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10월 26일자 991호 <평화신문>과 2620호 <가톨릭신문>이다.

‣ 비판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을 추진하는데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 역시 당연히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육이란 제도가 있는 것이며 그 제도 또한 시대변천과 함께 거듭하여 변신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나 제도 및 사람의 올바른 ‘공동선’을 위한 여정에는 그래서 때때로 충고와 비판이 성숙을 위한 회초리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판 없이 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왕정의 엄격함에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사간원과 유생들의 곧음을 생각하여보라. “옳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혹은 “이의 없습니다”만을 반복되는 곳은 결코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오류가 없다는 무류권은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현대사회의 여러 구성원 중에 ‘공동선’을 위한 비판을 당당하게 하는 구성원이 바로 교사와 언론인 것이다. 학생의 성장과정을 보고 교사의 바른 이끎이 필요하듯이 언론이 수행하는 자기본분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특별히 교계언론은 대 사회적인 수행 못지않게 교회내부의 징표에 대하여 누구보다 밝은 눈이 필요하며 스스로 그런 예언자적인 직분을 절감해야 한다. 비판은 쉬운 일이 아니며 소명이어야 한다. 애정과 함께 용기가 없이는 결코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소명이 언론인의 긍지이며 일용한 양식이다. 구약시대에는 그런 역할이 맡겨지자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라던 예레미야의 겸양이 있었지만 현대에는 언론고시를 통해서 서로 “내가 더 잘합니다”라고 경쟁해서 얻은 당당한 언론인들의 위치 아닌가?
 

평화신문 1면

‣ ‘성경’이 하느님 말씀이지, ‘성경번역’이 하느님 말씀이 아니다.

주교회의는 지난 10월 13~16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가을 정기총회를 열고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주교회의는 전례위원회와 성서위원회가 제출한 ‘전례 시편’(안)을 승인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전례서와 각종 예식서가 출판될 전망이다. 쉬운 말로 하자면 새 성경은 성경대로 있으되 미사를 비롯한 전례 때 사용하는 시편은 별도로 번역하여 출판한다는 말이다. 주교회의 소식을 <평화신문>은 1면과 2‧ 9면 및 사설에 언급하였으며, <가톨릭신문>은 1면과 7면에 보도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1977년 이후 사용하였던 <공동번역 성서>를 현재는 천주교회 단독번역 <성경>으로 2005년 11월 27일 대림1주일부터 사용하고 있다. 그에 앞서 주교회의는 2005년 가을 정기총회 첫날 <성경> 출판 기념회를 개최하였다. 새 성경 완역을 위한 17년간의 시간만큼이나 성경의 번역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논란도 있었고 분도출판사와 주교회의 간의 논쟁도 있었다. 그 때 교계신문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었나? 논란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물론 새 성경의 결함마저도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현재 ‘번역 상 매끄럽지 못한 어휘’등의 이유로 전례용으로 새로 번역을 마치고 출판을 앞둔 <시편>은 1988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가톨릭 구약성서 번역 사업을 결정한 후 1992년 6월 <구약성서 새 번역 1 - 시편>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한국천주교회 기념비적인 성서이자 ‘작품’이다. 문제가 있으면 개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서두에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문제제기 없이 지내다가 이제 와서 주교회의가 결정을 내리자 “전례 시편의 승인은 새 번역 <성경>에 따른 시편이 시 고유의 맛을 내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마련한 것으로, 이제 미사 화답송을 비롯한 각종 기도문에 훨씬 맛깔스러운 시편을 노래 할 수 있게 됐다.”(<평화신문> 사설)는 말이나 “주교회의가 활발하고 올바른 전례 활동을 돕는데 적극 나섰다.”(<가톨릭신문> 1면)는 말은 낯간지러움이 있다. 그런 말을 누군들 못하겠는가? 어찌 주교회의가 결정하는 일마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인가?

이번 결정만 하더라도 몇 가지 의문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번에 결정된 ‘전례 시편’이 성직자‧ 수도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는 성무일도에는 적용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시편’을 가장 ‘시편’ 답게 사용하는 전례서가 성무일도일 텐데 왜 그곳에는 적용을 안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새 번역이 선보인 것은 1992년부터이지만 교우들이 미사에서 사용한 것은 불과 만 3년에 불과한 <성경>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현재의 성경 번역을 교계신문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야기를 했지만 ‘공동선’을 위한 비판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소명이어야 한다.

새 성경 번역의 목표를 “첫째는 가능한 한 성서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둘째는 교회 공용으로 쓸 수 있는 번역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사목> 2005년 2월호: 새 번역의 원칙과 과정) 그러나 두 마리 토끼는 늘 욕심에 그치기 십상이다. 교우들은 현재의 성직자-수도자를 결코 ‘고자’라고 부르지 않지만 <성경>은 그렇게 번역했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마태 19,12) <공동번역 성서>은 그들을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라 번역했다. 멀쩡한 사람 ‘고자’로 만들지 마라. 

/김유철  200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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