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영화] <페펙트 게임> 박희곤 감독. 2011

1987. 이 해는 특별했다. 우리는 승리감과 희망과 좌절을 모두 맛 봤다. 30여 년을 향해가던 군사독재 무리들과 시민들은 한판 맞짱을 떴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이제 진짜 민주화가 시작될 것 같은 희망의 열기로 절절 끓었다. 그리고 대선에서의 패배. 희망과 절망이 차례로 교차하던 해였다.

1987년 5월 16일. 야구팬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날일 것이다. 불세출의 투수들인 최동원과 선동열이 맞붙던 그 날이다. 롯데 대 해태, 경상도 대 전라도, 연세대 대 고려대 라는 제과업계, 지역, 대학 라이벌리의 상징인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리는 그 날이라면, 장장 4시간 56분에 걸친 이 처절한 완투에 야구팬만 시선을 모았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열성적인 야구 팬덤이 있는 부산에서 십대시절을 보낸 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광분한 롯데 팬이 해태 야구단 버스를 불태웠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긴 하다. 최동원과 선동열이 프로야구 사상 그다지도 위대한 선수인지도 몰랐고, 그러니 두 사람이 라이벌이었는지도 알 턱이 없었다.

<퍼펙트 게임>은 두 위대한 투수의 맞대결인 그 날을 재현하는 영화다. 영화는 풋풋한 젊은 시절의 최동원과 선동열의 인연에서 시작하여, 프로선수 시절에도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선망하고 질투했는지, 그리고 서로를 얼마나 염려하고 신경 쓰고 있었는지를 스케치하듯이 차곡차곡 보여주고 난 후, 대망의 그날 1987년 5월 16일 야구경기 씬이 폭발하듯이 발산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은 세 번 맞붙었고, 1승 1패 1무를 나눠가졌다. 1986년 4월 19일 선동열은 롯데를 상대로 1 : 0 완봉승을 거뒀고, 4개월 뒤 최동원은 해태를 상대로 2 : 0 완봉승을 거둔다. 그리고 둘의 마지막 경기가 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다. 경기가 진행된 15회 동안 타자의 수는 각각 15명씩 30명. 투수는 단 2명, 최동원과 선동열. 최동원은 60명의 타자에게 209개의 공을, 선동열은 56명에게 232개의 공을 던졌다. 9회 말 해태의 공격에서 2 : 2 동점이 되며 양팀에게 각각 6이닝이 더 주어졌지만 결국 경기는 2 : 2로 마무리되었다.

영화는 실화를 다루되 부분적으로 픽션이 섞여있고, 라이벌리의 대결과 공감을 통한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영화적인 터치를 가한다. 어디가 팩트이고 어디가 픽션인지가 쉬이 드러나 어째 짜임새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감동과 재미를 이끌어내는데 큰 문젯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패색이 짙은 해태를 구원하는 일생일대의 역할을 해내는, 가난하고 존재감 없던 나이든 선수인 박만수라든가, 정치부에서 미운 털이 박혀 스포츠 기자로 발령받은 애송이 기자인 김서형 등의 존재는 영화적 긴장감과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게 드러난다. 만년 2군 포수인 박만수의 성공은 깊은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데, 이는 주변부를 맴돌던 조연 캐릭터의 결정적 한방을 통해 현실의 대중적 욕망을 투사한다. 언젠가는 터트리고 말거야 라는 대중적 성공 욕망 말이다.

김서형이라는 인물은, 야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최동원과 선동열이라는 거인의 뚝심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투입된, 일종의 영화 안 구경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인물은 영화의 전체 서사에서 겉돌고 말지만, 로맨스가 없는 스포츠영화에서 일견 긴장을 생성해 내기 위한 한 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에러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완전히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있어 최동원(조승우)의 냉철함과 집념, 선동열(양동근)의 뜨거움과 유들유들함은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롯데 4번 타자 김용철(조진웅)은 최동원의 뒤에 가려져 사사건건 트집잡고 마찰을 일으키지만 끝내는 최고의 조력자가 되고, 해태의 2군 선수 박만수는 끝까지 착하고 우직하다. 해태 감독 김응룡은 냉정하고, 롯데 감독 성기영은 다혈질이다. 라이벌리를 다루는 스포츠 영화의 특성상 캐릭터는 분명하고 서사적 구조는 단순하다.

선한 의지를 가진 두 주인공 모두의 성공과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감동을 위해 영화는 간단하게 한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가 마지막 사직구장에서의 대결 장면에 총력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로 보인다. 거대한 군중들, 항공촬영과 크레인숏을 이용한 장소와 사건에 대한 조망, 잘게 쪼개져 이어 붙인 편집, 슬로우 쇼트와 패스트 쇼트의 리듬감 있는 교차는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스릴을 불러일으키기에 더할 나위 없는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일단 야구 문외한인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며, 롯데 팬들이 선동열을 연호하고 해태 팬들이 최동원을 연호하는 장면을 뒤로 하고 두 투수가 악수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을 정도다. 아마도 야구팬은 야구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이 영화를 대할 것 같다. 게다가 얼마 전 타계한 쫄지 않고 할 말은 했던 진짜 사나이 최동원이 그립다면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간 여간 해서는 잘 풀리지 않았던 스포츠 영화라는 장르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으로 흥행의 물꼬를 트고 <국가대표>(2009)와 <킹콩을 들다>(2009)가 성공하면서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경기와 운동선수를 찾는 흐름에서 최동원과 선동열의 빅매치는 당연히 매력적인 소재다. 또한 최근 <써니> 등 1980년대를 즐겁게 회고하는 복고풍 드라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퍼펙트 게임>은 그 시절의 상처를 되새기고 달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적 배경으로써 추억과 상념에 젖어 아름답게 기억하는 방식을 취한다.

우직하게 자기의 길을 가는 운동선수들은 삶의 숭고미를 발산한다. 한 순간 풀어버리고 싶은 금욕적인 육체적 단련을 묵묵히 수행하는 선수들은 짧은 찰나의 연호를 위해 긴 고통의 시간들을 바친다. 수도승처럼 일상의 욕망을 억누르는 그들을 난 존경해마지 않는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선 선수들 모두가 멋지고, 최고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조연과 엑스트라 역할을 해내는 선수 모두가 존경스럽다. 상대에 대한 선망과 질투와 존경심으로 서로 싸우고, 그리고 또 서로를 인정했던 두 거인 최동원과 선동열의 삶이 너무 멋져서 눈물이 났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이 한창일 때, 최동원은 일부러 롯데 야구복을 챙겨 입고 시위대열에 합류했으며, 열악한 선수들을 위해 슈퍼스타였던 자신이 총대를 메고 선수협의회를 결성하려다 구단주의 눈밖에 나고 끝까지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선동열은 광주의 설움과 호남 콤플렉스를 강속구에 실어 단방에 날려줄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선동열은 절대로 질 수 없었다. 1987년 시민들이 야구를 본다는 것, 야구팬이 된다는 것, 최동원과 선동열을 응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이 영화에서도 사회적 의미가 조금은 인서트 된다. 정치인이 두 야구 팬들의 감정을 지역감정으로 만들어 선거에 이용하려고 하는 전략들이 소개되고, 이 역사적 대결이 무승부로 끝나자 화를 내며 경기장을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잠깐 영화는 당대의 사회적 의미를 불러낸다. 참으로 절묘하게도 이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고 롯데 팬과 해태 팬은 하나가 되어 울먹인다.

어느 시기보다도 99%의 연대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이제는 결코 저들의 꼼수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이 시기에, 이 장면은 예사롭지가 않다. 짧고 단순한 인서트이지만, 상업 장르영화로서 여기까지라도 좋다. 그 표면 너머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은 관객 각자의 자유다.

p.s. 야구와 당대 사회의 의미 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한다면 <스카우트>(김현석, 2007)를 보시라.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EBS 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 동국대, 숭실대 출강 중.
쉽게 정보가 눈에 뜨이지 않는 영화들 추천을 통해
영화로 닥치고 소통하는 명랑한 공동체를 소망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