자와 과거에 스타였던 쇠락한 배우인 남자의 비극을 그린 뮤지컬 <스타 탄생>(1976) 등이 떠오른다.

또한 조지와 애정이 떠난 부인과의 아침 식사 씬은 <시민 케인>(1941)의 전설적인 아침식사 몽타주를 패러디한다. 점차 사이가 멀어지는 부부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빠른 카메라 팬 이동으로 시간 경과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 외, 감독이 존경해 마지 않는 히치콕, 프리츠 랑, 빌리 와일더 식의 무드와 톤이 인물과 배경에 녹아 들어가, 영화는 깊은 감정의 콘트라스트를 느끼게 해준다.

<아티스트>는 흑백 영화 시절 대표적인 장르였던 멜로드라마, 느와르, 뮤지컬을 섞어 향수와 아련함과 순수한 열정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대공항 시기에 할리우드가 관객에게 보장해주었던 영화의 기능인 행복함과 즐거움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는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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