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도서관 나들]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 남짓 이어지는 대림절은 매일 역사의 어둠 속에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새롭게 느끼면서 예수처럼 후천개벽을 꿈꾸는 절기인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다시 재림하실 구세주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절기인가?

위기의 세상에서, 우리에게 대림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1%가 99%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세상, 자본과 제국의 지배 아래 전혀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오늘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을 만큼 악마가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대림절기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김진숙 위원이나 안철수 교수처럼) 자기 비움을 통해 우리의 현실로 만들어나가려고 다짐하는 절기인가, 아니면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희망과 운명을 다시 내맡기는 절기인가?

하루 평균 마흔 세 명이 자살하는 생지옥과 같은 나라에서,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6백만 명인 나라에서, 북녘의 아이들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인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북한에 식량 원조는 중단한 반면에 미국의 무기 구입에 매년 수십 조원씩 쏟아 붓는 나라에서, 전시작전권은 미국이 돌려주겠다고 해도 마다하면서 중국의 코앞에 미군 핵잠수함 기지를 건설하는 나라에서, 또한 새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더 이상 친일파 청산 노력과 광주학살과 6월 항쟁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역사청산과 후천개벽은 세례 요한이 가르친 것처럼 하느님의 강권적이며 초자연적인 개입(미륵하생)을 통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한 분 하느님"(신명기 6,4)의 대자대비와 "아빠"라고 부를 만큼 친근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서로 사랑과 나눔과 섬김을 통해 만들어나가야 할 나라(미륵상생)인가?

대림절기는 산모 하느님(에카르트)의 비통한 눈물과 거룩한 분노를 헤아리며 예수처럼 현실을 박차고 일어서는 절기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는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다시 단단하게 붙잡는 절기인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외아들로 높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애당초 그분은 우리와 DNA가 다른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죄인들은 그분이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시는 좁은 십자가의 길, 자기 비움의 길을 따라갈 엄두조차 낼 수 없다는 우리의 핑계를 정당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온몸으로 살아낸 하느님의 마음과 뜻에 우리 마음과 생각과 생활의 초점을 맞추는 수행으로서의 찬양과 경배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질문들을 묻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복합적인 위기들, 즉 국제금융위기와 재정위기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에너지위기, 기후위기, 식량위기, 그리고 대멸종 위기는 예수와 바오로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위기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아무리 막강하고 잔인했다 하더라도 예수와 바오로 당시에는 하느님께서 예비하시는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견딜 수 있었다. 세례 요한조차도 하느님의 강권적인 심판 이후의 세상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후대전"으로 인한 인류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자기파멸까지도 예상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이다.

더군다나 최근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5년뿐이며, 2017년 이후에는 온실가스 농도를 450ppm 이하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한겨레, 2011/11/11). 이것은 현재의 온실가스 방출 추세로 볼 때, 지구 평균기온이 2040년경에는 섭씨 2도가 상승할 것이며 2070년경에는 섭씨 4도가 상승하게 되어 북반구의 대도시들은 최소한 그 두 배 이상 상승하게 되며, 아마존 숲의 85%가 파괴될 것으로 예측해왔던 기후과학자들의 최후통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 방출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미국과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방출하는 국가들이 그 방출량의 정점을 2015년으로 정하고 그 후 연간 3%씩 감축한다면 섭씨 4도 상승 이내로 제한할 가능성이 반반이지만, 현재로서는 4도 상승 이내로 제한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결국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수십 억 명이 죽게 될 것이라는 기후과학자들의 악몽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행복과 생존문제와 직결된 위기들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위기들을 외면한다. 일차적으로는 정부와 기업과 대학과 종교가 이런 위기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설마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랴" 하는 안이함과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속성, 정부 같은 큰 기관의 주장을 믿고 싶어하는 심리, "남들도 똑같이 당하는 거면 괜찮다"는 생각(정태인, "기어이 난파선에 타려는가?," 한겨레 21, 882호: 2011년 10월 24일, 18)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대림절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예수 탄생 이야기, 제국주의에 대한 하느님의 최종적 해결책

<첫번째 크리스마스>(2007)는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함께 쓴 세 권의 책들 가운데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이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2006)이며 마지막 책이 <첫 번째 바울의 복음>(2009)이다. (세 권 모두 번역이 되었지만, 현재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중심 출판사가 절판시켜 구할 수 없다. 조만간 한국기독교연구소가 다시 출판할 계획이다).

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주도하여 200명 남짓한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 세미나]를 결성한 이래로 보그와 크로산은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종교적 배경은 보그가 루터교 출신이며 크로산은 가톨릭 출신이다. 성격적으로는 보그가 훨씬 온화하며 글쓰기도 친절한 반면에, 크로산은 아일랜드 출신답게 제국의 지배 문제에 대해 훨씬 민감하며 역사-사회학적 분석에서 훨씬 치밀하다.

예수 이해에서는 보그가 기본적으로 예수를 "종교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반면에, 크로산은 예수를 "사회적 혁명가"로 이해한다. 이처럼 서로 관점을 보완할 수 있는 두 학자가 함께 쓴 이 책들은 최근의 대표적인 신약학자들의 예수 이해와 바울 이해의 핵심을 쉽게 정리한 결정체들이라 하겠다.

이 책은 마태오복음 1-2장과 루카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풍부하며 도전적인 의미들을 밝힌 책이다. 예수 탄생 이야기들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석은 이미 리차드 호슬리가 <크리스마스의 해방>(손성현 역, 2000)에서 방대한 자료들을 검토하여 탁월하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유대인들의 저항운동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복음서 본문들의 정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느라, 동정녀 탄생 이야기와 예수의 족보들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다. 또한 마태가 요셉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간음을 의심하여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초대 교회 이래로 예수가 "사생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았다.

보그와 크로산은 우선 예수 탄생 이야기들에 대해 문자적-사실적 관점이 아니라 은유적-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 이야기들의 사실성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그 이야기들의 의미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고대의 본문들을 고대의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결론은 예수 탄생 이야기들은 "비유로 쓴 전주곡"으로서 각각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 전체의 내용과 형식의 "축소판"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문자적-사실적 관점에서 믿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입장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며, 원죄 없이 태어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흠없는 제물의 필수조건이라고 믿는다. 예수가 실제로 동정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보그와 크로산은 간단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과학적-산부인과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을 미신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둘째로, 저자들은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상황(context) 혹은 모체(matrix)가 로마제국과 하느님 나라의 대충돌이며, 예수 탄생 이야기들이 당시 세상을 뒤집어엎은 것은 제국신학의 핵심적인 토대를 붕괴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을 증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그리스-로마 문헌들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저자들은 우선 예수보다 먼저 어떻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신의 아들", "구세주", "주님", "평화를 주신 분", "온 세상의 빛"으로 숭배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당시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한 세기 동안 계속된 혼란과 내전을 종식시킨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이런 칭호들을 붙여 숭배한 것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이어서 저자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폴로 신의 아들로서 기적적으로 출생한 이야기와 비너스 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족보에 맞대응할 뿐 아니라,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된 나사렛 예수가 로마 황제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신의 아들", "구세주", "주님", "평화를 주신 분", "온 세상의 빛"이라는 점을 고백하고 변증하기 위해 처음 제자들은 동정녀 탄생 이야기들과 예수의 족보들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라와 한나의 임신처럼 단순히 신적인 잉태가 아니라 예수의 탄생이 반드시 "동정녀에 의한" 신적인 잉태여야만 했던 정치적-신학적인 이유를 밝힌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는 대응할 수 없었지만, 제국이 지배이데올로기로 선전한 제국신학에 대해서는 초기 크리스천들이 창조적인 신학으로 맞대응하고 자신들의 신앙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셋째로, 저자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하느님의 최종적인 해결책과 관련하여,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을 성서의 종말론과 연관시켜서 처음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한다. 예수의 처음 제자들은 다윗 가문의 (폭력적인 戰士 메시아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메시아로 고백함으로써, 1세기 유대교 안에서 메시아니즘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저자들은 "왜 유독 마태오만 신에 의한 임신이라기보다는 간음에 의한 임신이라고 의심받을 수 있는 구절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집어넣었는가?"(141)라고 질문을 제기한 후, 그 해답을 모세의 잉태와 출생에 관한 당시의 미드라쉬들을 분석하여 명쾌하게 해명한다. 또한 저자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베들레헴 탄생, 이집트로의 탈출 등의 이야기들이 구약성서에 예언된 것인지에 관해 해명한다.

넷째로, 저자들은 "미국은 새로운 로마제국"(309)라는 관점에서, 예수 탄생 이야기들의 현재적인 의미를 밝힌다. 저자들은 특히 "대림절기와 크리스마스는 본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것이다"(312)라는 관점에서, 초자연적인 종말론, 혹은 개입적 종말론이 아니라 참여적 종말론 혹은 협력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세계 변혁을 위한 하느님의 열정과 꿈에 기독교인들이 기쁨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연약한 자들의 저항 속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태어난 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분명해진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신약성서 안에 "평화"라는 단어는 100번 나오는 반면에 "화해"라는 단어는 고작 네 번 나온다는 사실(Willard Swartley, Covenant of Peace, x)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학은 왜 예수, 하느님 나라, 구원, 교회의 사명, 종말론을 일차적으로 "평화"가 아니라 "화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왔는가? 또한 그리스도교가 이처럼 "화해"에 초점을 맞추었으면서도 줄곧 사람들 사이를 신자/불신자로 갈라놓고 의인/죄인으로 양분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종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도 교파들로 나뉘어져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종교재판과 종교전쟁과 같은 폭력도 불사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처럼 기독교 안에서조차 자신은 "구원받은 자"인 반면에 다른 교단들은 "잘못 믿는 사람들" 혹은 "저주받은 자"로 규정하여 서로 간에 "주님의 마지막 만찬"도 허락하지 않은 채,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서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는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더군다나 그리스도교가 이제까지 "화해"를 개인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 즉 하느님과 개인 사이의 심리적인 화해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성별과 사회계급들 사이 혹은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화해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생태학적인 화해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처럼 심리적 차원의 화해, 즉 "마음의 평화"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교 신학은 또한 "평화"를 미래 종말론의 차원에서 소망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원인은 무엇인가?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이 신약성서의 핵심을 외면해왔다는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 전체의 신빙성을 의심하도록 만든 결과를 초래한 신학적 원인들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가 테리 이글턴의 지적대로 "예수가 가까이 했던 하층민과 반식민주의의 비밀투사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약속이 아니라 교외에서 안락하게 사는 부유층이 주축인 신앙이 되어버린"(<신을 옹호하다>, 79쪽) 탓인가? 아니면 "정치권력에 맹종해왔던 중세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형성한 교회 전통"(Willard Swartley, x) 탓인가? 심지어 "교회가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는 복음서 해석을 제시한 적이 없다"(테리 이글턴, 132쪽)고 비판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의 권력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기는커녕 거짓말쟁이 정치인과 부패한 은행가들, 광적인 네오콘들의 혐오스러운 위선의 도구가 되었으며, 교회 자체도 엄청나게 돈을 버는 산업이 되었다"(테리 이글턴, 80쪽)고 비판을 받게 되었는가?

현재 우리가 봉착한 복합적인 위기들이 더욱 악화될수록, 그리스도교는 그 모든 재앙들의 책임과 해결책을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에게 전가할 것인가? 결국 그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가 봉착한 위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그리스됴교가 또 다시 비폭력적인 메시아를 거부하고 폭력적인 종교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난 4백여 년 동안 이미 완전히 무너져 내린 초자연적 유신론에 아직도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의 승리주의와 제국주의를 극복할 길은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전대미문의 집단적인 살육과 고통, 후천개벽을 향해 나아가는 연약한 자들의 저항 속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태어난 분"의 믿음(278쪽)이 아닐까?

김준우(한국기독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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