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변영국]

▲ 1월 3일 오후 6시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별관 대회합실에서 열린 ‘2차 따돌림과 폭력이 없는 학교를 위한 긴급토론회’

<절망>의 사전적 의미는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림. 또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아무 것도 바라볼 수 없는,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팍팍할까... 문득 사료 값이 너무 올라 자신의 소를 굶겨 죽여야 하는 수많은 농민들의 날선 얼굴들이 기억난다.

그들은 온 몸에 날을 세운 채로 청와대로 향했고 공권력은 그들을 막았다. 다른 한 편에는 졸업식 날 학교 정문을 지켰던 경찰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날선 얼굴로 학교 주변을 수색했고 가련한 ‘비행 청소년들’은 완전히 쫄아서 그 ‘비행’을 저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젠가 그 ‘비행’을 저지를 것이다. 조금 더 숙달된 솜씨와 거창한 계획으로...) 누가 우리의 꿈을 짓밟는가....

나는 급기야 이 귀여웠던 나라를 ‘경찰국가’로 둔갑시키는 현 정권에 대해서 별로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고도 남으니까. 게다가 이놈의 ‘비행 청소년’, 이 쉐이들이 도를 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사료 값이 없어서 자식 같은 소를 굶겨 죽여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별로 할 말이 없다. 경제학이나 각종 유통에 대해서는 우리 딸만도 못한 지식 밖에 없으며, 언감생심, 소고기를 먹는 호사는 그저 한 2년에 한 번이나 누리는 찌질이인 관계로... 그런데... 도대체 ‘비행 청소년 쉐이들’이 왜 ‘도를 넘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렇게 창졸지간에 한우가 개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나? 궁금하다. 하지만 그 궁금증을 파헤칠 생각도 없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답을 알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좀 생각해 보고 싶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꿈꾸기를 포기했나, 우리 이제부터라도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래서 너무나도 소중한 꿈 한 자락씩은 사추리 깊은 속곳 작은 봉창, 거기에 담아 놔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궁극에 가서는 너와 내가 다르고 여기와 저기가 다른... 그리고 그 다름이 최고의 미덕이 되는 그런 나라를 좀 만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여기가지는 너무 많아 나갔다. 그저 나도 꿈을 하나 꾸고 저 녀석도 꿈을 하나 꾸는데 저 녀석 꿈이 아무리 찌질해도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박수 쳐 주는, 그런 인간들이 서로 되어봤으면 좋겠다.

지하철에서 서로 미친듯이 입을 부벼대는 커플을 본 적이 있다. (원, 지저분한 것들이 입가에 침까지 번들거리면서 그러고 있으니 내 깐에도 ‘저거 좋은 소리는 못 듣지’ 했다) 허나 나는 어떤 쪽이냐 하면 그 ‘번들거리는 민망함’ 보다는 ‘만인 환시 속의 당당함’을 더 쳐주는 쪽이어서 조금 욕지기가 나기는 했지만 별로 괘념치 않았다. 그런데 그 커플이 개봉인가 오류인가에서 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비분강개의 열사적 선언이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원 개만도 못한 것들. 추접스러워서 어디 전철 타겠나.”
“아 그 지랄을 하려면 여관에 가서 그 지랄을 하지 여기가 제 집 안방이야?”
“요즘 젊은 것들은 다 저러더라니까..”
“어이구 아저씨 그런 말 마세요.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데요.”
“아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요즘 젊은이야?”
“요즘 젊은이 엄마예요.”
“거 자식이 뭘 배우겠어..”

70을 바라보는 한 어르신과 60을 바라보는 한 아주머니를 격노시켜 엄청난 싸움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왕에 전철을 내린 예의 그 커플이 조금 밉기는 했다. 하지만 그 커플은 ‘개만도 못한’ 정도는 아니었으며, 키스를 하려는 모든 커플이 여관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여관이라는 게 얼마나 음흉하고 지저분한가) 또한 그 커플이 요즘 젊은이들의 대표도 아니다. 그렇다면 전철안의 그 ‘비분강개성 선언’들은 모두 그 근거가 매우 박약한 주장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있지도 않은 죄로 사람들은 그 두 젊은이를 단죄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화를 냈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 봐도 그 젊은이들에게 ‘남들과 다른 짓을 하고도 뻔뻔한 죄’ 이상을 물을 수는 없었다. 남들과 다른 게 죄인가? 이게 또 골치 아픈 게 소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맞는 거라고 믿는 괴상한 습성이 있다. 그러니 남들과 다른 게 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설프게 동료를 괴롭히는 비행 청소년 놈들이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남들과 다른 지진아들을 혼내줬다’는 당당함을 스스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 녀석들은 부모님에게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함’을 배웠다. 그 녀석들은 ‘남들이 다 하는 걸 못하면’ 부모님에게 까이곤 했다. 실제로 그 녀석들의 부모님도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한다. 살만한 평수의 집에 살아야 하고 탈만한 차를 타야하며, 입을 만한 옷을 입어야 하고 갈만한 식당에 가야하고 자식에게도 입을만한 것을 입히고 먹을 만한 것을 먹이며 보낼만한 곳에 보내야 한다. 그런데.. 공권력은 그 모든 ‘성인들의 잘못’을 은폐하고자 경찰을 띄운 것이다. 그게 다다. 영어로 Thats it.

인생의 모든 목표가 ‘남들과 같아지는 것’(뭐 혹자는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똑같은 말이니까)인 대개의 사람들은 ‘원인’이나 ‘과정’에 천착하고 뭔가 밝혀내는 것 보다는 ‘결과’에 강렬한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까 ‘먹어야 할 것’ 중 하나가 한우인 것이고 한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 중산층이라고들 믿게 된 듯하다. 그러니 그런 야무지게 비어버린 머리로 왜 한우가 비싼지, 도대체 한우는 어떻게 키우는지, 왜 이메가는 그토록 에프티에이에 광분하는지 따위를 알려고 하기보다 한 번이라도 더 ‘비싼 한우’를 먹거나 먹임으로써 스스로의 사회적 등위를 확인하는 것에 혈안한다. (그래 당신들 A+++다)

그러는 동안 ‘사료’ 장사와 거기에 관계되는 모든 관료적 잡동사니, 그리고 축산 농민이 소를 출하 하고 백성이 그 고기를 맛보는 모든 과정의 기업과 거기에 관계되는 관료적 잡동사니들만 봉 잡았던 것이리라.

알지도 못하는 추측으로 떠들어대서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가 한 번이라도 짐승과 인간이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 봤다면... 극소수의 재벌과 정치 모리배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주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열불이 치민다. 아주 투박하게, 날 것으로 이런 시대의 도래를 예언했던 조지 오웰이 차라리 밉다. 짐승과 인간? 짐승은 꿈을 꾸지 못하지만 인간은 꿈을 꾼다. 짐승은 사육당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산다.

변영국(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