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어느 밤. 지방 초청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던 밤. 별 생각 없이 라디오를 켰는데 내 노래 「무지개」가 막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와 나 이마 맞대고 한 동안 우린 아무 말 못 했네
그러나 하느님 우리 마음을 잘 섞어 주셨네.
너와 나 다시 만나리 다정히 이마 맞댄 곳서 만나리.
그렇게 하느님 우리 마음에 믿음을 주셨네 (유경환의 詩 「무지개」中에서
)

아무런 꾸밈도 없이 부르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프라도 수녀회>에 사는 내 동생수녀이다. 지금은 서울역 앞 공부방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프랑스 모원으로 가서 어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4~5년이 걸리는 첫 외국생활을 위해 떠나는 동생의 야윈 얼굴이 화려하고 부산한 공항의 정경과 함께 오버랩 되면서, 언젠가 다시 만날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가을. 돼지를 키워 어렵게 꾸려가고 있던 구 일산지역 공부방 <밤골 아이네>에 불이 났고 그 손실을 메꾸기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귀한 분이 두 분 오셨다. 내게 여러 편의 노랫말을 써 주신 유경환(클레맨스)님과 동화작가 정채봉(프란치스꼬)님이신데, 두 분은 맨 앞에 나란히 앉으셔서 해맑은 소년의 웃음으로 노래공연을 지켜보셨다. 정채봉님께서는 그 후 장편동화 <초승달과 밤배 2>에 그날의 정경을 그림처럼 묘사해 주셨고, 유경환님께서는 공연현장에서 쓰신 <무지개>를 보내주셨는데, 그 시를 우편으로 받아 들고 읽는 순간 내게는 노래로 다가왔다.

얼마 후 있었던 「김정식 로제리오 생활성가 3집」에 이 곡이 실리게 되었고 가장 적합한 목소리로 동생 수녀가 결정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들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인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동생은 당시에 파출부 일을 끝내고 잠시 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곡을 녹음하고 웃으면서 돌아갔다. 한 곡을 녹음하는데도 그 보다 수 배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우리는 그런 그녀를 「파출부 가수」 혹은 「무공해 가수」라고 불렀다. 기교를 몰라서 못 부리고 꾸며서 부를 재주가 없어서 있는 그대로 부른 정갈하고 담백한 이 노래처럼 프라도 수녀들의 일상도 단순하고 가난하며 소박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섞여서 함께 노동을 해야 하니 수도복 차림으로는 불가능하고 평상복 차림이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가끔씩 재미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언젠가 어느 천주교 서원에서 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는 중년을 조금 넘긴 수도복 정복차림의 수녀가 한 분 계셨다. 서원 책임자인 수사님께서 ‘김정식 로제리오 씨의 동생인데 <프라도수녀회> 의 수녀’라고 소개하자 갸웃갸웃 여러 차례 살펴보고 나서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

“저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 수녀회가 교황청 인가는 났나요?”
“아니요, 저희 카리스마를 살기 위해 저희는 교황청 소속 수도회보다는 프랑스 리용 교구주교 관할수도회로 남기로 선택했어요.”

올해로 창립 150 주년이 지난 <프라도 수도회>에 비해, 제법 큰 공동체로 급성장하긴 했지만 창설한지 30년 쯤 밖에 안 된 수도회 소속인 그 수녀님은 잠시 후에 다시 다가와서는,

“저어~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노동을 하신다면 기도생활은 하시나요?”
“그럼요. 더욱 더 기도가 필요하죠. 저희 창립자이신 슈브리에 신부께서 ‘세상에 묻혀 살면 살수록 더욱 기도의 정신으로 충만하라’ 고 하셨어요.”

서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수녀께서 다시 다가와서,

“한 가지만 더 묻겠는데요. 매일미사는 하시는지요? 미사 드려 주시는 신부님이 계시나요?”
“아니요. 정기적으로 오시는 신부님과 미사를 드리는 경우 외에는 대부분 수도회가 속해 있는 지역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지요. 언제 한 번 놀러오세요. 사는 모습을 직접 보시면 궁금증이 많이 풀리실 거예요.”

모두가 좋아하는 무지개가 일곱 가지 빛깔이라 했던가?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내가 좋아하는 한 가지 색깔만을 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되면 고작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만 이루어진 파랑 막대기나 빨강 막대기에 불과하게 될텐데도...

너와나 지금 못 봐도 언젠가 우린 늙어서 만나리.
그 때엔 하느님 우리 마음을 무지개로 보게 하시리. (유경환의 詩 「무지개」中에서)

2007년 6월 4일 새벽

* <경향잡지> 2007년 7월호에 실렸던 글임

/김정식 200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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