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수도원 기행-13]

로마에 살면서 자주 하게 되는 대화이다. “왜관 수도원에 몇 명 살아?” “지청원자 다 포함하면 약 백사십 명쯤…” “우와아! 우리 수도원에 한 명만 보내주라, 제발…” 역사는 백 년 밖에(?) 안 되었어도 왜관 수도원은 이렇게 머릿수 하나로 모든 수도원들을 잠재운다. 이때 상대가 너무 기죽어하면, 한 가지 비밀을 살짝 털어놓는다. “많이 들어오지만 또 많이 나가.”

사람들이 자꾸 떠나는 것, 나는 이게 늘 불만이다. 떠날 때야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떠나겠지만, 공동체에도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 ‘타산지석’이란 말도 있듯이, 이럴 때 유서 깊은 수도원들의 역사를 거울삼으면,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지혜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소개하려는 로마 성 바오로 수도원이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이다. 사도 바오로 탄생 2000년을 맞아 수도원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고 있는 이곳을 한 번 둘러보았다.

네로 황제 때인 65-67년에 순교하신 바오로 사도의 무덤은 로마에서 오스티아 항구로 가는 옛 도로인 ‘비아 오스티엔제’(Via Ostiense) 길가에 있었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이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이 당시 로마를 둘러싸고 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 성벽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Basilca di San Paolo Fuori le Mura)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성을 쌓은 바오로 대성당은 ‘요한의 도시’라 불려

대성당에 수도자들이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그레고리오 대교황(재위590-604) 때 벌써 이곳에 남녀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 바오로 수도원의 실질적인 창립자는 교황 그레고리오 2세(재위715-731)이다. 그는 바오로 대성당을 수도승들에게 맡겼고, 성 보니파시오를 독일로 선교 파견하여 그 곳에 최초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설립되게 만들었다. 이후 바오로 대성당은 점점 더 큰 수도원으로 발전하나, 그만 사라센인들의 침략(844)으로 베드로 대성당(바티칸)과 바오로 대성당이 약탈당하는 재앙이 일어났다.

이런 수난을 겪은 뒤, 두 대성당은 주변에 성벽을 치고 요새 도시처럼 변모하게 되고, 성을 쌓은 교황의 이름을 따서 바티칸은 ‘레오의 도시’, 바오로 대성당은 ‘요한의 도시’라 불렸다. 수도원이 튼튼한 성곽으로 둘러쌓이자, 수사들이 게을러졌던 탓일까? 내적 규율이 느슨해지고 수도생활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936년 성 오도 아빠스가 로마에 오면서 수도원이 다시 살아난다. 그를 비롯해서 여러 훌륭한 끌뤼니의 아빠스들이 바오로 수도원의 전례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끌뤼니 수도원에서 하듯이 엄격하게 바로 잡았기 때문이다.

이 때 수도원의 성소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나아가 이 수도원 출신으로 교황이 되는 이들까지 생기니, 바로 요한 18세(재위 1003-1009)와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이다. 그들 중 그레고리오 7세는 개혁의 화신 같은 분으로 “교황도 아닌 가짜 수사”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바오로 수도원은 물론이요 전 교회를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일생을 바쳤다. 덕분에 12-13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도원은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현재 바오로 성당 정면에 있는 모자이크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77)와 그 후 서방교회의 대분열을 겪으면서 바오로 수도원도 불가피하게 침체기를 맞는다. 마침내 교회 분열을 끝내고 교황이 된 마르띠노 5세(재위 1417- 1431)는 쇠약해진 바오로 수도원을 추기경 가브리엘레 콘둘메르(Gabriele Condulmer)에게 맡겨 돌보게 한다. 이분이 그 후 마르띠노 5세에 이어 교황 에우제니오 4세(재위 1431-1447)가 되면서, 파도바의 성 유스티나 수도원에서 시작한 베네딕도회 수도원 개혁 운동을 전 이탈리아에 전파시킨다.

그 개혁의 결과로 가시아노 연합회가 생겨나고, 바오로 수도원은 연합회 안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나중에 교황이 된 비오 7세(재위 1800-1823)도 원래 이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수사였으며, 바오로 수도원의 이 학교가 모체가 되어 훗날 교황 레오 13세(재위 1878-1903)가 아벤티노 언덕 위에 세우게 될 성 안셀모 대학이 탄생하게 된다.

재난을 겪으며 오히려 수도회 부흥

그러나 19세기 들어 바오로 수도원은 두 번의 큰 재난을 겪었다. 1823년 7월 15-16일 불의의 화재로 성당이 홀랑 다 타버렸고, 몇 십 년에 걸쳐 기껏 복구해놓자 1870년에는 수도원의 재산까지 포함해서 몽땅 다 정부에 빼앗겼다. 쫓겨나는 것만 겨우 면하여, 수사들이 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사실 19세기는 개신교의 전파, 나폴레옹의 탄압, 세속 정부의 탄압 등으로 수많은 수도원들이 폐쇄되고, 수도승생활의 전통이 거의 사라져가던 때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 바오로 수도원은 이때 오히려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을 전파하고 부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레고리오 성가로 유명한 솔렘 수도원의 창시자 프로스퍼 게랑제(Prosper Gueranger) 아빠스도 1837년 7월 26일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서원을 하였고, 보이론 연합회의 창설자 마우루스 볼터(Maurus Wolter)와 쁠라치두스 볼터(Placidus Wolter), 두 형제도 원래 바오로 수도원의 수사였다.

1887년에 오딜리아 연합회를 세운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가 보이론 수도원 소속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왜관 수도원도 간접적으로는 바오로 수도원과 연결이 되는 셈이다. 20세기 들어오면서, 바오로 수도원은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획을 선언한 곳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매년 성 바오로의 개종 축일인 1월 25일에 그리스도교 일치 주간이 바오로 대성당에서 장엄하게 열린다. 이곳의 수사들은 주로 고해성사 집전과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을 위한 일에 힘쓰고 있다.

최근 바오로 수도원은 유럽의 다른 수도원들처럼 성소 위기 때문에 존립이 위태로워졌다. 현재 베네딕도회 총연합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서, 국제 베네딕도회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왜관 수도원도 이에 협력하여 얼마 전까지 우리 수도원의 오도 아빠스를 이곳에 3년간 파견하여 공동체 건설을 도왔다. 그런 와중에 2005년 5월 30일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자의교서가 발표되어 바오로 수도원과 교황청 사이의 관계가 재정립되었다. 바오로 수도원과 대성당의 관리 책임은 전속 담당 추기경으로 넘어갔으며, 바오로 수도원은 수석 아빠스 직속으로 어느 연합회에도 속하지 않는, 평범한 아빠스좌 수도원이 되었다.

이로써 바오로 수도원은 1300년의 긴 여정 끝에 사도 바오로의 무덤을 지키며 기도하는 소박한 수도공동체라는 처음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전쟁과 화재, 경제력 상실과 영향력 감소, 끝으로 성소 위기까지 맞으며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 바오로 수도원, 새털처럼 가벼워진 지금 어쩌면 가장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하지 않는가?(2고린 12,9 참조)

<참고 자료>
http://www.vatican.va  
http://www.osb-international.info  
http://www.abbaziasanpaolo.net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 사진제공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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