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돌밭 오솔길에서 작은 소녀를 만났었지
등에 아기를 업고 있었지
“얘야. 힘들지 않니?”내 안타까운 물음에
“아니요. 힘들지 않아요. 바로 내 동생인걸요. 내 동생 -! ”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용기 있는 그 대답은 내 가슴속에 새겨져
인간의 고통이 짓누를 때 모든 용기가 내게서 떠날 때
그 말을 생각해
무거운 짐이 아니라 바로 나의 형제야
무거운 짐이 아니라 바로 내 형제
내 형제 - !.
어학공부를 위해 빠리에 살고 있던 동생이 시내 횡단보도를 건널 때 『ACAT/아꺄뜨』 라고 하는 「고문방지단체」에서 나누어 주었던 홍보용 전단엽서를 내게 보낸 것이다. 엽서 맨 밑에 적힌 ‘아기 업은 소녀가 오빠처럼 여겨졌어’라는 한 마디가 오랜 동안, 아니 영원히 내 가슴에 위로로 남아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면서 짐으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일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당시 나는 삶이라는 무거운 짐-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가난과 대가족-에 짓눌려 힘들게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바로 내 형제’라는 이 희망의 메시지는 긴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문을 하지 말자’는 캠페인과 이 엽서에 담긴 내용이 무슨 연관이 있나를 생각하며 불어로 적힌 원문을 여러 차례 읽던 중,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느덧 노래가 되어버렸다. 불어로 된 노래악보를 만들고 불러보다가 내용이 너무 좋아서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을 담아 우리말로 번안가사도 만들어 보았다.
다음 날 오후 아홉 살 이삭이와 일곱 살 이슬이를 앉혀놓고 이 노래에 담긴 얘기를 들려주고 이어서 지난밤에 떠올라 만들었던 노래를 불러주었다. 조용히 그러나 조금은 심각하게 듣고 있는데 노래가 끝날 무렵에 건넌방에서 자고 있던 세 살 박이 늦동이 이랑이가 깨어서 울었다.
“이삭아 가서 동생 좀 데려 올래?”라고 했더니
“내 짐덩이를 데려와야지.”하면서 일어난다.
또 하나의 감동을 만나는 순간이다. ‘어린 아이가 이런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했던 아빠의 속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상쾌한 한 마디. 그래서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드워즈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을 것이다.
그 후로 이 노래를 통해 만난 감동의 순간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언젠가 유럽 초청공연이 끝난 후에 빠리로 가서 유학중인 후배신부들과 함께 남프랑스 여행을 갔었다. 떼제를 거쳐서 사흘만에 닿은 목적지 Sante Maries de la mer(샹떼 마리스 드 라 메르/바다의 마리아들)는 성모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도착하여 남은 여생을 살았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고 그것을 기념하는 아주 작고 오래된 성당도 있었다. 프랑스 최남단의 이 시골마을에 사는 소녀의 성인기념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는데 오래 전에 이혼하여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아빠까지 와서 축하해 주었다. 축가로 부른 이 노래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18 살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새 아빠에게서 낳은 어린 동생을 내 목에 얹고 다녔어요. 사람들이 ‘무겁지 않느냐?’고 물을 때 마다 ‘내 동생인데요. 뭘.’이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노래를 들으면서 그 생각 때문에 자꾸만 눈물이 났어요.”
가끔씩 공연이나 피정 중에 이 노래를 부른 후에는 꼭 누군가의 새로운 감동을 만나게 된다. 노래를 듣던 중에,‘이혼을 해서라도 멀어지고 싶었던 시어머니께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만 났다는 며느리가 있었고, 교통사고로 죽은 오빠 내외의 남겨진 남매를 키우느라 자신이 이혼 당할 지경이 되었기에 어딘가에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노래를 듣고 나니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아이들을 끝까지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처한 상황이야 다르겠지만 누구나 삶의 짐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짐이라고 느낄 때마다 ‘동생이기 때문에 등에 업고 가파른 돌밭 길을 가도 무겁지 않았다’고 말하는 작은 소녀가 떠오를 수 있으면 좋겠다.
/김정식 2007-9-27
김정식 사/곡 김정식 노래 <내가 만났던 작은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