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착한 목자, 요한 23세Pope John XXIII, Angelo Giuseppe Roncalli (1881-1963)

   
교회의 어둠 속에서 빛을 던져주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한상봉 기자

 

그들이 나를 박해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내 이웃들이 나를 홀대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내 가족조차 나를 업신여기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2012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낡은 교회의 담을 헐고 먼지 쌓인 교회의 창틀을 닦고 그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다시 교회 안에 불어넣었던 공의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 역대 교황 가운데 유일한 농민출신이었다는 점은 더욱 신선합니다. 교도권이 앞장서고 세상의 모든 사제들과 신자들이 합심하여 새로운 세상과 교회를 열어나가는 행보야말로 가장 엄숙하면서 웅장한 선언일 테지요. 그런 주교를 가진 교회는 행복합니다.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과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온전히 육화의 신비를 그늘진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전할 테니까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한국교회에 소개했던 최초의 잡지는 김수환 추기경이 마산교구장 시절에 창간한 <사목>입니다. 이미 그 잡지조차 폐간된 상태에서, 이승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의 브랜드로 남아서 가죽만 팔리고 있는 형국을 가슴 아파 합니다. 아직까지도 김수환 추기경의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표이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기금을 마련하는데 교회는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신은 어디에서 계승되고 있을까, 잠시 생각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정말 가슴 아파하며 그분을 마음에 다시 새겨넣은 주교는 강우일 주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 주교는 고별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추기경님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하신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주교직에 오르고 추기경직에 오르시며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의 밑바닥에서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사셨습니다. 연세가 높아지신 다음에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요 모양 요 꼴”이라고 탄식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바보야!’라고 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인 사목적 배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교도권자인 주교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 안에서는 당연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이 뜻을 우리시대에 새기려는 듯이, 강우일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신 뒤로 더욱 '용감한' 분이 되셨습니다. 제주교구장으로서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뿐 아니라, 주교회의 의장으로 용산참사 유족들을 위로하고,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을 격려하고, 구제역으로 죽어간 짐승들을 위무하고, 핵발전소 건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분이었지요.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세상과 다른 가치를 살아야 함으로 보여준 것이지요. 

지난 수년 동안 행동뿐 아니라 사목자로서 신학적 숙고를 가장 치열하게 하신 분도 강우일 주교였습니다. 한국사회에 커다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현실판단과 신학적 숙고와 사목적 판단을 내리며 장문의 글을 교회 안팎에 전달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어느 신학자가, 심지어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 가운데 어느 신부가  그처럼 깊은 신학적 성찰을 하였습니까? 그분이 한손에 성경을, 다른 한손에 사회교리를 들고 하신 일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족하고 넘치는 '하느님의 자비'를 느낍니다. 안젤로 론칼리 요한 23세 교황의 모습을 그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12년 한국교회 화이팅! 입니다.

농부의 아들, 안젤로 론칼리

 

   
▲요한 23세.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교황 요한23세의 이름입니다. “나는 소토 일 몬테의 가난한 서민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교황 요한 23세는 말하곤 했습니다. 소토 일 몬테란 ‘산 밑’이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베르가모 부근의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골마을이지요. 그의 부모는 소작농이었는데, 교황 재임 시절 그는 이렇게 말했죠. “인생을 제대로 구기는 길이 셋 있는데 여자, 도박, 농사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따분한 일을 택하셨죠.” 아버지는 하루 온종일 흙을 파고 고르는 일에만 매달렸던 소박하고 선한 농부였으며, 안젤로도 힘껏 아버지를 도와드렸습니다. 포도도 따고 여물도 주고 무도 심고 밭에 거름도 내었죠.

 

그가 베르가모의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부쳐먹던 땅주인이 학비를 대주기로 약속했고, 어머니는 빈털터리로 소신학교에 가는 아들이 못내 안타까와 하루종일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2리라를 빌려다 눈물을 흘리며 안젤로의 책상 위에 놓았답니다. 그가 어른이 되어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신학교에 돌아왔을 때 교회 분위기는 근대주의에 대한 단죄로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기존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모든 사상을 교령과 회칙을 통해 단죄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시절 론칼리는 에르네스토 부오나이우티 교수와 같은 ‘주의를 요하는’ 인물과 친분을 맺기도 했지요. 로마 사피엔시아 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한 부오나이우티 교수는 1924년 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31년에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조직에 의해 교수직마저 박탈당한 명망있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론칼리는 그와 더불어 산책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훗날 고백했는데, 그 교수를 ‘에르네스토 신부’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1946년에 부오나이우티 교수는 자신을 파문한 교회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64세로 선종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르친 내용을 살펴보면 단호히 배격하거나 취소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고 유서에 썼습니다. 그때 일을 회상하며 론칼리는 “물론 그분의 시신을 강복해 준 사제도 없었고 묘지 자리를 내준 성당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론칼리는 1904년 로마의 포폴로 광장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타마리아 인 몬테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기차요금이 너무 비싸서인지 사제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답니다. 가난한 집안의 보잘 것 없는 사제 서품이었던 셈이죠.

 

   

 

근대주의 혐의가 유령처럼 따라붙은 사제

사제가 된 론칼리는 베르가모 교구의 교구장이었던 라디니-테데스키 주교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론칼리 신부는 주교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주교의 일정을 정하고 중요한 회의에 배석하면서 세심하고 과묵하게 주교를 도왔지요. 특히 주교의 열렬한 사회활동을 옆에서 도왔는데, 해외이주민과 여성노동자연맹의 사무실, 임산부를 돕는 ‘모성의 집’도 개설했습니다. 론칼리 신부는 노동조합과 형편없는 도시변두리의 주택사정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런 활동이 부유층의 비위를 건들려서 악의에 찬 투서가 로마에 들어가기도 했지요.

베르가모에서 가까운 라니카 제련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을 때,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교구신문을 통해 성금을 모으기 위해 나선 사람도 테데스키 주교와 론칼리 신부였죠. 그러자 우익 성향의 <페르세베란차> 신문은 “주교의 자선금은 파업에 대한 축성이며 공공연한 사회주의 문제에 대한 강복이다!”라며 비판했습니다. 론칼리 신부는 반박문을 교회신문에 게재했습니다. 그는 레오 13세 교황이 자신의 회칙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에서 노조활동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들이대며, ‘교회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교회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제가 예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당한 사람을 모른 체 그냥 지나갔다는 성서의 비유를 들어 “복음적 가르침의 빛을 받으며 사는 사제는 길 건너편에서 그냥 지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은 “권리를 박탈당한 힘없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에 주교와 본당 신부들은 ‘정의의 문제’를 위해 일해야 하며, 고통당하는 사람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비오 10세 교황이 주교의 처신에 대해 “문책하지 않겠다”는 서한을 보내오자, 라디니-테데스키 주교는 이 ‘은근한 경고장’에 대해서 심정이 상했습니다. “교황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근대주의 시비는 초기부터 론칼리를 따라다녔습니다. 비오 10세는 1907년 <근대주의자들의 신조>라는 회칙을 발표하여 신학계의 역사비평적 방법, 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 근대주의에 대한 옹호, 교도권에 대한 비판 등으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가차없이’ 교회 직무와 교수직을 박탈한다고 밝혔습니다. 1906년부터 론칼리 신부가 베르가모 신학교에서 교회사와 교부학과 호교론을 강의했으니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었지요. 다행히도 곧이어 교황이 된 사람이 라디니-테데스키 주교와 절친했던 베네딕토 15세라서 그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새 교황은 론칼리를 두둔하고 학자들을 감시하던 로마의 염탐제도를 폐지했죠.

로마의 변방, 발칸반도의 불청객, 론칼리 교황사절

그러나 베네딕토 교황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선종하였고, 그 뒤를 이은 비오 11세 교황 시절에 론칼리는 ‘근대주의’ 혐의로 라테란대학 교수직에서 밀려난 뒤에 줄곧 발칸반도에서 외교관으로 귀양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1925년, 신자가 6만명에 지나지 않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감목대리로 임명받은 론칼리 몬시뇰은 주교도 없는 불모의 땅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대주교가 되었지만 그가 하는 일이라곤 덜거덕거리는 노새마차를 타고 불가리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만나는 것이었지요. 산속에서 산적 때문에 도망간 적도 있고 군 순찰대에 연행되어 초소의 나무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도 있지요. 불가리아에 신학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지만 바티칸에서 응답이 없고, 동방전례를 행하는 가톨릭신자들에 대한 홀대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바티칸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주교직을 수행하면서 불만을 느낀 것은 불가리아 사람들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교회행정기관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인간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언짢습니다. 저마다 자리를 지키고 출세하려고 안달하면서 온통 그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성직생활을 이런 식으로 경멸하고 있으니...”

한편 불가리아 사람들에겐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그가 1935년에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사절로 임명되었을 때 고별강론에서 아일랜드 관습을 하나 소개합니다. 성탄절에 창가에 촛불을 켜두는 풍습이 있는데 거처를 찾아 헤매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거처가 있다고 알려주는 신호였지요. 론칼리 대주교는 약속합니다. “어디서든지 불가리아 사람이 제 집 앞을 지나가면 길눈이 어두운 분이라도 창문에 켜진 촛불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문을 두드리세요, 문을 두드리세요! 가톨릭 신자인지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겁니다. 불가리아에서 오신 형제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형제인 제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구인 제가 기쁜 마음으로 그날을 축제의 날로 지낼 것입니다.”

바티칸과 외교관계도 없고 무신론을 표방하는 터키와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하는 그리스에서 바티칸 외교사절은 불청객 같은 존재였지요. 그러나 론칼리 교황사절은 그리스도교가 탄압받는 상황에서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와 친교를 맺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사제들에게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럽게 직무를 수행하라고 당부했으며,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집전하던 모든 성사를 터키어로 집전했습니다. 당시 가톨릭 신부 중에 터키어로 자유롭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가톨릭교회가 외국세력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터키어로 미사를 봉헌하자 전통에 얽매어 있던 일부 가톨릭신자들은 자리를 박차고 성당 밖으로 나갔지만, 터키외무성은 이탈리아 사람인 론칼리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에는 이스탄불에서 행한 강론에서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르지 않고 ‘로마의 주교’라고 부름으로써 그리스정교회 대주교와 포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친구, 론칼리 교황사절

 

   
한편 무솔리니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이름)민족을 침략했을 때 바티칸은 침묵했고 많은 주교들이 국수주의 논조로 환영 입장을 표명했으나, 론칼리 교황사절은 파시즘의 등장을 비난하곤 했지요. 그는 어느 피정에서 “세상은 복음정신에 위배되는 건강하지 못한, 피와 인종의 민족주의로 중독되어 있다”고 하였으며, 전쟁은 당사자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안겨주는 “도살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는 동안에 각 나라에서 쫓기던 유대인들을 도와주면서, 바티칸에 “가톨릭교회가 박해받는 유대인을 돕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비로운 행동”이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바티칸의 반응은 냉담했죠. 그가 다시 바티칸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는 매일 이스라엘의 불쌍한 어린이들이 제 곁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예수님의 친척이며 고향사람입니다.” 당시 론칼리 교황사절이 유다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위조 세례증명서를 발행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가 로마의 가장 끝자락 발칸반도에서 20년 가까이 떠도는 동안에, 그는 바티칸에서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그의 근대주의 혐의도 베르가모에서 교구장 비서로 일하던 것도 까마득할 무렵, 1944년 전쟁 막바지에 비오 12세 교황은 느닷없이 63세의 론칼리 교황사절을 바티칸 외교의 가장 중요한 창구이며 교회의 맏딸인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발령했습니다. 그가 교회의 중심으로 옮겨오는 전환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방향으로도 불어옵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교황대사, 론칼리

나중에 교황이 된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그에게 ‘전쟁’은 그의 삶의 이력만큼 따라다니는 지상의 숙제였지요. 그가 로마의 변방을 떠돌다 교황대사로 승진한 곳은 ‘교회의 맏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직이었습니다. 하지만 1944년 12월, 그가 프랑스에 갔을 때는 망명정부에서 파리로 귀환한 프랑스 정부는 교회지도자들을 험상궂은 얼굴로 대했습니다.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독일점령군에 맞서 레지스탕스로 싸울 때, 대다수의 주교들은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것이지요, 드골 장군은 바티칸에 찾아가 비오 12세 교황에게 나치와 비시정권에 협력한 발레리 교황대사를 소환시키고, 나치에 협력한 30명의 주교들을 교구장직에서 해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어쩌지 못했지만, 금방 사태를 파악하고 서둘러 교체한 교황대사가 론칼리였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오점이 없고 유연하고 끈덕진 론칼리의 외교 덕분인지 결국 3명의 주교를 교체하고, 나치의 유다인 추방을 반대하던 살리에쥐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사태가 누그러졌습니다. 프랑스에선 철학자 자크 마리탱을 바티칸 주재 프랑스대사로 임명하여 서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답니다.

론칼리 교황대사는 당시 샤르트르 부근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독일군 전쟁포로들도 격식 없이 보살펴 주었습니다. 당시 포로였던 한 독일군 병사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탈리아 사람답게 날렵하면서도 땅딸한 그 양반은 어딘지 모르게 믿음이 가고, 성격이 유쾌하고 익살스러우면서 정이 있고, 또 자비로운 모습이었죠. 그분은 자신을 낮추어 친근하게 대해 주었는데, 우리가 가까이 하기 힘든 고행자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한군데 매달리면서도 묘하게 무언가 갈망하는 듯한 그런 분이었죠.” 론칼리는 프랑스 주교들과 힘을 합쳐 포로수감 기간을 단축시켜 26만 독일군 전쟁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가 그에겐 자비로운 사목의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프랑스 교황대사로서 귀족들과 정치인들과 학자들을 접견하면서 상류사회에 적응해야 했는데, 때로는 짓궂은 신사들도 있어서 그의 뚱뚱한 체구를 조롱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무례하게 여자 누드 사진을 불쑥 눈앞에 내밀기도 했지만 유머로 넘어가곤 했지요. 론칼리는 히죽히죽 웃는 그 남자에게 사진을 돌려주며 이렇게 물었답니다. “사모님이신가 보죠?”

그러나 론카리는 중세풍의 대사관저에 살면서도 여전히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길거리 산책을 즐기는 바람에 비오 12세로부터 교황대사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농부출신이던 론칼리는 남의 이목을 그리 괘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 어떤 일로도 나는 자제력을 잃지 않는단다. 나는 농장에서 우리가 소박하게 살았던 일을 생각하지. 그리고 온화하고 겸손하게 직무를 수행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기쁘단다.”하고 조카딸에게 편지를 썼지요.

가난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열린 사목

론칼리의 사목자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은 1953년에 베네치아 교구의 대주교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사제가 된 이후로 7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신학교 학장과 주교, 교황청 관리 등 윗사람 밑에서 고생을 했지만, 이제 처음으로 자신이 책임지는 교구를 갖게 된 것입니다. 론칼리 대주교의 취임 인사말은 그의 삶을 요약해 줍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렵지만 부족함을 모르는 축복받은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 가난은 물질적 욕구가 없는 지극히 고결한 덕목을 쌓게 하며, 삶의 고공비행을 준비해 주는 그런 가난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저는 다른 종교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현재 당면한 사회문제를 알게 되었고,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과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앙과 도덕의 확고한 원칙을 굳게 지키며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서로 일치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살면서 경험해야 했던 아픔과 고난조차 자기를 더 잘 가르치려는 주님의 배려라고 여겼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론칼리 대주교의 열린 태도에 감격했는데, 누구나 사전에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고도, 의전 절차를 밟지 않고도 주교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교관도 수수하게 꾸미고,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자가용 모터보트가 아니라 곤도라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승객들과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건넸지요. “자, 자. 이리들 와서 앉으세요. 여러분이나 저와 같은 요금을 내고 탔잖아요.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론칼리 대주교는 성 마르코 광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 앉아 비노비앙코 한 잔을 하든지 카날레 그란데 부둣가에 있는 계단에 걸터앉아 곤돌라 사공들과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대주교에 취임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마르게라의 공장에 찾아가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였고, 그 이듬해 부활절에는 공단 항구에 있는 아지프 사의 노동자들과 미사를 드렸죠. 론칼리 대주교는 힘든 노동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습니다.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때로 밤 10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거나 지역을 돌아보았는데, 베네치아 교구장으로 있던 5년 동안 공단지역에 무려 30개의 본당을 세웠습니다. 1957년에는 교구 시노드를 개최하였는데, 개막식에서 론칼리 대주교는 ‘정신적 부권(父權)’이라는 주제 연설을 통해 “권위적인 태도가 삶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면서 “권위적인 태도는 냉혹함과 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배려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우습게 만듭니다. 가부장적 태도는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미성숙하게 만들죠... 그런 태도는 아랫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못하게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명령하는 권력을 마다하고 성령에 의존하여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다만 착한 목자가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1958년에 교황이 된 것입니다. 그동안 엄격하고 강력하게 통치하던 비오12세 교황이 선종하자, 교황선거를 앞둔 추기경들은 의견차이로 갈등이 많은 교회 안에 숨통을 열어줄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매사를 손수 챙겼던 비오 교황이 추기경을 거의 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기경단이 노령화되어 전체 추기경 51명 중에 24명이 만 76세의 론칼리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론칼리를 오히려 튼튼한 젊은이라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지요. 론칼리 대주교가 교황이 되자, 이름을 ‘요한 23세’라 지었습니다. 요한은 론칼리에게 의미심장한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도 요한처럼 사랑받는 이가 되었고, 세례자 요한처럼 예언자의 사명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즉위식 강론에서 “교황이 국가수반이자 외교관, 학자이자 조직가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저 “착한 목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요한 23세 이후로 교황을 황제로 만드는 격식들이 점차 폐지되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황 삼층관을 즉위식 때 사용했으나 얼마 후 매각하여 그 돈으로 사회구호사업을 지원했고, 요한 바오로 1세는 교황즉위식마저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 23세는 롬바르디아 농민 출신답게 사람을 철석같이 믿는 편이어서, 예방조치를 취하거나 주변에 보호막을 치지 않았습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사도좌에 대한 너무 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든 일을 직접 결정하였으나, 요한 23세는 그 일을 다른 주교들과 나누었습니다. 즉위한 직후에 새로 23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리낌없이 중요한 직무를 맡겼습니다. 자기 생각을 교회법으로 만들지 않고, ‘성좌선언(Ex cathedra)'이란 말을 결코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교황을 알현할 때 무릎을 세 번 굽혀 절하는 규정을 없애고, 자신을 “선택받으신 성부”나 “숭고한 입술의 선택받으신 이여”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당부했습니다. 그는 바티칸에서도 수행원 없이 혼자 돌아다니며 일꾼이나 정원사들과 즐겨 이야기를 나누었고, 혼자 다니다 교황청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요. 불쑥 바티칸목공소에 들러 목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기도 하고, 근위대 등 직원들의 봉급을 가족수에 따라 올려주고 자녀들에겐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박사 학위를 가진 교황청 장관들은 자녀 많은 교황청 수위가 자신들보다 봉급이 많다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죠. 그런가 하면 교황청 관리들이 이런 과다지출로 사회구호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자, “그렇다면 우리는 자선행위를 줄여야 합니다. 정의가 자선보다 먼저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잘라 말했습니다.

사목자가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품과 상관없이 교황의 경우엔 더욱 복잡합니다. 그래서 그는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들고 간단한 것은 복잡하게 하지 마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일기장에 자주 이렇게 적었습니다. “안젤로야, 너를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이 그를 자유롭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준비된 원고 없이 거리에서 본당에서 병원에서 교도소에서 즉석 강론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곤 이전 교황들처럼 교황청에 갇혀 지내지 않고 성지순례도 다니고, 성탄절엔 로마의 밤비노 예수 아동병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만났으며, 다음날엔 레지나 첼리 감옥으로 죄수들을 찾아가 교황모를 벗어들고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러분들이 내게 올 수 없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그는 착한 목자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

 

낡은 바티칸에 찾아든 요한의 봄

요한23 교황은 현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기로 작심했습니다. 전임 교황이었던 비오 12세는 온 이탈리아에 엄명을 내려, 사제들은 고백소에서는 모든 고해자에게 공산당에 가담했는지 물어야 했지요. 그렇다면 대답하면 사죄(赦罪)를 거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1963년에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도 밝혔듯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 이데올로기가 오류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오류를 범한 인간 또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흠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행동을 취했지요. 모스크바로 갈 예정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코글리아티(P. Togliatti)에게 사람을 보내어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권하여 교황인 자기에게 80세 생일축전을 보내게 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부탁은 즉시 이루어졌고, 앙숙이던 바티칸과 소련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세계는 깜짝 놀랐습니다. 2년 후에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옥타비아니 추기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흐루시초프의 사위인 아주베이를 그의 부인과 함께 접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교황이 된지 3개월 만인 1959년 1월 25일에 상파울루 수도원에 모인 추기경들 앞에서 공의회 소집을 공고한 것입니다. 이는 1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린 지 100년 만에 열리는 공의회였지요. “현 시점에서 하느님의 백성의 필요에 응답해서 세계 공의회 개최를 공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공의회는 갈라져 나간 공동체들과 일치를 모색하는 공의회여야 합니다.” 교황은 이 소집 결정이 “성령의 갑작스러운 이끄심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현대화, 쇄신)로 이끌려는 교황의 뜻을 그대로 관철시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수구적이며 제도적 권력을 누리던 교황청 관리들은 냉랭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요한 23세가 노망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자 교황은 꾀를 내어 국무성 장관에게 공의회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기고, 다른 추기경들에게는 한 사람이 다른 열 개의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도록 했습니다. 이른바 ‘로마학파’들에게 문서초안을 작성하게 한 것이지요. 이들은 예전과 나름없는 보수적인 내용을 담은 문서를 작성해 일사천리로 통과시킬 요량으로 공의회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요한 23세는 로마이 주교로서, 공의회에 앞서 한 차례 로마 주교회의(Synod)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교황청 당직자들이 제출한 문서는 옛법규를 새삼 다시 인준하자는 것이었지요. 성직자는 반드시 수단을 입을 것, 공산주의에 대한 신랄한 경고, 영화관이나 해수욕장 출입금지 등 조금도 봄날의 산들바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라틴어로만 드리던 미사를 모국어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오자, 교황청 관리들은 즉시 교황으로 하여금 라틴어가 교회의 공식언어가 되어야 하며, 온 세계의 신학강의도 라틴어로 계속 해야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휴지쪽이 되어버릴 이 문서에 서명하며, 교황은 웃음을 지엇습니다. 교황은 “이제 공의회가 시작되었으니 일은 이미 착수된 것이고 잘 되어 갈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세상에 열린 교회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요한 23세는 정작 공의회를 앞두고 발효한 소집서한에서 “이번 공의회는 교리나 교회법을 다루지 않고 먼저 세계의 문제와 교회를 바라보되, 시대의 징표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교리논쟁이 아니라 사목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지요.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식에서 교황은 “교회의 가르침이란 박물관의 보물처럼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이제 교회는 교사로서 가르치고 단죄하기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갖고 어머니다운 모습을 가져야 하며, 이제 모든 신자가 일치하고, 다른 모든 교회와 일치하고, 모든 종교와 일치하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설문은 그리스도인 일치사무국의 베아 추기경과 수에넨스 추기경, 몬티니 추기경 등이 초고를 마련한 것이지만, 결국 교황의 메시지였습니다.

 

공의회는 성령의 바람에 이끌려 갔습니다. 공의회는 언제나 회기를 시작할 때마다 세비야의 주교학자 성 이시도로가 지은 다음 기도문을 바쳤습니다.

오! 성령이시여.
당신의 이름으로 특별히 결합되어 모인 우리에게 오사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 행동의 인도자가 되사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시고, 해야 할 바를 일러 주소서.
당신의 도우심을 입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당신 뜻에 들게 하소서.
우리 머리를 당신의 영감으로 채우사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바로 잡아 주소서.
당신은 홀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빛나는 이름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끝없이 정의로우신 분이시니,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지로 말미암아 악으로 기울지 말게 하시고,
아첨으로 인하여 동요되지 말게 하시고,
물욕에 더럽혀지지 말게 하소서.
우리 마음을 강한 힘과 은총으로 당신과 하나 되게 하사
무슨 일을 하든 진리에서 벗어나지 말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결합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자비와 정의를 따라 판단함으로써
오늘도 우리의 행동이 당신 뜻에 맞갖게 하사
영원히 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공의회가 개막되자 참석한 주교들은 충원되어야 할 위원들을 교황청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선임했으며, 교황청 관리들이 미리 작성한 문서를 보류시켰습니다. 2천5백 명의 주교들은 다시 위원회를 조직해 회기마다 모여서 토론하고 의안을 수정하였으며, 수백 명의 신학자, 서기, 번역가들이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의제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사목대안을 연구했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몹시 피로했지요. 그래서 베드로 대성당의 회의장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그 전날에 서거한 주교의 이름이 불리어지고, 모두 일어나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공의회 기간에 서거한 주교의 수는 253명이나 된답니다.

그중에는 요한 23세 교황도 끼어 있습니다. 공의회에서 주교들이 어떤 특권과 권력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인류에게 봉사하는 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헌신하는 동안, 1963년 요한 23세 교황이 선종하고, 그의 오랜 친구였던 몬티니 추기경이 ‘바오로 6세’ 교황이 되어 1965년 마지막 회기까지 공의회를 이어갔습니다. 이 공의회는 제3세계에서 온 주교들에겐 중요한 학습장이 되었고, 유럽 주교들에겐 케케묵은 관습과 교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장소였습니다. 로마와 교황 중심의 권력은 지역교회와 주교에게 나누어지고, 평신도들은 동등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사목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봉사하는 존재가 되길 갈망하고, 그들의 번뇌와 슬픔, 기쁨과 희망을 나눌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것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한상봉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