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도서관 나들이] <세상을 뒤집는 기독교>
바벨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전, 브라이언 왈쉬, 새물결플러스, 2010.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고통 때문에
주여, 우리가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 당신의 자녀들을 그날에 대한 비전으로 축복하소서.
(브루스 콕번)


“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비전은 슬픔일 뿐 아니라 현재 역사의 종결에 대해 크게 애통하는 것”이라며,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희망하되 “뒷짐을 지고 기다리지 말고 우리 역시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나라의 동역자로 기다리자”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브라이언 왈쉬가 쓴 <세상을 뒤집는 기독교>가 바로 그 목소리의 진원지다.

▲ <세상을 뒤집는 기독교> 브라이언 왈쉬, 새물결플러스, 2010.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사회교리 주간’을 처음 제정하고 각 교구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회복하자고 나선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예언자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왈쉬의 음성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측면에서 귀 담아 들을 만하다. 왈쉬는 이렇게 먼저 묻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할 때 현재의 상황을 변혁하려는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정치인들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인식되고 있는가? 경찰청이나 FBI는 기독교회의 예배활동을 정기적으로 감시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왈쉬는 답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교회현실이 비정상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뒤집어엎기 때문에 현재 체제 안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 금융자본주의에서 많은 이들은 ‘노동’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노동은 필요하지만, 일부 천민들의 일이며, 기득권자들은 자본을 매개로 그 노동의 열매를 따먹을 마땅한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게 자본주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노동이 일종의 예배이며, 인간을 아름답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도구이며, 피조세계를 돌본다는 상반된 생각을 지니고 있다.

세상을 ‘전복’시키는 신앙

그리스도교는 하느님나라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은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는데, 일차적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왈쉬는 전한다. 바벨론 창조신화인 ‘에뉴마 엘리쉬’에 따르면, 마르둑과 티아맛이라는 신이 혈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마르둑은 티아맛을 죽이고 그 시체를 두 토막 내어 상반신으로는 하늘을 만들고, 하반신으로는 땅을 만들었다. 그리고 티아맛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킨 킹구의 피로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는 원수의 육신이요, 인간은 원수의 피다. 당연히 피조세계와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다. 여기서 생태신학이나 ‘인간이 존엄성’은 찾아볼 방법이 없다. 게다가 싸움에서 패한 다른 신들은 지위가 강등되어 뼈가 부서지게 하찮은 일을 해야 했는데, 나중에 이 일을 대신할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만든 게 인간이라고 하니, 인간의 처지는 가련할 지경이다. 그래서 신성을 비추고 있는 거울인 왕과 사제와 귀족이 있지만, 노예인 인간을 비추어 주는 거울에는 ‘바벨론에 정복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짓밟힌 이스라엘 사람’만이 나타난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희망을 담아’ 창조이야기를 다시 쓰고, 그 이야기를 자신들의 예배 중에 다시 선포했는데, 이는 ‘철저하게 기존 체제를 뒤집어엎는 행위’였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참된 왕이며 주권자이며 창조자이신 분은 ‘추방당한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뿐’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형상은 바벨론에서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엘리트, 곧 신성한 열쇠를 쥐고 있거나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남녀로 하느님과 협력하는 이들이라고 전한다. 이를 두고 왈쉬는 “거짓 신인 마르둑을 폐위시키고, 해체하며 또한 몰락시키기 위한 급진적인 시민 불복종에 참여하라는 초대”라고 해석한다.

이는 흑인을 차별하는 땅에서 “검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며,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거짓 신들에게 봉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거룩한 일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파괴하고 착취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함께 수고하는 동등한 파트너인 남자와 여자로서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청지기’로 부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최고의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다. 예수는 ‘하느님이심을 취하지 않고 노예/종인 사람이 되시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임을 드러냈다. 예수는 권력을 쟁취하거나 통제하지도 않으며, 주체할 수 없는 소비욕구를 자극하지도 않았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결국 목숨마저 그들을 위해 내어놓으셨다.

그러므로 왈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현대문화 한복판에서 세상을 전복시키는 운동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서 “현대문화 한복판에서 세상을 전복시키는 세력으로 살지 못한다면, 포로생활에 안주하게 되고, 바벨론의 규정과 바벨론의 신들에 대해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사실상 ‘혼수상태’에 빠진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

캐나다의 사회학자 레지널드 비비는 자신의 책 <산산조각난 신들>(Fragmented Gods)에서 캐나다 교회에 대해 “신앙심이 돈독한 캐나다인들은 실재를 구성하는 삶의 방식에서 비그리스도인들과 어떤 차이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이주노동자와 고아, 가난한 이들, 장애인, 그리고 자신과 다른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서 비그리스도인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다면, ‘영적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우리가 거창하게 쏟아내는 경건한 말과 행동은 한갓 공허한 믿음을 드러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전한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주의적이고 출세지향적이며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영적 위기가 치열한 싸움 끝에 포로로 잡힌 탓이 아니라,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사실상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교회는 영적으로 ‘혼수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혼수상태에 빠져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까닭을 왈쉬는 ‘성속이원론’에서 찾는다. 믿음과 삶, 믿음과 학문, 믿음과 정치, 믿음과 직업이 통합되어야 하는데, 복음서에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이 너무 급진적이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음적 요청을 교회 안에서 ‘제한하고 길들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예수의 명령에 대해 “네, 그러겠습니다”(I do)라고 말하지 않고 교리체계에 대해 “나는 믿습니다”(I do)라고 말한다. 즉, 예수처럼 세상에서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보증받고자 한다. 이를 왈쉬는 ‘잠든 신앙’이라고 말한다.

공동체가 이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에, 예언자는 영적 불감증에 걸린 이들을 향해 열정적으로 크게 소리쳐야 한다.

“우리는 우리시대의 불확실성에 무감각하고, 세계적인 위험에 둔감하고,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모르고, 현재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 언젠가는 깨질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에 둔감하고, 우리의 공동체에 속한 동성애자들의 고통과 압제당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계속 무감각한 상태로 있고 싶어한다. 현재의 문화적 질병에 교회가 무관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감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왈쉬는 예언이란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나 “교회는 별 문제가 없으니 들쑤셔놓지 말라”라고 말하는 자들이 ‘만사가 순조롭고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꿈같은 세상’이 제공하는 영원한 무감각 속에 우리를 계속 가두어두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예레미야처럼 이 꿈같은 세상을 깨부수기 위해 ‘분노하면서 저주를 퍼붓는’ 방식이 아니라 ‘고뇌하고 눈물을 흘리며 더불어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는 영적 불감증에 가려져 있는 공동체의 고통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예언자는 유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예루살렘 때문에 흐느끼며, 현대문화 때문에 애통하며, 교회 때문에 통곡한다. 지금이 어떤 때인 줄 알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자금이 종말의 때임을, 지금이 장례를 치를 때임을 알고 있다.”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마비된 의식을 일깨우는 ‘애도’와 ‘한탄’

왈쉬는 여기서 세 가지 우상을 지적한다. 과학이 우리 문화에서 권위 있는 지식을 제공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계시의 원천으로 기능한다는 ‘과학지상주의’, 과학기술을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가장 쓸모 있는 도구로 여기는 ‘기술지상주의’ 그리고 생활수준의 향상이 삶의 궁극적 목표이며,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경제지상주의’다. 왈쉬는 이 우상을 우리가 믿으면 자연이라는 정원은 오히려 사막으로 전락한다고 경고하면서, “진짜 광야는 인간이 거주하는 광야, 즉 우리 자신이 과학기술을 이용해 조성한 도시라는 광야”라고 전한다.

왈쉬가 최고의 우상이라고 지적한 ‘경제지상주의’는 “인간의 행복은 더욱 더 높은 소비수준을 필요로 한다”는 경제성장의 신화를 낳았다. 이 믿음은 치명적인 위험을 지니고 있는데, 경제성장을 목적으로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남겨두어야 할 자연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이를 왈쉬는 ‘제한된 구좌에서 예금을 계속 인출하는 것’으로, “미래세대가 물려받을 피조세계를 탕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저항하여 예언자가 완전히 마비된 의식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애도와 한탄’이라며, “느끼고 괴로워하며, 돌보고 ‘함께하는 열정’(com-passion)을 요청한다. 이를 위해 ‘예언자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일과 세상사에 뒷짐 지고 관망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상상하는 힘이다. 경제중심의 억압적 정치 대신에 정의와 긍휼이 살아있는 정치, 풍요와 가난의 경제 대신에 평등과 돌봄의 경제를 상상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교회는 이처럼 소비자가 아니라 예언자적 공동체, 예언자적 백성이 되라고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포로생활 너머, 현재의 위기 너머 삶에 대한 소망이라는 급진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인 행위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일터에서 침실까지, 회의실에서 교실에 이르기까지, 극장에서 식당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느님의 샬롬,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현존을 체험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왈쉬는 이런 예언자들을 ‘땡볕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기적을 기다리는 성자와 낙오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시대는 그들과 더불어 “숨 죽이며 우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라고 노래한다.

“지금은 숨죽이며 우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
지금은 그들을 무덤에 파묻으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덤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 묻혀야 할 때.
지금은 기업의 얼굴 없는 제왕들까지도
우주의 지평선을 흘끗 쳐다봐야 할 때.
지금은 혼돈이 이기고 나중에 시시한 것으로 드러날
상을 갖고 걸어 나가야 할 때.”
(브루스 콕번, ‘바보들의 축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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