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수도원 기행-9]

2007년 여름에 개최된 연합회 연구주간에 보이론 수도원(Erzabtei St. Martin)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역에서 기차를 타고, 두 번째 환승역인 울름(Ulm)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타야 할 기차가 보이지 않았다. 타고 온 기차가 울름역에 늦게 닿았고, 보이론행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완행열차여서 때때로 그렇다고들 했는데, 짜증나는 대신에 오히려 매사에 철저하고 정확하기로 소문난 독일 사람들의 빈틈을 보는 것 같아, 일종의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 덕분에 울름 시내를 구경할 수 있었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을 대충 해결한 후 다시 기차를 타고 보이론 수도원으로 향했다.

도나우 강 발원지의 보이론 수도원

시간이 지날수록 협곡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편에 산이 늘어서 있고, 기찻길 옆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 이름이 도나우탈 즉 도나우 계곡이었다. 이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장장 2천 8백여 킬로미터를 달려 흑해 연안으로 빠진다. 그러니까 보이론 수도원은 도나우 강의 발원지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멀리서 산위에 서 있는 십자가 눈에 들어오자, 독일 수사들이 다 왔으니 내릴 준비를 하란다. 역 이름도 수도원 이름과 같이 보이론이었다. 젊은 수사 두 명이 우리를 마중하러 역에 나와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메토디오 수사였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 앞에는 조그만 동네가 있었다. 예전에는 수도원을 찾는 순례객들이 워낙 많이 밀려들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한때 이 동네도 북적거렸을 것이다.

수도원은 여느 독일 수도원들과 같이 깔끔했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원래 수도원 건물은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1802년까지는 이 수도원의 주인은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이였다. 나폴레옹 전쟁 때 그들이 쫓겨났고, 1863년 마우로 볼터와 플라치도 볼터 형제가 빈 수도원을 접수하여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보이론에 갓 자리 잡은 베네딕도회원들은 1875년부터 1887년까지 불어 닥친 문화투쟁(Kulturkampf)에 된서리를 맞고 수도원을 빼앗겼다. 그 후 장소를 옮겨 기회를 엿보며 수도생활을 하던 수사들이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왔고,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보이론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보이론 연합회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베네딕도회 총연합에서 매우 비중 있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40만 권을 보유한 수도원 도서관, 그리고 미술

보이론 수도원은 특별히 신학, 교회 미술, 전례 분야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 자취가 아직도 수도원 곳곳에 남아 있었다. 보이론 수도원은 독일 안에서 가장 큰 수도원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무려 4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은 수도원 본관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했다. 한때 수도원 안에 신학대학이 설치되기도 했는데, 로마에서 같이 공부했던 보이론 연합회 소속 수사들을 보면, 한결같이 똑똑하고 부지런하여 그 학구적인 가풍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수도원에 책상물림들만 산다는 소리는 아니다. 성당과 식당, 복도 벽에 많은 벽화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모두 수사들이 손수 그렸다고 한다. 아주 단정하고 우아한 필치였다. 알고 보니 19세기 후반에 보이론 수도원에는 아주 유명한 미술학교가 있었고, 보이론 화풍이라는 회화유풍이 생길 정도였다. 우리 연합회 창설자인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도 이 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정말로 복도 한쪽에는 그와 동료들이 함께 그린 벽화가 남아 있었다.

이 학교 출신들의 유명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었는데, 이탈리아 몬테까시노 수도원 성당 밑에 있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무덤 경당을 꾸미는 일이 그들의 손에 맡겨질 정도였다. 이집트 고대 회화들을 연상시키는 보이론 화풍의 그림은 초대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예술 양식에서 영감을 얻어 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 전례였다. 독서의 기도를 제외한 모든 시간 전례(아침기도, 삼시경, 구시경, 저녁기도, 끝기도)가 전부 라틴어로 바쳐지며, 달랑 두 명 뿐인 칸토레스Cantores가 입을 척척 맞추며 공동체 전례를 이끌어 가는데, 얼마나 노래를 잘하던지 입이 쩍 벌어졌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날이 토요일이어서, 토요일에만 하는 특별한 전례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저녁기도가 끝나자, 수사들은 성당 한쪽에 있는 성모 경당으로 행렬하였다. 참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경당이었는데, 거기서 수사들이 성모 호칭기도를 불렀다. 물론 이것도 라틴어로 불렀는데, 얼마나 아름답던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돌아온 후에도 참가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을 이끌어 낸 전례운동이 보이론 연합회 소속 수도원들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은 꽤나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독일에서 통용되는 쇼트Schott 미사경본을 편집한 이도 바로 이 수도원 출신 안셀름 쇼트Anselm Schott 신부이다.

공짜 맥주와 살뜰한 마음씨

매회 연합회 연구주간을 지도하던 저스틴 아빠스는 감탄을 마지않는 우리를 보고 이렇게 보이론 수도원을 좋아하는 그룹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이론 수도원에서 자고 가기는 우리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그룹들은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제공해주는 버스를 타고 왔다가 점심만 먹고 휑하니 돌아갔으니, 뭘 느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이론 수도원을 좋아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수도원 손님의 집에 들어섰을 때, 풍성하게 차려진 음료와 다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과가 끝날 무렵 아빠스께서 오셔서 환영 인사를 했고,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맥주와 음료수를 많이 넣어놨으니, 마음껏, 그것도 공짜로 마셔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들어갔다.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는 보이론 수도원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가서도 약간 불편하게 지내다 오겠거니 예상했던 참가자들의 예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우리가 맥주를 공짜로 얻어 마시게 되어 보이론 수도원에 혹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따뜻한 환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따뜻한 환대가 돋보였던 부분은 사실 공짜 맥주가 아니었다. 다과를 들고 나서, 수도원을 돌아볼 때였다. 우리는 성당을 둘러보고, 성당 지하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역대 총아빠스들의 무덤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그중 유독 한 무덤 앞에만 꽃병이 놓여 있고, 촛불이 켜진 촛대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누구의 무덤인가 라틴어 비문을 들여다보니, 일데폰스 쇼버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분은 바로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가 갑자기 상트 오틸리엔을 떠나버렸을 때, 사후 수습을 위해 시찰관으로 왔다가, 형제들의 간청으로 장상직을 수락하여, 상트 오틸리엔 선교원을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수사들이, 우리의 방문에 맞추어 미리 그분의 무덤을 꾸며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주일 미사 중에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독서가 영어로 낭독되었고, 신자들의 기도 역시 영어로 드려졌다. 정말로 사소한 일들이었지만, 그들의 살뜰한 마음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보이론 방문은 우리를 아주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고, 연구주간 막바지에 가졌던 나눔 모임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보이론 수도원에서 받은 인상을 이야기하였다. 비록 다른 유럽 수도원만큼 유서가 깊지는 않았지만, 보이론 수도원은 시대에 맞는 문화를 창조하려는 노력이 돋보이고, 따뜻한 환대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공동체였다. 그리고 공동체 전체가 아름다운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미사복사를 하는 연로한 수사들의 웃는 낯도 눈에 어렸고, 한 목소리가 되어 부드럽지만 힘찬 노래 소리도 귀에 울렸다. 그렇게 잘 준비된 전례가 강력한 선포가 된다는 사실은 성당을 꽉 채운 신자들이 증명해 주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은 공동체 구성원의 노령화와 감소다. 물론 나이와 머릿수가 공동체 수도생활을 하는데 절대적이지는 않겠지만, 이런 수도원이 더욱 융성해져서, 거기에서 흘러넘치는 에너지가 교회를 쇄신시키고, 세상을 교화하는데 큰 몫을 해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고진석 이사악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사진제공
오틸리엔 연합회 연구주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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