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10월 12일자 989호 <평화신문>과 2618호 <가톨릭신문>이다.


▶ 노동사목 50년이 비정규직에는 꼼짝 못한다.

한국천주교회가 예수정신에 입각한 노동사목의 계기가 된 가톨릭노동청년회(이하 가노청)가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서울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지난 10월 5일 서울 보문동의 노동사목회관에서 노동사목 50주년 미사와 세미나를 열었다. 이 내용을 <가톨릭신문>은 10월 12일자 20면 전면에 걸쳐 관련기사를 작성하였고, <평화신문>은 20면 4단 박스로 다루었다.

가노청이 1958년 태동된 이후 걸어온 가시밭길은 노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거간의 사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이란 단어에는 엄연히 레드콤플레스가 적용되고 있으며, 이번 주 전면을 할애하여 한국노동사목 50주년을 전한 <가톨릭신문>을 포함한 교계신문은 지난 5월 1일 노동절 관련 기사에서는 노동과 노동자의 현실을 심도 있게 반영하지 못했다. (<가톨릭신문> 2596호와 <평화신문 967호>를 참조하시라.)

노무현 정부기간이었던 2006년 7월부터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은 비정규직 고용남용을 방지하고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다. 그러나 법안이 공포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법안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더 불리한 법안으로 교묘히 실천(?)되고 있다. 역시 예수의 말씀처럼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가 16,8)는 것이 사실이다. 이후 모두가 아는 대로 이랜드‧ 기륭전자를 비롯한 곳곳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우성 아니 비명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결국은 교회가 운영하는 강남성모병원까지 그 혼란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그 와중에 한국천주교회는 노동사목 50년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신문 20면


▶ 가톨릭노동청년회와 비정규직은 다른 말일까?

신문의 보도를 인용하면 미사를 집전했던 김운회주교는 이날 강론에서 “한국교회가 노동사목에 일찍 눈을 떴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고 했으며 “당시 가노청이 인간적 대접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피난처였다. 노동자들이 위로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기사를 보면 볼수록 가노청이 걸어왔던 가시발길을 이제는 비정규직이라는 신종 신분계급이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노청이 인간적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당시 노동자들의 피난처였다면, 그리고 좋던 싫던 가노청을 품어주었던 것이 교회의 품이었다면,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난처는 어디이며, 교회의 품은 어디로 간 것인지 교계신문은 찾아서 보도해야 할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지난 2월 발표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라는 성명서에서 예언한(!) ‘한국천주교회의 고용관행’을 왜 교회가 스스로 바꾸고 있지 않는지 교회의 눈, 아니 예수의 입으로 교계신문은 보도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언론 정책과 인사전횡으로 같은 언론기관인 <YTN> 언론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해직되는 불행을 교계신문 관계자들도 목격하고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소모품적인 대접은 결코 오래지 않아 이른바 정규직에게도 코앞의 현실이 될 것이다. 교계신문의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시각이 사전류의 자구적 해석이나 헌장류의 해설에 머물지 않고 현장의 아픔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도구가 되길 바란다. 노동사목 50년인 교회가 비정규직 문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란 것이 코미디 아닌가? 매번 지적하는 것이지만 과거의 ‘정의’를 이야기 하지 말고 오늘의 ‘정의’를 이야기 하라. 교계신문은 ‘오늘’ 보는 것이다.

/김유철 200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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