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김종필]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 DVD가 북한으로 갔습니다. 2011년 4월에 영국 상원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한 북한대표단에게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 DVD가 선물로 전달된 것입니다. 그 DVD를 전달한 영국의회 상원의원 알톤 경은 구수환 KBS PD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울지마 톤즈>를 통해 감명 받고 같은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바친 한 인물의 삶을 보고 감동받기를 희망했습니다. 힘으로 대결하는 것을 사랑의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바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울지마 톤즈>란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생각납니다. 2010년 1월 14일, 48세를 일기로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간 이태석 요한 신부(1962~2010)의 2주기가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8년간 인술(仁術)을 펼친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음악인으로서, 가톨릭 사제인 선교사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투신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톤즈 사람들로부터 ‘쫄리(John Lee) 신부’라고 불린 이태석 신부는 2008년 10월 본국 휴가 중에 대장암 말기인 것을 알게 됩니다. 투병생활 중에도 그는 자신의 몸보다는 톤즈를 사랑하고 걱정합니다. 톤즈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 2009년 봄에는 아프리카 이야기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라는 책을 펴냅니다.

이태석 신부의 병세가 깊어지자 지인들이 그의 마음을 헤아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2009년 12월 톤즈에서 창단한 '35인조 브라스 밴드'의 단원 중에 두 학생을 한국으로 데려옵니다. 일상에서 ‘존’과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불리는, 키가 훤칠한 스물넷의 죤 마엔 루벤과 키가 작은 스물다섯의 토마스 타반 아콧입니다. 톤즈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첫 번째 학생들을 보면서 이태석 신부는 고통스러운 중에도 무척 기뻐합니다. 존 마엔은 그때의 쫄리 신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이제 한국에 왔으니까 한국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하시면서 항상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마엔의 꿈은 의사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태석 신부를 보면서 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에게 “신부님은 톤즈 사람을 위해 태어나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물입니다”라고 편지에 쓰기도 했던 토마스 타반은 의공학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수단의 많은 사람들에게 인공 팔, 인공 다리, 인공 손을 만들어주고 싶어 합니다. 이태석 신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 때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사로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 신부가 달려옵니다. 그 신부는 이 신부에게 “형! 존 마엔과 토마스를 끝까지 책임질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약속합니다. 그 순간 이 신부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곧이어 의식을 잃고, 그 다음날 선종합니다.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

이태석 요한 신부는 1987년 인제대 의과 대학을 졸업한 후 군의관 시절에 신부가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전역 후 가톨릭 수도회의 하나인 살레시오회에 입회하고 사제성소의 길을 선택합니다. 처음에 어머니는 “신부는 안 된다”고 하셨답니다. 성장과정에 말썽 한번 부리지 않았던 의사인 아들이 신부가 되기 위해서 다시 신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도,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했을 때도 그 뜻만은 꺾을 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아들은 아들대로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 하면서, 어머니한테 효도도 못하고 다시 사제의 길로 가는 게 가슴이 아파서 막 울었다는 뒷얘기입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서품을 받게 된 이태석 요한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으로 갑니다. 그 당시 내전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곳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어 희망을 상실한 주민들에게 의술과 교육과 예술로 인간의 따뜻한 사랑을 베풉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 투병중이던 이태석 신부.

이태석 요한 신부 즉 닥터 존 리(John lee) 신부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동체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들에게 병의 진행을 막도록 약을 구해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한센인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극진했습니다. 나병으로 뭉그러진 발, 맨발로 다니는 그들의 발을 일일이 종이에 본을 떠서 각자에게 맞는 지구촌에 하나밖에 없는 가죽 신발을 케냐에 주문제작하여 신겼습니다.

어떤 분은 도움이 필요한 모두에게 항상 도움을 베푸는 이 신부님을 가리켜, “성경 책에서 읽었던 하느님과 같은 분입니다. 유일하게 우리한테 안식을 주러 찾아오는 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한센인들에게 응답하듯이 이태석 신부는 말합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이곳에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을 체험하게 한 것도 한센인들의 신비스런 힘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이태석 신부는 주민들과 함께 손수 벽돌을 찍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전기가 없는 톤즈에서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해 전기를 일으키고 냉장고를 돌렸습니다. 더운 날씨에 상하기 쉬운 백신을 보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신부는 주민들과 함께 학교도 지었습니다. 초·중·고에 해당하는 12년 과정의 정규학교를 세우고, 먼 곳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게 기숙사도 꾸몄습니다. 케냐에서 능력 있는 교사를 데려와서 교육하는 수준 있는 학교가 되게 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과 음악은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진심은 이랬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라고 독백처럼 말합니다. 이 신부는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아이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곳이 학교라고 믿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자립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학교를 이루고자 헌신했습니다.

2005년 1월 북수단과 남수단의 평화 협정이 체결된 다음에, 이태석 신부는 아무도 상상 못한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을 기획합니다.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음악적 재능을 살려서 꽃피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결성한 '35인조 브라스 밴드'에 대하여 “장기간의 전쟁으로 아이들의 마음은 상처받고 부서져 있었다. 음악을 가르치면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그 시작의 의미를 말합니다. 그런 이 신부의 바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훗날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은 “어른들의 총과 칼을 녹여서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울지마 톤즈>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 KBS 책임프로듀서 구수환 감독이 쓴 <울지마 톤즈, 그 후 선물>이란 책에는 이태석 요한 신부로 인하여 피어나고 있는 새로운 희망들이 축복의 선물로 담겨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또 한 명의 학생이 2010년 크리스마스 때에 한국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3명의 톤즈 학생들이 이 땅에서 제2의 이태석을 꿈꾸며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야서 60장 1절)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지구촌에 제2, 제3의 이태석 신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합장합니다.

 
보리 김종필 신부
(뽈리까르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장, 한국가톨릭문화연구소의 ‘聖母茶山茶會’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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