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살림교회 최형묵 목사

지난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 세력에 의해 경기도 분당 샘물교회 자원봉사자 23명이 납치되었다. 무사귀환을 바라는 가족과 국민의 염원 속에 8월 30일 21명이 모두 돌아오기까지 두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서 이번 피랍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우리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번 피랍 사건으로 그동안 수면에 가라앉았던 한국 교회의 독선적이고 공격적인 선교 행태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등하였다. “선교냐 봉사냐?” 또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펼치는 선교가 과연 정당하냐?” 피랍자들이 무사히 귀국한 뒤에는 선교에 대한 또 다른 논의로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하겠다.

지난 9월 2일, 여름 끝더위가 무심한 속에 천안 살림교회의 최형묵 목사를 만나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건으로 돌아본 한국 교회 선교의 문제점” 또는 “이 시대의 참다운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 목사는 개종을 전제한 선교는 중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다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지점에 서있는 것이다(지금여기 편집국)

박오늘: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건으로 불거진 한국 기독교 선교 문제의 현주소와 비전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자 이렇게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이번 아프간 한인 납치 사건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으면 합니다.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선교 문제와 아울러 선의의 동기로 그곳에 갔던 사람들에 대한 비난 등이 겹쳐 한국 교회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최형묵: 두 사람이 희생되었지만 21명의 봉사자들이 더 이상 희생 없이 돌아올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가 제기하는 과제가 많습니다. 지금 논의의 초점이 기독교 선교 문제만 부각되면서, 이 사건이 안고 있는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번 피랍 사건을 빚은 일차적이고 거시적인 문제는 미국의 동맹군으로 한국군을 파병한 데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이번 사건으로 돌출된 선교 문제를 자성적인 차원에서 살펴봐야죠. 한 마디로 공격적인 선교라고 하는데, 이 문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선교와 봉사는 개념 자체를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봉사도 선교에 포함됩니다. 그건 가톨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원천적으로 선교는 복음의 구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현하는 겁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선교 개념이 변화해 왔는데, 지금까지 선교는 개종을 노리는 선교와 (흔히 전도라고 표현하죠.) 현지인들의 요구와 필요에 기여하는 봉사활동이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입장에서는 둘 다 선교로 볼 수 있습니다. 개종을 의도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봉사활동도 복음을 구현하는 본질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교를 중지해야 하느냐 할 수 있는데, 선교는 중지될 수 없는 거죠.

이번 인질사태를 빚은 사람들은 선교가 아닌 봉사활동이라고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선교 역사를 보더라도 학교나 병원을 세우고 지역 사회를 기독교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슬람권에서는 선교와 이러한 봉사가 구별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곧 선교사로 인식하는 거죠.

저는 차제에 아예 그런 의도까지 배제하는, 결과적으로는 어떤 개종의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개종을 노리는 선교는 지양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협력할 수 있는 모델로서, 종교 간 협력하고, 선한 일을 하는 다른 원조단체들과 신념과 가치관의 배경은 다르지만 선의의 뜻을 품은 사람들과 공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종을 위한 우회적 접근의 사회봉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응답하는,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선교활동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선교는 중단될 수 없는 겁니다.

이번 사건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문제가 단기선교입니다. 말을 바꾸면 단기봉사활동인데, 단기선교 하러 가는 현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과 아울러 왜 이렇게 단기선교를 선호하느냐 하는 문제를 짚어 봐야 합니다.

선교는 현지상황 특히 이슬람권처럼 폐쇄적인 지역에서는 현지인의 가치관이나 관습 등에 대해 충분히 배려하고, 그러한 것에 충분히 육화될 수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단기선교 가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런 의식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번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극한의 위험상황에 처할 수 있는데도 마치 여행 가듯이 단기선교 가는 것은 언제든지 위험상황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단기선교를 선호하는가? 저는 그걸 선교의 정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교회 외연을 확장하는 효과가 있고,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에겐 선교의 의미를 부여해 주면서, 결과적으로 교회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가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는 한국 경제 성장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박오늘: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아프간 피랍 사건을 정리하면서 이야기가 선교로 넘어왔습니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정의 속에 단기선교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단기선교는 교회뿐만 아니라 신자들 입장에서도 선교 봉사의 뜻과 외국 문물을 경험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이런 선교의 정치학적인 지형에 대해서 더 말씀해 주십시오. 신자와 교회의 역학관계가 존재하는 듯도 싶은데…. 또한 단기선교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도 지속되었던 데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최형묵: 뜻있는 활동에 참여하면서 외국 문물도 경험하는, 그래서 자긍심도 갖게 하는, 또한 가서 실제로 가난한 사람과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한테 도움을 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 것을 교회가 아주 적절하게 잘 활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 교회의 일방적이고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선교가 지적되고 있는데, 단기선교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선교라는 것은 일방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내가 정당하다고 상대한테 꼭 유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선교는 문제라고 봅니다. 단기선교든 장기선교든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에서 선교가 급증한 시기는 90년대 이후입니다. 90년대 이후면 한국 경제가 성장한 시기로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때입니다. 한편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률이 현저히 둔화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게 한국 개신교가 해외선교로 눈을 돌리는 거시적인 하나의 배경이 되는 거죠.

박오늘: 국내의 성장 한계를 극복하려는 행위라는 말씀이신지요?

최형묵: 한국 기독교가 유달리 배타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앙 자체가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고, 타문화나 타종교에 대해 포용하기보다는 거부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 전래된 개신교가 미국 근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여러 갈래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유달리 배타적이고 근본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권을 가졌고, 그 선교사들이 교권과 신학을 사실상 지배하게 됩니다. 선교사들 영향뿐만 아니라 한국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면도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한국전쟁을 겪었고, 전쟁이 끝나고도 개발독재 정권에 따른 고도경제성장 등, 한국 현대사 속에서 위기가 일상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자체가 전쟁과 같은 상황이 된 거죠. 공동체의 원리도 붕괴되고 소외현상이 발생하는…. 달리 말하면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위기와 소외를 낳은 거죠. 교회가 그걸 적절하게,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포용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받아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교회 가면 위로받을 수 있다,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즉물적인 신앙관을 형성하는 데도 기여를 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국과 관련이 있는데, 한국전쟁 시기에 미국의 원조물자를 공급해 주는 민간기구로 교회가 한 몫을 합니다. 교회 다녔더니 내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까지 얻는다, 이렇게 신앙이 곧바로 물질적인 보상으로 연결되면서 숭미신앙과 숭미주의를 낳습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하는 이런 것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는 신앙 담론이 되고, 신앙은 곧 물질적인 보상으로 연결된다는 믿음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은 끊임없이 선망을 받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나 낙오자들은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신앙관이 은연중에 형성됩니다.

말하자면 근본주의적인 신앙관에 물질적인 보상을 곧바로 신앙의 결과로 인식하는 데서, 일종의 서열의식 또는 우월의식이 당연시되고, 그것이 해외선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기독교를 믿는 국가는 잘사는데 이슬람 국가는 왜 저렇게 가난에 시달리느냐? 구원의 종교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화의 대상으로, 시혜를 베풀어서 구원의 방주로 이끌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는 거죠.

박오늘: 미국 근본주의 신앙의 세례와 한국의 위기상황이 맞물려 물질적인 축복을 믿고 바라는 즉물적인 신앙관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러한 의식으로 해외선교를 바라보게 되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교회 지도자의 그릇된 선교관이 잘못된 선교 행태를 낳은 게 아닌지요?

최형묵: 지도자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메커니즘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선교의 정치학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도자나 참여하는 사람이 다 공모하게 하는, 선한 선교를 한다는 명분 하나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메커니즘이 있는 거죠.

박오늘: 그렇다면 교회는 메커니즘을 부수고 대안을 찾아야 할 텐데….

최형묵: 교회는 그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되돌아보고 마땅히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안은 그런 형태의 선교를 하지 않는 측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단체가, 교회가 자성을 해야 하는데, 대안과 자성이 일치하지 않고 있죠.

단적으로 한기총과 세계기독교선교협의회가 같이 회의를 했는데, 자성의 목소리보다는 선교사 위기관리에 초점을 맞춘 결의를 하였습니다. 선교를 하는 입장에서야 선교사 위기관리는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걸 일찍 준비하지 못한 게 오히려 문제죠. 우리가 자성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다른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위험한 곳에서 선교사들이 열심히 일한다,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하는데, 긍정적인 평가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특히 이슬람권에서는 뿌리가 같으면서도 역사적으로는 갈등하는 관계를 빚었습니다. 원래 꾸란에서 나왔다시피 같은 성경의 백성이거든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뿌리가 같다는 점에서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전혀 모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일방적으로 이슬람은 전혀 다른 종교고 배타해야 한다는 이런 태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또 하나 뿌리가 같으면서도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서 빚어진 불행한 역사 관계로 인해 기독교인 자체가 호감을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고려 없이 이슬람은 구원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로 대체해야 한다면, 기독교는 여지 없이 혐오의 대상이고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박오늘: 선교의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안타깝게도 자성해야 할 사람들은 아직 성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대안은 다른 데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선교는 어떤 것입니까?

최형묵: 저는 기본적으로 개종을 노리는 선교는 중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개종을 노리는 선교가 계속되는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자면, 교회 선교기관 또는 공식적인 교단에서 파송한 다종다양한 선교사들을 총괄적으로 협의를 통해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신교의 해외 선교는 그런 통제장치, 조정기구가 없습니다. 선교사가 필요한 지역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고,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오지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선교하는 분도 있지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등 유명세를 타는 곳에 많이 가있죠. 그리고 한국군이 파견되면 거기에 편승하고 그 힘을 이용하는 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선교 단체를 통폐합해서 하나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무분별한 경쟁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협의기구와 그걸 통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일, 이런 노력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원칙적으로 현지 교회와 파트너십, 협력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교회가 없는 곳은 없지만 교회가 없으면 현지의 NGO 단체와 협력하는 겁니다.

선교는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선교를 자선, 봉사, 옹호, 정의로 정의를 했습니다. 푸드 뱅크를 예로 들면서 설명을 하는데, 음식을 주는 게 자선이면, 봉사는 푸드 뱅크에서 봉사자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옹호는 푸드 뱅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거나, 로비 활동을 통해서 정책적으로 지원하게 하는 겁니다. 꽤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의는 뭐냐? 정당한 임금을 주는 겁니다. 푸드 뱅크를 통해서 수혜를 받아야 하는 층 자체를 없애는 게 정의이고 선교입니다. 선교관이 이렇게 발전을 합니다.

개신교의 ‘하느님의 선교’ 개념이 바로 이 개념입니다.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고 해서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선교를 말합니다. 교회 중심의 선교는 모든 걸 교회를 통해서 활동하고 교회 이름을 내고, 그 결과 교회로 끌어들여 신자화하는 건데, ‘하느님 중심의 선교’는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겁니다. 교회는 겸손하게 쫓아다니면서 거든다는, 교회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겁니다. 도시산업선교나 민중신학이 모두 하느님 선교 개념을 수용한 거죠.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 노동자들을 위한 운동, 민중운동, 이 자체가 하느님 중심의 선교입니다. 꼭 기독교화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켜 나가면 그 자체가 선교라는 거죠.

박오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섬김이라는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봉사는 우월의식을 갖는 개념이라면, 섬김은 한없이 낮아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이 전해주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를 돌아보는 성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한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개신교의 선교 행태는 과거 가톨릭의 제국주의적인 선교 방법을 반성 없이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형묵: 섬김, 그게 그리스도인의 본질이죠. 그게 핵심인데, 기독교인들한테 전도되어 있어요. 하느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인간을 섬긴다, 세상을 섬긴다, 이건 곧바로 우상숭배라고 생각하거든요. 대부분의 보수적인 신자들은 섬김의 대상은 하느님이지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을 강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잘 섬기면 되지 왜 다른 사람을 섬기느냐는 성향이 강해요. 그래서 구원받게 해야 한다는 우월의식은 있을지언정, 상대방의 자리에서 그야말로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하죠.
 

오늘날 개신교 선교는 과거 가톨릭의 제국주의적인 선교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분쟁지역에 파견되는 군대에 편승해서 활용하는 측면까지 있다고 했는데,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 경제 성장과 기독교 확장 과정이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해서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거 하고 거의 비슷해요.

개신교가 고도로 압축된 경제 성장 과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체현하는 측면이 있어요. 나아가서 보면 압축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개신교가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번 피랍 사건을 통해 개신교를 공격하는 극단적인 언어들이 많았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똑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공격적인 선교를 하는 사람이나 비국민이라고 공격적인 비난을 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내면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개신교가 일대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한국 사회의 분노감 이런 게 전혀 거르는 장치 없이 표출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피랍자들 역시 치유의 대상입니다. 감싸 안아줘야죠. 총체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판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책임자들과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반성을 촉구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개별 신자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또 하나의 희생양을 삼아서 내 주장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됩니다. 공격적인 선교와 공격적인 비판은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거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죠.

보수 개혁 성향의 목사님과 대담을 했는데, 이번 사태의 현상을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서는 의견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적 입장엔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개종을 노리는 선교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분은 선교 자체가 배타적인 면이 있고 개종을 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성격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로 인해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은 필요하다고 합의를 했습니다.
박오늘: 배타적이라고 하셨는데, 기독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왜 배타적인 종교라고 하죠?

최형묵: 제가 믿는 기독교는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돌고 도는 수난 관계에서 별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거죠. 기독교는 확실히 노예들의 종교입니다. 그런 수난을 벗어나는 데 희망을 주었거든요. 돌고 돌면 계속 이렇게 살라는 말이냐 이렇게 되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배타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문맥을 봐야 합니다. 그건 억압받는 이들의 탄식이거든요.

우리 교회 신자가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하는 걸 읽고는, 예수님의 윤리관은 굉장히 편향적이라고 하면서, 부처나 공자는 안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부처나 공자는 세상에 누릴 것 다 누려 본 사람이다. 누릴 대로 누리고 세상을 경영해 보기도 하고, 그들의 제자는 대개 식자층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문자를 아는지도 의문이고, 그런 걸 향유해 보지 못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바닥의 사람이었다. 부르주아적인, 개인주의 교양 차원에서 보면 예수는 굉장히 흠결이 많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바닥의 인생에서 볼 때는 전혀 다르다. 러셀은 아마 바닥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순전히 인간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가장 밑바닥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엄청난 보편성을 지닙니다. 민중의 자리에서, 바닥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시각, 이것이 어쩌면 기득권을 향유하는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밑바닥층의 절규라는 게 불편하죠. 지금도 길거리에서 누군가 구호를 외치면 적당히 향유하는 사람 입장에선 굉장히 불편합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했던 고통스러운 상황이 훨씬 보편적이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언행은 근본적이고 철저한 보편성을 지녔습니다. 전 세계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훨씬 크게 다가가고, 그런 면에서 급진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종파나 민족에 대한 배타성이 아니고, 전 세계 가장 밑바닥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분이죠. 마르크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인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최초의 선생님이라고.

박오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보편성은 뭔가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겐 무척 낯설고 불편한 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게 오늘날의 참다운 선교라고도 하셨습니다. 선교관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자세로까지 번졌습니다.

최형묵: 예수님의 황금률은 본회퍼에 따르면 철저히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결국 타인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의 기본원리는 섬김입니다. 그 원리가 서면 정의로 가는 거죠. 남을 섬기면 전부 종이 되느냐? 전부 남을 섬기면, 서로 섬기면 주인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주인이 되면, 한 명만 주인이 되고 나머지는 다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섬김의 원리가 삶에서 구현되면 정의가 이루어지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병행하는데, 그 이야기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이웃 사랑을 통해 체험할 수 있고, 이웃 사랑은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타자의 입장에서 낯선 타자를 수용하는, 그런 정의로운 관계를 이루어가는 겁니다. 그러려면 겸손해지면 됩니다. 과시욕이나 자기를 드러내려 하기보다는 겸손해지고 낮아질 수 있는 기독교, 작아지는 기독교, 생색나지 않더라도 묵묵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현하는 겁니다. '2030 TARGET'(2030년까지 10만 명의 선교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 이런 목표를 세우는 게 아니라,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런 구호를 외치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됩니다. 저는 거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느냐는 많이 생각해야죠.

바오로 사도가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 선교하는 선교사가 “나한테 땅 끝이 어디일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답니다. 그리고 내린 답이 “나한테 땅 끝은 바로 내 이웃이다,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더군요. 물리적인 공간의 이해에서 벗어나야죠. 상대를 존중하고 협력 상생하는 모델이 이 시대의 훨씬 구체적인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개종을 시키는 게 선교가 아니라면 무엇이 선교냐, 그럴 텐데, 정의구현이 선교입니다. 하느님 세상을 구현하는 거죠.

박오늘: 이랜드 문제를 보더라도 기부나 헌금보다는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게 올바른 정의구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의구현은 지금 이 시대에 아주 중요한 선교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아지고 낮아지는 선교의 본질은 사실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혜를 베푸는 봉사가 아니라 타인의 자리에서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선교에 임해야 한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려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고 협의를 해야 하며, 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타인의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무언가를 훨씬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해주셨습니다.

이번 사태로 불거진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은 기독교계의 뼈아픈 성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교회와 그 많은 성당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대로 삶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평화와 상생의 기운이 넘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역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고맙습니다.
 


최형묵 목사는
연세대학교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하고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 및 계간『신학사상』편집장을 지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천안교회 부목사를 지냈고 지금은 살림교회 담임목사이다.
한신대 외래교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이사 등 역임.
현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교회 사회위원회 서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신앙과 직제 위원회 서기. 계간『진보평론』편집위원.
‘미래를 여는 아이들’공동대표. 푸른천안21추진협의회 위원.
 

/박오늘 2007.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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