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8월 31일자 2613호 <가톨릭신문>과 984호 <평화신문>이다.

‣ 좋은 것만 담는다고 좋은 신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 좋아졌다는 말보다는 편리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이 모두 온라인상에서 지나간 기사들을 신문형태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신문사들이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경비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물이다. 흔히 ‘이동 가능한 문서형식’이라 부르는 PDF를 리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은 창간80주년에 맞추어 지난 4월 1일자에 ‘DB 구축 현황과 전망’이란 기사를 통해 그간의 노력을 소개하였으며 그 의미를 ‘가톨릭정보의 디지털화 작업’과 ‘한국 천주교회 관련 근 ‧ 현대 사료의 활용’에 두었으며, DB의 주요한 특징과 기능을 ‘신문기사 원문 텍스트 검색 서비스 ․ 창간호부터 PDF 신문지면 서비스 ‧ 검색 가능한 PDF 서비스’ 등으로 소개한 바 있다. <평화신문>은 8월 31일자 1면에 ‘지면보기 서비스 완전개통’의 내용을 알렸다.

그러나 두 신문사의 사이트에 접속하여 보면 아직 완전한 서비스가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초반 실행과정에서 약간의 미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창간호 등의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보다 이용자의 열람이 제일 많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제공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담당자들의 수고를 요청한다.

아무튼 두 신문사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이곳에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좋은 것만 담는다고 좋은 신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좋은 일 궂은 일이 그물코처럼 우리의 삶을 엮어나가듯이 교회신문 역시 담담하게 교회의 삶을 담아가야 할 것이다.

‣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거울이며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지난 8월 15일 ‘한국천주교회의 원죄 그리고 교회언론’이란 부제가 붙은 <깨물지 못한 혀>를 발간한 바 있다. 그 책에 인용한 수많은 교회자료들을 당시 교회의 기관지였던 <경향잡지>에서 옮기는 일은 한 마디로 고문이었다. 그것은 궂은 일이 담긴 것이 아니라 궂은 시기에 자초한 ‘말도 안 되는 헛구역질’의 연속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하시라. 다시 입에 올리는 것도 욕됨이다. 다행스럽게도, 정말 불행 중 다행으로 현재의 두 교회신문은 당시 세상에 없었다.

창간 80년을 자랑하는 <가톨릭신문>은 1927년 4월에 창간되었지만 6주년 기념호였던 1933년 4월에 폐간을 선언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쾌한 사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단지 ‘조선 5위 주교의 교서에 의하여 폐간함.’이란 문구가 기사 위에 별도로 찍혀있을 뿐이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16년 후인 1949년 4월에 복간을 선언한다. <평화신문>은 아주 새로운(?) 각오로 1988년 5월에 창간되었다. 불과 20여 년 동안 여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필자가 두 교회신문에게 ‘다행’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제말엽에 두 신문이 만약 존재했다면 이번에 발간된 책의 분량이 상당할 수도 있었다는 쓸데없는 상상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민족에 의한 강제점령시기가 지나간 후 우리 교회언론이 담아낸 기사와 사설들이 어떠했는지는 이제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우리는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거울이며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그러자고 보관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언론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었는지 언론의 창으로 돌아보자.

학자는 학자대로, 성직자는 성직자대로,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장삼이사는 장삼이사대로 언론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그리 어렵지 않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모두는 21세기 입구를 살다가 사라질 하느님의 창조물들이다. 21세기가 저물 즈음 남은 자들이 지난 신문을 보며 ‘역시’라고 했을 때 어떤 의미의 ‘역시’가 될 것인지는 지금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김유철 200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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