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수도원 기행-10]

2007년 6월, 로마에서의 첫 두 학기를 연거푸 보내고 처음으로 방학을 맞이하였다. 독일로 가서 석 달 동안 지내며 독일어를 익힐까 생각하다가, 이탈리아어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계획을 변경하여 방학을 지낼 이탈리아 수도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우리 수도원의 유학 형제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했던 이탈리아 북부의 쁘랄리아 수도원(Abbazia di Praglia)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이어 이탈리아 중부의 높은 산에 위치한 까말돌리 수도원(Monastero di Camaldoli)에서 8,9월을 지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1일, 한 달 동안 정들었던 쁘랄리아 수도원을 떠나 깊은 산 속에 위치한 까말돌리 수도원을 찾아 떠났다. 먼저 기차를 타고 아레쪼(Arezzo)라는 곳으로 갔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를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고, 도레미파로 시작하는 음계명과 악보 표기법을 최초로 고안한 수도자 귀도(Guido d'Arezzo)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매년 ‘세계 다성음악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아레쪼 역은 생각보다 컸다. 그곳에서 다시 서너 칸짜리 미니 기차로 바꿔 타고 50분 정도 걸려 빕비에나(Bibbiena)라는 작은 시골 역에 도착했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진 곳이었다. 역 안에서 버스표를 사면서 까말돌리 수도원에 간다고 하니까 버스 시간을 알려 주었다. 이곳은 프란치스꼬 성인이 오상을 받은 라 베르나(La Verna)와도 가까운 곳이라서 그곳으로 가는 순례자들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몇몇 작은 동네들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산 속 꼬부랑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산길을 한 구비씩 돌 때마다 산 위쪽으로 쑥쑥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역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주위는 참 아름다웠다. 역에서 떠난 지 30분 정도 되자 버스는 까말돌리 수도원 앞에 멈춰 섰다.

▲ 개인 은수처 정원.

로무알도 성인과 은수처

이곳은 해발 800미터가 넘는다. 해발 1100미터에 다른 까말돌리 공동체가 있는데, 로무알도 성인이 처음으로 은수처를 만들고 사셨던 사끄로 에레모Sacro Eremo라 불리는 곳이다. 여름철에는 방문객들이 많기 때문에 사끄로 에레모까지 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내가 처음 까말돌리 수도원에 메일을 보냈을 때 손님 담당이었던 에밀리오 수사는, 8월에는 아랫쪽 공동체에서 지내고, 9월에는 위쪽 은수처에서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다시 해볼 수 없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즉시 답장을 했었다.

까말돌리 수도원은 라벤나(Ravenna) 출신의 성 로무알도(S.Romualdo. 951-953년경 출생, 1027년경 귀천)에 의해서 설립된 수도원이다. 이곳 수도자들과 이야기 하던 중, 우리 수도원이 2009년에 100주년을 맞이한다고 하니까, 자신들은 곧 1000주년을 맞이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성인에 대해서는 베드로 다미아노가 적은 <성 로무알도의 생애>(1042년 저술)를 통해 알 수 있다.

로무알도 성인은 여러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는데, 아레쪼 인근의 까말돌리 수도원은 성인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설립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까말돌리 수도원의 특징은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면서도 은수적 고독과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도 사크로 에레모에는 로무알도 성인의 은수처가 남아 있다. 그리고 다른 은수처들도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수도자들의 개인 은수처(cella)들은 모두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도자들이 손노동을 할 수 있는 정원 혹은 텃밭이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가 있고 한번 꺾이면서 거실이 나타난다. 복도에는 바깥쪽으로 화장실과 장작을 쌓아두는 창고가 연결되어 있다. 외부 벽과 거실 사이에 있는 복도와 창고는 추위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배치했다고 한다.

거실에는 벽난로와 쇠로 만든 난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다 보니 한 여름에도 장작불을 피우고 지내야 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행여 불이라도 꺼뜨리는 날에는 금방 추위가 엄습했다. 거실에는 기도실, 공부방, 침실이 연결되어 있다.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고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곳. 세상의 소리나 소식은 봉쇄구역 앞에서 멈출 듯한 곳, 바로 그곳이 까말돌리 수도자들의 은수처였다.

이탈리아어에 적합하게 토착화된 그레고리안성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전에는 기도와 미사도 각자의 은수처에서 혼자서 드렸다. 집집마다 담벼락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 문을 통해서 식사를 넣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전례와 미사, 식사를 공동으로 한다. 공의회 이후에 모든 수도회들이 쇄신과 적응의 시기를 보낸 것처럼 까말돌리 수도회도 변화의 시간을 겪었다.

위에서 말한 생활양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도복을 간소화하고 기도 때에만 망토와 같은 수도복을 착용하였다. 기도도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유 선법이 아닌, 이탈리아어에 적합한 멜로디로 노래했다. 이러한 토착화를 위해 몇 십 년 동안 준비했다고 기도서 서문에 적혀 있었다. 이 대목에서 좀 생각이 많아졌다. 라틴어와 그렇게 가까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랫동안 토착화 작업을 하는데, 한국에서의 토착화 작업이란…….

까말돌리 수도회도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따르는 이상 손님 환대의 정신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개인 피정과 단체 피정, 젊은이들을 위한 피정의 집이 있어서 여름철 동안 늘 사람들로 붐비었다. 가톨릭 학생회 소속의 대학생들은 50년이 넘게 매 여름마다 두 주씩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것이 끝나면 휴가 온 가족들을 위한 두 차례의 피정이 열리는데 이것도 벌써 몇 십 년이 되었단다. 이 행사 후에는 까말돌리회 회원들이 빠도바의 산타 쥬스티나 수도원의 전례사목연구소와 함께 학술 모임을 여는데 공의회 이후 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전례개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 밖에도 많은 모임들이 정기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친 이들이 평안하게 밤나무 길을 산책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산 속에 깊숙이 있는 수도원은 신자들에게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고, 영적으로도 충전할 수 있는 공간, 언제든 찾아가면 반가이 맞아 주는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수도자 공간은 손님 공간과 잘 구분이 되어 있어서, 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까말돌리 수도원들 중에는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몬테꼬로나(Montecorona) 계열의 수도원들도 있다. 산의 맑은 정기를 머금고 있는 수도자들과 생활하다보면 많은 것들이 단순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 분 한 분에게서 느꼈던 인간미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금 떠오른다. 또 다시 여름. 높은 산의 긴 겨울과 짧은 봄이 지나고 또 다시 그 향기에 이끌린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오리라. 지난 천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참고할 만한 누리집
http://www.camaldoli.it  까말돌리 수도원 소개(이탈리아)
http://www.camaldolese.org  몬테꼬로나 까말돌리 수도원 소개(미국)
http://osb.or.kr  수도승 영성 자료실- '성 로무알도와 까말돌리회 영성'
http://blasio.tistory.com  이 글에 다 싣지 못한 내용과 사진들을 실을 예정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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