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철의 미디어 흘겨보기 ] 8월 17일자 2611호 <가톨릭신문>과 982호 <평화신문>


▶ 구약의 예언자는 이제 사라졌다?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언어로 전하는 예언자들의 역할과 정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으며 살아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그것을 하느님이 사람을 친히 선택하시어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주셨지만 이제는 그 임무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예언자직을 통해 이루어간다. 그것은 교회언론의 정신이기도 하다.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가톨릭신문>은 4면에 전국 교구장 성모승천대축일 메시지 발표-“평화의 모후 성모님 모범 실현하자”를, <평화신문>은 1면에 5개 교구장 성모승천대축일 담화-“세상을 위한 평화의 도구가 되자”를 실었다. 이어 18면에 특집으로 ‘한국교회 성모신심’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돌…정부수립과 가톨릭교회’를 소개했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하다. <가톨릭신문>이 기사 안에 박스로 처리했던 ‘성모승천대축일과 8‧15광복 그리고 한국교회’라는 말이 주는 함축성에 비하면 두 신문 모두 독자에게, 특별히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교구장들이 특별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헌 포도주를 꺼내더라도 그것을 새 포도주로 바꾸어 해석하고 제시하는 것은 언론에게 맡겨진 몫이다.

현대 언론의 대선배이신 예언자들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58,6-7)

다행히 교회신문이 갑작스럽게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을 보도 하지 않은 것만이라도 만족해야 하나? 그러나 깊은 의미가 있는 ‘성모승천대축일과 8‧15광복절’을 맞이하고도 불과 14개 교구중 5개 교구장이 메시지를 발표한 일과 광주교구장의 담화에 나온 ‘건국60주년’ (<평화신문>은 이것을 애써 정부수립 60주년이라고 바꾸었지만 담화에는 “건국60주년이다.)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그것에 대한 지적 역시 교회신문의 몫이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초대 왕정이었던 사울에 대한 기름부음은 잊을 지라도 하느님이 손수 마련한 ‘출애급’ 즉 ‘빠스카’에 대한 감사와 감격은 수천 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듯이 정부수립 60돌보다 더 중요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민족의 해방과 광복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평화신문>의 특집은 아쉬움이 남는다.

평화신문 8면

▶“우리가 왕년에...”

이렇게 전례와 복음과 현실이 따로 나뉘다보면 ‘하느님의 눈’으로 읽지 못하는 일이 수없이 많다. 같은 8월 17일자 신문안에서 한 발 더 나아가보자. <평화신문> 8면에는 창간 스무 돌 특별기획으로 ‘격동의 현대사’가 연재중이다. 이번 주에는 1967년의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사건’이 소개되었다. 신문은 “한국천주교회가 교구를 넘어 국내 가톨릭사상 최초로 사회정의를 위해 함께 연대한다. 1965년 12월 8일 마무리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의 비전을 열어놓은데 따른 결과였다.”라고 소개하며 ‘공장걸레로 불린 여성노동자들’ ‘노동자들과 함께한 천주교회’를 중간제목으로 뽑고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총재였던 김수환 주교(현재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단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언론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어내는 일에는 역사학자 그 이상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여건이 40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가? ‘노동자들과 함께한 천주교회’란 말은 현재도 유효한 것인가? 혹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극히 일부 성직자들’이 현재에는 더 어울리지 않을까?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 역시 언론의 몫이다. 그 일에 대한 분석을 감당할 힘이 없다면 과거에 장롱 안에 있었던 금송아지 이야기는 그만 해야 한다. 과거를 뽐낼수록 현재는 더 우울해 질뿐이다.

이번 주 교회신문과 거의 같은 날짜인 8월 16일자 <한겨레신문> 5면에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2명 단식사투 66일째’란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지금도 이랜드‧ 코스콤 ‧ 케이티엑스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산더미만한 무게의 이야기가 우리 천주교회 주변에 즐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노동자들과 함께한 천주교회’란 말을 “우리가 왕년에...”운운하며 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번 더 언론인의 대선배인 이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이사 1, 11-13)


▶ 명토 박아둔다. 이런 광고 교회신문에 하지마라!

<평화신문>은 954호(2008년 1월 20일)에 이렇게 보도했었다. “서울대교구는 '주보ㆍ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의 광고 내용 검열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주보 및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의 광고가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혼돈을 야기하거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광고 내용들을 사전에 점검함으로써 문제 소지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7일자 7면 하단에 실린 “부자 되는 강의 개강합니다.”에 대해서는 어안이 벙벙하다. 위원회는 휴가 중인가? 아니면 직무를 포기한 유명무실 위원회인가? 부동산투자 강의를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광고주 입장에서야 무엇을 못하겠는가? 신문사 광고담당자는 ‘귀한’ 광고가 들어오는 바에 실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런 문구가 교회신문에 버젓이 실린 것은 광고주 혹은 광고담당자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원회의 책임인 것이다. 이런 제목은 “교회신문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 지향점과 다릅니다.”라고 정중히 돌려보내야 마땅하다. 그 광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기왕 돈을 버시려고 작정하셨다면...” 이쯤 되면 교회신문의 광고가 스포츠신문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시작하자마자 잠자는 ‘위원회’ 깨우는 것도 신문의 몫이다.


▶ 관리의 천주교회는 고해성사에 숨어있다.

<가톨릭신문>의 3번째 커버스토리가 실렸다. 이번 주의 주제는 ‘고해성사’였다. <가톨릭신문>은 1면과 11면~13면에 걸쳐 고해성사에 부담스러워하는 교우들의 현황과 고해성사에 관한 여러 가지 교리와 성인들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 체험을 실었다. 커버스토리는 세 번째지만 같이 생각해 볼 문제를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준다는 점에서 깊이 있는 기획취재이다. 가능하면 정기적으로 실려 <가톨릭신문>의 얼굴로 삼아도 될 듯하다.

특집팀이 고해성사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던 점은 이해는 하지만 이번 주 ‘고해성사’에서는 하나가 빠져있다. 아름답고 한없이 고마운 사랑의 성사인 고해성사가 부활과 성탄 때는 ‘판공’으로 변하고 거기에 ‘성사표’가 배부된다. 아울러 그 ‘성사표’는 일부 교우들에게 ‘쉬는 중’이라는 불명예스런 판결까지 수여하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이다.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다보면 여러가지 관리방법이 나오겠지만 사람과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열성과 냉담으로 너무도 쉽게 구분하여 관리하는 ‘첨단기법’이 한국천주교회에는 ‘고해성사’에 달려있다.

교회신문의 할 일이 많다. 힘들수록 함께 가자. 이번 주는 여기까지다.

김유철 2008-08-19. 김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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