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8일 늦은 7시부터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송광사에서 생명평화결사에서 주최한 문화한마당이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비가 소슬하니 내리는 저녁에 전주로 향했다. [종교간 소통과 평화를 위한 문화한마당] 행사가 벌어지는 소양으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 민중당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귀농하였다는 전희식 씨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간다. 행사가 열리는 소양면 송광사는 전주에서 무주 진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데, 종남산 자락 아래에 넓은 도량을 꾸미고 앉아 있었다. 잠깐 모시는 글을 읽어 본다.

“우리나라는 여러 종교가 꽃밭을 이루며 각기 그 존재의 향기를 뿜는 종교적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서로 형제의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참된 종교라 칭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서로 선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조화를 이룰 때, 종교의 본질과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평화결사의 종교위원회는 전 세계가 종교 간의 반목과 대립으로 끊임없이 비극과 참화를 불러일으키는 작금의 현실에서 종교 간의 긴밀한 대화와 더 깊은 소통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이제 그동안 서로 우의를 다지던 종교인들과 생명과 평화의 소망을 품고 있는 분들께 예술과 대화의 작은 한마당을 엽니다. 기쁘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시어 밝고 아름다운 마당을 일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문정현 신부와 황대권 선생

보고 싶었다, 친구가 따로 있나

저녁공양부터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병철 선생과 탁발순례단장 도법 스님, 종교위원장 김경일 신부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식당 문으로 들어섰을 때, 백발이 익어 노릇해진 문정현 신부와 머리만 백발인 최종수 신부가 뒤를 돌아보았다. 신부님, 하고 안아드렸다. 이 길에서 불쑥 불쑥 만나게 되는 분들이다. 반갑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행사 전에 주지 스님인듯한 분들의 초대로 백련차를 마셨다. 그 방 안에는 원불교 교무님, 개신교 수도회 언님, 스님, 목사님, 성공회 신부님, 가톨릭 신부님 등 대한민국에 터잡고 사는 여러 종교의 종교인들이 모두 모인 듯하였다. 특히 <풍경소리>라는 잡지를 만드시는 김민해 목사를 여기서 만나니 더욱 반갑다. 몇 년 전에도 강진에 갔다가 김민해 목사와 사월초파일에 다산초당 옆 백련사에서 백련차를 얻어 마신 적이 있다. 새롭다. 그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오래 묵은 친구들 같다. 허심탄회함, 그것이었다. 5년 전에 실상사에서 뵌 적이 있었던 도법 스님은 절을 떠나 탁발순례에 나선 이후로 처음 뵈었는데, 예전보다 더 생생하고 담백한 느낌을 주었다. 군살이 다 떨어져 나가고 알곡만 남은 몸매와 빛나는 눈매가 참 좋았다.

도법 스님은 지난번 제주 순례에서 좌우대립으로 죽은 영령들을 더불어 위로하는 합동위령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금방 화제는 문정현 신부의 은퇴 문제로 번져 나갔다. 도법 스님 왈, “지 맘대로 살아도 인생이 짧은 데... 그만 물러나시라고...” 하셨고, 누군가 “종교는 벌써 다 망했다”고 하자, 다른 분이 되받는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이라더니, 종교는 망해도 3백년이라... 참 질기다”고 하였다. 종교가 권력화되면 이미 종교 자체는 망한 것이라고, 껍데기만 남아서 허청대는 것이라고 나는 주어 섬겼다.


엄마가 불교라서

비가 오는 탓에 행사는 마당이 아닌 넓은 방안에서 열렸다. 참 많은 이들이 초대되어 말하고 들었다. 성공회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신 오카타리나 수녀가 소통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마당이 열렸다. 언님도 한마디 기도하셨다. “자비하신 님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과 평화의 님이시여, 우리를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써주시어 우리가 사랑과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사회는 천주교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가 맡아 보았는데,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 만큼 재치가 있었다. 첫번째 퍼포먼스를 해준 한영애 님의 춤(Good굿)은 마치 우리들에게 상처받은 영혼을 다스리고 위무하고 되살리는 힘을 주는 것 같았다.

행사에선 유성운 님의 노래, 이원규 시인의 시 낭송, 황대권 선생의 이야기, 강성국 님의 퍼포먼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다음 선생의 석벽재영이란 전위예술까지 참 다채롭고 이색적이었다. 황대권 선생은 이 시간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가톨릭에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생은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레지오 마리에 활동을 하였단다. 레지오는 마리아의 군대라는 이름만큼 명령-실천-보고하는 엄격한 신자생활을 요청하는데, 어느날 단장님이 교도소 4동에서 전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4동에는 배식을 해주는 소지를 맡던 소년수가 있었는데, 평소 그 소년수에게 눈독을 들이고 과자도 사주면서 전교를 꾀했는데, 이야기가 잘 먹히지 않았단다.

“왜?”
“형님 말씀은 고마운데요, 엄마가 저 때문에 고생이 심하신데, 엄마가 불교신자라서...”

이런 사람에게 천주교 전교가 옳은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평소 불교 공부를 많이 하였던 터이기에, 선생은 그 후로 그 소년수에게 불교 교리와 수행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레지오에서 활동보고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그 일에 대해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한다는 선생은, 한 종교인이 다른 종교인을 무시할 때 그 사람은 제 종교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셈이라고, 그 독단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명평화운동을 하면서 드는 생각은, 만약 적이 있다면 내 안에 있을 뿐이라는 진리다.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생명의 그물망에 그들도 포함시키려는 게 옳다고 말한다. 불교도는 기독교인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기독교인은 이슬람교도들의 행복을 위해 빌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소통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는 말이다.


 내가 만약 자유롭다면

최종수 신부는 틈틈이 차를 마시라고 청중들에게 권하면서, 차(茶)란 풀과 나무의 생명력을 사람이 마시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어서 지체장애인인 강성국 님의 가슴 아픈 퍼포먼스를 보았다. 곰인형에게 입으로 차를 따라 주는 한 사나이가 붓을 입으로 물고 “내가 만약”이라는 편지를 써내려갔다. “내가 만약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너를 데리고 멀리 도망칠 텐데.” 그 순간에 무대 뒤에 붙여 놓았던 창호지가 종이 무게마저 무겁다는 듯이 뜯어져 내려앉았다. 참 묘한 느낌이었다. 이원규 시인의 시 가운데는 “내 밥상의 안부를 묻는다”는 말이 계속 울려나왔다.

도법 스님은 4년째 맨발의 청춘처럼 전국을 걷고 있는데, 참 많은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다. 우리 시대의 엄청난 물질적 발전에도 평화로운 삶은 왜 오지 않는 것일까? 하는 질문 때문이다. 국가, 종교, 경제, 자유, 정의, 평화, 사랑......에 대해 끝없이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일까? 묻고 또 묻다보니 결국 그 말을 하는 주체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나의 생명이니 내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명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가 없기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생명은 정말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데, 그 평화를 위해 우리는 어찌 해야 할 지 잘 모른다. 도법 스님은 그런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려면 부처, 예수를 다 접고 터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종교인들이 그런 문제의 중심을 다루어야 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 종교란 무엇인지 다시 물어보아야 하며, 이렇게 치열하게 묻고 답하는 가운데 제 향기를 각자 뽐내면서도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공연이었던 다음 선생의 석벽재영은 ‘날지 못한 꿈’이라는 제목으로 시연되었는데, 한겨울에 매화처럼 지조를 지녔던 포은 정몽주의 마음을 배우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송영섭 목사가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바라보며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를 하였다. 제주는 생명평화결사에서 ‘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바 있다. “평화보다 편안을, 소통보다 주장을” 하는 세상을 대면하면서 “세상의 참 평화이신” 그분을 알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늦은 밤에 공연이 끝나고, 절집에 연기 모락거리는데, 대화모임을 남겨두고 나는 송광사를 빠져 나와야 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서울에서 예정된 파트너십 프로그램을 시간에 맞추어 가야했던 탓이다. 아쉬움을 남기고, 더 깊은 이야기를 두고 떠나는 마음을 상경 길에 동승했던 고운 님들 덕에 위로받았다.

/한상봉 2007.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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