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기간 중에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왜 제가 강론을 해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홍원장님과 관계를 맺은 건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함께한 고작 3년뿐인데 더 많은 시간을 그분과 함께 보낸 이들의 사연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장님과 저 역시 십 수 년의 인연이 있던 사이입니다. 30년전, 팔이 골절되어 처음 찾아간 ‘홍정형외과’에서 원장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병원을 찾기 전 어머니는 집에 남아도는 끈과 천으로 임시로 팔걸이를 해주셨는데 진료가 끝나고 홍원장님은 ‘팔걸이 좋네요’라고 하시며 그냥 가라하셨습니다.

저는 내심 다른 친구들이 ‘무슨 무슨 정형외과’라고 적힌 팔걸이를 드디어 해본다는 기대를 가지고 갔는데 원장님은 꼬맹이의 속마음도 모르고 그냥 돌려보내셨습니다. 정형외과 이름 적혀있는 팔걸이에 그럴듯하게 깁스라도 해야 ‘나 아프다’고 하며 돌아다닐 텐데 도대체 병자로서의 꼴을 갖춰주지 않는 원장님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지금 왜 그러셨냐고 물어도 대답 없는 원장님 앞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원장님은 그런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비록 환자로 시작된 인연이지만 십 수 년을 거슬러 최근 몇 년 동안 가깝게 뵈며 저만이 가지고 있는 그분과의 기억, 그것이 원장님의 관계 맺기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여기 둘러앉은 우리 모두 각자에게 특별한 모양으로 각별한 사연으로 관계를 맺은 원장님은 그러고 보면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팔걸이를 원하는 꼬마에게 그냥가라 하시던 야속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원장님은 그렇게 군더더기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과장도 포장도 없이, 필요한 만큼만 담겨있는 정갈한 반찬 종지처럼 자신의 의술을 베푸셨고 자신의 마음을 나눠주셨던 분입니다.

늘 함께 걷던 단출하고 간단한 배낭처럼 과장도 포장도 없는 원장님은 아들 벌인 저에게 당신이 세상에 얼마나 무지했고 또 어떤 계기로 약자들의 아우성과 가난한 이들의 눈물에 마음을 쓰셨는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유복한 가정에 의사라는 괜찮은 직업을 가진 이가 아들 벌인 사람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어찌 이리 솔직하신지 아슬아슬하기도 하였지만 늘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셨던 분, 원장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원장님을 찾아온 수많은 문상객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원장님의 넓고 깊은 관계 맺기에 놀랐습니다. 인천지역에서 활동한다 하는 사람은 다 모인 듯 한 장례식장에서 본 원장님의 관계 방식은 진보도 보수도, 지식인도 무학자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젊은이도 없어보였습니다. 편 가르기 좋아하고 허장성세에 능하며, 사람과 관계 맺기를 인맥다지기 정도로 여기는 인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깊이요 넓이, 그것이 원장님의 관계 맺기 방식입니다.

애초에 정계에 입문하셨거나 괜찮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셨어도 뭐라 말할 사람 없을 만한 관계를 맺었던 원장님.

하지만 원장님이 돌아온 자리는 아무도 없는 성당 안 감실 앞이었고 허름한 막걸리집 마주앉은 가난한 눈동자의 언저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조용한 성당 안에서, 가난한 동료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이 정의로운 분노며 ‘공감’인지, 그리고 무엇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인지를 묻고 또 물어 이렇게나 많은 관계들 속에서 혹여나 묻었을 때와 부스럼들을 털어내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 힘겹고 무거운 세상을 누구보다도 가볍고 경쾌하게 걸으실 수 있었고 어느 누구에게나 빌려줄 수 있는 너른품을 가지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매년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자는 취지로 열리는 사회교리대학교를 제일 먼저 수강 신청하시고 강사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뒤풀이 자리까지 챙겨주시던 모범학생 홍성훈 원장님은 그렇게 이미 사회교리를 몸소 살고 계셨던 분입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허기진 제자들과 함께 낱알들을 비벼 까먹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 엉엉 소리 내며 울며, 시정잡배들이 들끓던 세상의 좌판을 분노로 뒤엎으며, 세리든 창녀든 할 것 없이 찾아오는 이 마다않고, 진보니 보수니 떠드는 이들을 부끄럽게 돌려보내던, 오롯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 참 사람을 바라보고 마주할 줄 알았던 청년 예수처럼 사셨던 분입니다. 복음을 몸으로 묵상하지 않았다면, 신앙의 정수를 참으로 꿰뚫어 보지 않았다면 흉내 내기 힘든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결하고 단순한 삶. 그렇게 원장님은 진짜 신앙할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이자 인간인 예수가 살았던 길이 저 눈물겨운 사람이었다면 원장님이 살았던 길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진보도 보수도 가진자도 못가진자도, 지위고하 따위가 모두 무색해지는 진짜 중립, 참 길, 그저 ‘사람’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저 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 깃들어 사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연민하고 사랑했던 원장님. 떠나는 시간까지 일일이 전화해 여차저차해 후원금을 더 이상 보내줄 수 없다거나 이제 만나기 힘들 거라고 말하시며 떠날 준비를 알뜰하게 하시면서도 사람들 언저리를 끝까지 맴도셨던 영락없는 사람 홍성훈 원장님.

의사니 위원이니 대표니, 민주화의 너른 품이니 어떤 별칭도 직함도 홍성훈 이라는 사람의 깊이와 넓이를 규정할 수 없듯 그분은 그저 삼십 촉 외등이 깜박이듯 힘겨워 하는 세상을 함께 울고 어깨를 다독여주며 술잔을 채워주던 분이셨습니다.

“포장하거나 과장하지 말 것, 사람을 소중히 각별하게 만날 것, 지위나 신분으로 평가하지 말 것, 복잡하게 에둘러가지 말 것, 무엇이 소중하고 중요한지 묻고 또 물을 것, 마땅히 분노할 자리에 분노할 것, 뒤풀이 도망가지 말 것, 자주 운동하고 담배 끊을 것, 교리공부해서 세례 받고 기도할 것...”

사랑하는 원장님의 곁을 우리 모두에게 흔쾌히 내어주신 유족들을 기억합니다. 봄날의 바람처럼 자유롭고, 시원한 막걸리처럼 청량하며, 구수한 된장 같은 벗으로 우리들 곁에 함께 있도록 허락해주신 안젤라 자매님, 그리고 아드님들을 비롯한 유족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들 뻘인 저에게 ‘장신부, 장신부’ 불러주시던 원장님의 목소리가 벌써 그립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원장님처럼 열심히 사람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장동훈 신부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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