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9월 7일자 985호 <평화신문>과 2614호 <가톨릭신문>이다.

 
‣ 면담인가 훈시인가?

운전 중에 잘 모르는 지역에서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 돌연히 나타나는 ‘일방통행’길이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있는 만남 혹은 쟁점에서 한 쪽의 의견만 제시되는 일방보도는 당황이 아니라 짜증이 난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명동에 있는 서울교구청 앞에서 몇 사람이 단식농성을 했던 모양이다. 교계신문이 아닌 인터넷언론 <지금여기>의 기사를 미루어보면 지난 8월 18일에 교구장 면담 요청을 서면으로 하였으나 서울대교구 측의 무반응에 23일부터 교구청 입구에 자리를 잡고 그들은 단식에 들어갔다. 교구장인 정진석추기경은 이후 8월 27일에 그들을 면담하였고 면담 후 농성자들은 단식을 끝내고 귀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신문>은 아예 보도하지 않았으며, <평화신문>은 985호 1면에 보도를 하였다. 문제는 3단 기사의 짧은 내용 중에 단락마다 “정(진석) 추기경은...”으로 시작하는 말이 5번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흉보면서 배운다고 어디서 많이 듣고 보던 보도기법이다.

아무리 신분의 상하가 존재하는 면담이지만 대화는 대화이다. 하여튼 기사내용을 보면 단식을 하면서까지 교구장을 면담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말은 단 한 단어도 없다. 지독한 일방통행이고 일방보도다. 추기경의 훈시(?)는 겹 따옴표를 사용하여 거듭 인용하는데 어찌 단식농성을 한 사람들의 요구사항은 단 한 줄조차 보도되지 않았는가? 아니 이것이 면담이었는지 강론이었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기사말미에 마지못해 인용한 농성자들이 내건 ‘촛불시민 공안탄압‧ 방송장악 저지를 위한 추기경면담’이란 명칭 속에 그들의 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안다는 전지전능함이 교계신문에 있었을까?

기사 표제에 대해 한 발 더 나가보자. “어떠한 경우도 폭력으로 문제 해결해선 안돼” 더 없이 좋은 말이다. 추기경으로서야 대화 중에 한 말씀이지만 어찌 이 말이 기사의 헤드라인이란 말인가? 이 말이 표제가 되면 추기경을 찾아온 사람들이 아마도 앞으로 ‘무력시위’를 하겠다고 얘기한 것이 된다. 아니면 지금까지 시민들의 촛불이 폭력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일반 신문에 안 나서 그렇지 그것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이 된다.

누가 폭력적이었단 말인가? 교계 신문사가 잘 모르겠으면 기독교신문에게 물어보라. 누워서 방패 맞은 한국YMCA 사무총장 사건이 무엇인지. 아니면 불교신문에게 길에서 차 트렁크 열어 보인 조계종 총무원장 사건을 물어보던지 하시라. 추기경의 말을 교계신문이 비판하란 것이 결코 아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대화내용을 교구청 홍보실에서 나오는 보도 자료대로 쓰지 말고 양쪽의 이야기를 균형 있게 보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공정보도의 첫 페이지다. 한 편 민감한 시국사건에 대하여 못 본 척하는 <가톨릭신문>은 말 안하면 본전이란 소극적, 아니 자폐적 보도태도에서 깨어나시라.
 

가톨릭신문 2면

‣ ‘진출’이라는 단어

한 때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을 때 일본은 그들의 과거에서 몇 가지 단어를 바꾸었다. 그 중 하나가 ‘침략’을 ‘진출’이란 이상야릇한 단어로 바꾼 것이다. ‘진출’이라는 말 자체는 좋고 나쁜 가치가 숨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신문은 때때로 구별하여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

<평화신문> 3면 ‘쿠바에 외국 수도회 첫 진출’과 <가톨릭신문> 2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 진출 120주년’이 그것이다. 외국수도회가 타국에 들어갈 때는 한없이 깊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앞선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진출’이란 어감보다 ‘파견‧ 선교‧ 설립’등이 오히려 적당하지 않을까?

/김유철 20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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