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어느 초겨울. 프랑스 모원으로 간 동생 수녀로부터 온 그림엽서 한 장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내 가슴에 한 줄기 햇살 같은 희망을 누리게 해 주었다. 앞면에 아기를 업은 어린 소녀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가파른 돌밭 오솔길에서 작은 소녀를 만났었지
등에 아기를 업고 있었지
“얘야. 힘들지 않니?”내 안타까운 물음에
“아니요. 힘들지 않아요. 바로 내 동생인걸요. 내 동생 -! ”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용기 있는 그 대답은 내 가슴속에 새겨져

인간의 고통이 짓누를 때 모든 용기가 내게서 떠날 때
그 말을 생각해
무거운 짐이 아니라 바로 나의 형제야
무거운 짐이 아니라 바로 내 형제
내 형제 - !.

어학공부를 위해 빠리에 살고 있던 동생이 시내 횡단보도를 건널 때 『ACAT/아꺄뜨』 라고 하는 「고문방지단체」에서 나누어 주었던 홍보용 전단엽서를 내게 보낸 것이다. 엽서 맨 밑에 적힌 ‘아기 업은 소녀가 오빠처럼 여겨졌어’라는 한 마디가 오랜 동안, 아니 영원히 내 가슴에 위로로 남아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면서 짐으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일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당시 나는 삶이라는 무거운 짐-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가난과 대가족-에 짓눌려 힘들게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바로 내 형제’라는 이 희망의 메시지는 긴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문을 하지 말자’는 캠페인과 이 엽서에 담긴 내용이 무슨 연관이 있나를 생각하며 불어로 적힌 원문을 여러 차례 읽던 중,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느덧 노래가 되어버렸다. 불어로 된 노래악보를 만들고 불러보다가 내용이 너무 좋아서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을 담아 우리말로 번안가사도 만들어 보았다.


다음 날 오후 아홉 살 이삭이와 일곱 살 이슬이를 앉혀놓고 이 노래에 담긴 얘기를 들려주고 이어서 지난밤에 떠올라 만들었던 노래를 불러주었다. 조용히 그러나 조금은 심각하게 듣고 있는데 노래가 끝날 무렵에 건넌방에서 자고 있던 세 살 박이 늦동이 이랑이가 깨어서 울었다.

“이삭아 가서 동생 좀 데려 올래?”라고 했더니
“내 짐덩이를 데려와야지.”하면서 일어난다.

또 하나의 감동을 만나는 순간이다. ‘어린 아이가 이런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했던 아빠의 속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상쾌한 한 마디. 그래서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드워즈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을 것이다.

그 후로 이 노래를 통해 만난 감동의 순간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언젠가 유럽 초청공연이 끝난 후에 빠리로 가서 유학중인 후배신부들과 함께 남프랑스 여행을 갔었다. 떼제를 거쳐서 사흘만에 닿은 목적지 Sante Maries de la mer(샹떼 마리스 드 라 메르/바다의 마리아들)는 성모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도착하여 남은 여생을 살았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고 그것을 기념하는 아주 작고 오래된 성당도 있었다. 프랑스 최남단의 이 시골마을에 사는 소녀의 성인기념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는데 오래 전에 이혼하여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아빠까지 와서 축하해 주었다. 축가로 부른 이 노래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18 살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새 아빠에게서 낳은 어린 동생을 내 목에 얹고 다녔어요. 사람들이 ‘무겁지 않느냐?’고 물을 때 마다 ‘내 동생인데요. 뭘.’이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노래를 들으면서 그 생각 때문에 자꾸만 눈물이 났어요.” 

가끔씩 공연이나 피정 중에 이 노래를 부른 후에는 꼭 누군가의 새로운 감동을 만나게 된다. 노래를 듣던 중에,‘이혼을 해서라도 멀어지고 싶었던 시어머니께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만 났다는 며느리가 있었고, 교통사고로 죽은 오빠 내외의 남겨진 남매를 키우느라 자신이 이혼 당할 지경이 되었기에 어딘가에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노래를 듣고 나니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아이들을 끝까지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처한 상황이야 다르겠지만 누구나 삶의 짐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짐이라고 느낄 때마다 ‘동생이기 때문에 등에 업고 가파른 돌밭 길을 가도 무겁지 않았다’고 말하는 작은 소녀가 떠오를 수 있으면 좋겠다.


/김정식 2007-9-27

 김정식 사/곡  김정식 노래 <내가 만났던 작은 소녀>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