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삶을 위한 짧은 단상

 

태풍이 지나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조용한 초가을 아침이다. 파아란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지난 달 노르웨이의 베르겐에 있는 그리그의 생가에 갔을 때 떠올랐던 노래가 생각나 고요하게 불러보았다.

오! 우러러 보아요.
하늘에 흰 구름이
잃어버린 노래의 음률처럼 또 다시 흘러가요.
기나긴 방랑 끝에
여행의 기쁨과 슬픔까지 한결같이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저 구름을 알 수 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햇님과 바다와 바람처럼
하얗고 정처없는 구름
그들은 나그네의 벗이며
천사요 자매들이니
오! 우러러 보아요.
하늘에 흰 구름이
잃어버린 노래의 음률처럼 또 다시 흘러가요.

어린 날 내가 문학을 사랑하도록 길잡이가 되어준 헷세의 <흰 구름>이라는 시를 번안하여 만든 이 노래는 앞으로 얼마간은 우리 집에서 유행될 예정이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여름 42일간의 유럽여행을 다녀온 우리 가족들은 저마다 얼굴이 평화롭고 여유롭다. 아마도 여행이 주는 기쁨이리라.

거실에 편안히 누워서 등교길을 서두르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도 행복이 묻어나고 있다. 『로제리오 식 휴식』인 셈이다. 바쁘게 움직이던 아이들도 잠깐이나마 아빠에게 다가와 각자의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가는데, 마당을 바라보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저것 봐. 감나무에 벌레가 많아서 큰 일이야. 감나무 뿐 만 아니라 마당 전체가 쐐기 투성이라니까. 봄에 옆집 아줌마가 ‘함께 살충제 뿌리자’고 했을 때 당신이 싫다고 안 했잖아. 올 가을엔 제대로 약을 쳐서 하나도 남김없이 뿌리를 뽑아야 되겠어.”

“안돼. 벌레나 곤충도 살아야지. 그 쐐기들을 먹으러 새들이 마당으로 날아오는 건데. 그 리고 벌레나 곤충이 살 수 없다면 사람도 살 수 없어.”

“그렇지만 집안이 온통 벌레들이잖아. 옆집 감나무로 넘어가지는 않는지 몰라. 우리가 약을 안치면 자기네 집으로 벌레가 넘어 온다고 했었잖아.”

늦게까지 남아있던 대학생 이삭이가 한 마디 거든다.


“인디언 추장『구르는 천둥』의 말씀을 못 들으신 모양인데요. 벌레나 곤충도 다 필요해서 있는 거랍니다.”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심하니까 사람이 힘들잖아.”
"자연을 받아들이세요."
“그래도 지저분해서 볼 수가 없어.”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지저분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구르는 천둥』이 뭐야?”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에 나오는 인디언 추장의 이름이예요.” 

여름여행 준비로 정신이 없는 가족들에게 나는 엄중히 경고했었다.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해. 여행을 하다보면 옷 입을 시간도 책 읽을 시간도 없어. 몇 년 전 로키 산에 갔을 때 충분히 경험했잖아. 짐을 끌고 다니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들 생각해 보시구 지금이라도 보따리를 풀어서 짐을 줄일 수 있는 한 줄여.”

그런데도 가족들은 그 경고를 가볍게 여겼는지 아니면 이 가장의 말을 안 듣기로 약속을 했는지, 최종 짐 검열에서 도저히 웃어 넘기지 못할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조용히 자연을 벗 삼아 다니는 일 외에 아무런 초청행사가 없다는 데도 무도회에서나 볼 수 있는 정장 드레스가 있는가 하면, 그걸 다릴 수 있는 대형 다리미까지 발견하고 나서 나는 아연실색을 했다.

다시 한 번‘여행에서 짐이 얼마나 피곤한 물건인가?를 상기시켜 주었는데도 별로 많이는 줄어든 것 같지 않은 짐들을 마지못해 끌고 가면서 이미 각오를 했었다. 그러나 첫 여행지인 스위스 루쩨른의 수도원에서 발견한 가족들의 짐들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해 주었다. 다섯이나 되는 가족이 저 마다 신발을 서너 켤레 혹은 대여섯 켤레를 가지고 있는데다, 아내가 매일 보던 신심서적 십 여권과 독서용으로 각자 몇 권씩 준비한 책들도 부족해서, 참고서와 문제집에 영한사전까지 가져 온 막내 이랑이의 짐은 정말이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런 짐을 안고서도 우리는 조금은 힘이 들겠지만 잊기로 합의하고 여행이 주는 기쁨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조금은 지루함을 느낄 때, 무겁게 가져온 책들은 우리에게 가장 반가운 벗이 되어주었다. 그 중에서도 온 가족이 감명 깊게 돌려 본 책은 시인 이해인 수녀가 아내에게 선물한 <에디의 천국(미치 엘봄)>이었고, <봉순이 언니(공지영)>를 비롯하여 <아주 오래된 농담(박완서)>과 <개미(베르나르 베르베르)>,그리고 언제 다시 읽어도 좋은 <정채봉>의 동화들과 <알퐁스 도데>의 단편들은 우리의 여행을 풍요롭게 해 주는 아름다운 벗들이었다. 분주한 대학생활 한 학기를 지내고 온 이삭은 자주 캠핑카 뒷 켠에 마련된 휴식공간에서 책을 읽다가 <아름다운 선물(마더 데레사/이해인 역)>이 될 만한 구절들을 짬짬이 나누어주었다. 그 중 자주 들었던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이웃을 두고서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죄악입니다.
오늘 그대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내일입니다.

/김정식 2007-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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