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수도원 기행-8]

▲ 수도원 전경.

길을 나선 고양이 수사

나는 정주를 아주 잘 한다. 고양이가 자기 사는 장소를 떠나지 않듯, 나도 한 번 자리 잡은 곳은 잘 떠나지 않는다. 싫든 좋든 그냥 한곳에 짐을 풀고는 낮잠을 자든지 쥐를 잡든지 아무튼 혼자서도 내 할 일 하며 잘 노는 편이다. 내가 정주 서원을 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온 것도 어쩌면 이런 나의 고양이같은 습성에 꼼짝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즘'이 더해진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로마의 안셀모 수도원은 좀 이상한 수도원이다. 여름방학만 되면 7월 부터 삼 개월 동안 방 빼고 떠나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방학이 되었으니 자기 수도원에 돌아가라는 말이지만, 그건 유럽 수도원들에서 온 수사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같이 제3세계에서 온 수사들은 이때부터 방랑 수도자의 삶, 소위 ‘기로바꾸스’ 생활이 시작된다.

물론 이 시간은 어학연수를 하거나 유럽의 명소인 큰 수도원들을 방문해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 건 맞지만, 집을 떠나 들개인양 돌아다녀야 하는 고양이에게는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너무 그러면 사람이 소심하고 마음이 쪼짠하단 소리를 듣기 때문에 내 안의 고양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때론 그냥 냅다 신천지에 몸을 던져버리곤 한다. 지난여름에도 그랬다. 수사님들과 기네스 맥주를 마시면서 영어 회화나 실컷 해봐야지 하는 생각에서 아일랜드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찾은 곳이 아일랜드 전체를 통틀어 하나 밖에 없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인 글렌스탈Glenstal 수도원이었다.

▲ 수도원 정원.

숲속의 수도원

일단 가기로 결심하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풀려나갔다. 구글 지도에서 수도원 위치를 확인한 다음, 그곳에서 한 달간 좀 지낼 수 있는지 문의 메일을 보냈더니 두말할 것도 없이 대환영이라고 즉시 답장이 왔다. 곧바로 인터넷 검색으로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로마에서 더블린까지 22유로에 가는 저가 항공권을 구입했다. 우리 돈으로 약 4만원밖에 하지 않으니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더블린 공항에 내려서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 역까지 간 다음,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두서너 시간을 달려 리머릭(Limerick)이라는 도시까지 가야 했다.

생전 처음 가는 곳은 교통 요금이나 운행 방식이 생소할 때가 많아서 아차 실수하면 참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는 안셀모 수도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나이지리아 친구 다미안 수사가 동행한 덕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다미안은 매년 방학 때마다 자기 모원인 글렌스탈에 가서 지낸다고 했다. 리머릭시보다 한 정거장 앞인 리머릭 졍션(Limerick Junction)역에 내리자 주차장에 세워진 승용차에서 한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더니 우리 쪽을 향해 “헤이, 다미안! 다미안!”하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키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 위에 작업복같은 양복 재킷을 입고, 영화배우 숀 코네리처럼 희고 멋진 구레나룻 수염을 종종 만지작거리면서 시종일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와 농담을 던지셨던 그분은 킬론(Cillon) 수사였다. 역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수도원까지 우리를 태우고 가는 동안, 아일랜드의 칙칙한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수도원에서 부원장급으로 대우받는 자기 애완견 이야기까지 정말 지루할 순간 하나 없이 함께 깔깔거리며 즐거운 드라이브를 했다.

수도원에 도착할 즈음, 근처 애완동물 가게에 잠깐 들르더니 외상으로 샀다며 개밥 한 자루를 차에 싣고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수도원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진입로 좌우로 비에 젖은 초원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아름드리 거목들이 솟아있었다. 한참을 들어가도 수도원이 안 보이길래, 수도원 땅이 도대체 얼마나 넓은지 물어보았더니 5백 에이커라고 한다. 나중에 평수로 계산해보았더니 61만 2천 평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숲 속 수도원에서 여름동안 은거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가슴 뿌듯해서 그때 마침 영국 앰플포쓰(Ampleforth)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던 박 블라시오 신부에게 전화해서 자랑했더니, 다음날 바로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앰플포쓰는 2천 에이커라고 했다.

▲ 수도원 성당.

숲속 수도원의 비밀

글렌스탈 수도원은 벨기에의 마레쭈(Maredsous) 수도원이 1927년 아일랜드에 설립한 수도원이다. 마레쭈 수도원은 2000년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된 콜룸바 마르미옹(Columba Marmion)이 아빠스로 있던 곳이다. 마르미옹 아빠스는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처음에는 아일랜드 교구 신부였다. 몇 년 동안 교구 내 여러 중책을 맡기도 하고 영적 지도자로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되었다. 1923년 마르미옹이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마레쭈 수도원에서 그를 기념하여 4년 뒤 아일랜드에 수도원을 설립한 것이다.

마르미옹 아빠스는 훌륭한 영성서적을 많이 써서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그 덕분에 원래 맥주와 치즈로 유명했던 마레쭈 수도원이 갑자기 영성의 중심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한편 글렌스탈에서 모 수사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글렌스탈 수도원이 세워질 때만 해도 마레쭈 수도원이 아주 부자였다고 한다. 마르미옹 아빠스가 쓴 책들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갑자기 많아진 돈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까 고민까지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재테크 전문가가 마레쭈의 당가 수사에게 “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게 최고!”라고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마레쭈 수도원은 그 조언을 당장에 실행에 옮겼는데,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세계 경제 대공황이 불어 닥쳤다.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마레쭈 수도원은 청빈의 영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결국 모원의 지원이 뚝 끊긴 글렌스탈 수도원은 걸음마 때부터 자력갱생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고 한다.

▲ 수도원 학교.

샤크(상어)가 누구지?

글렌스탈 수도원이 차지하고 있는 그 넓은 땅은 본래 벨기에 수사들이 오기 전까지는 어느 영국 귀족 가문의 소유였다. 런던의 윈저성을 본뜬 대저택을 짓고 아일랜드인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유복한 삶을 살고 있던 그 영국인 가족이 어느날 그만 슬픈 변을 당하고 만다.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800년간의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고 독립하려고 몸부림치던 1920년대 무렵, 그 영국 귀족의 딸이 아일랜드 독립군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숨지는 일이 발생한다. 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진 가족들은 글렌스탈의 모든 건물과 땅을 버려둔 채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나중에 이곳을 교구에서 매입하였고 이 넓은 땅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세우는 조건으로 마레쭈 수도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현재 성당과 수도자 숙소, 피정집 및 도서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은 남자 기숙학교로 쓰이고 있다. 선생 수사의 안내로 학교 안을 둘러보았다. 초중고 학생들이 다함께 지내는 곳이라 그런지 어린이집처럼 앙증맞게 꾸며놓은 교실에서부터 대학 강의실처럼 빔프로젝트까지 설치해 놓은 방까지 시설들이 참 다양했다. 방학이라 학교가 텅 비어 있은 덕분에 개인 침방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두 평 남짓한 조그만 침실에는 공사 중이었는지 신발자국이 군데군데 묻은 헌 신문지들이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방안을 둘러보는데 벽지를 바르지 않아 돌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회색빛 벽면에는 빨간 유성 매직으로 그린 낙서가 보였다. 방주인의 자화상인 듯한 얼굴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고 있었다. 계단을 돌아 내려오니 식당들이 몇 개 있는데, 학년별로 따로따로 밥을 먹는다고 말했다. 복도를 지나 입구 쪽으로 가자 게시판이 보였다. 학교생활하며 찍은 사진들이 그 위에 잔뜩 붙어 있었다.

그 중에 몇 장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하늘색 양장을 차려입은 부인이 방명록에 서명하는 사진이 있기에, 안내를 해주던 수사한테 저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샤크Shark”라고 했다. ‘샤크? 상어?’ 하며 어리둥절해하니까, 아일랜드 대통령을 자기들은 ‘상어’, 즉 ‘샤크’라고 부른다며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 대부분의 수사들이 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어서인지 수도생활 또한 학교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작년 말 8년 임기의 새 아빠스로 선출된 패트릭 수사Br. Patrick 역시 한때 이 학교의 교장이었다고 한다.

▲ 패트릭 아빠스.

아빠스는 아무나 하나?

패트릭 아빠스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다. 내가 그동안 유럽에서 만난 아빠스들이 대개 다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신 분들이었지만, 패트릭 아빠스는 저러시다 권위가 손상되면 어쩌나 염려될 정도로 타고난 익살꾼이었다. 그런데 이분은 수도생활 45년 동안 평수사로 잘 살아오시다가 그만 아빠스에 당선되었다. 현 교회법상 신부만 아빠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아빠스로 뽑힌 데는, 물론 패트릭 아빠스의 덕망도 있었겠지만, 내가 들은 첩보에 의하면 공동체 전체의 강력한 염원이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바티칸의 허락을 받고 아빠스로 먼저 선출된 다음에 차례차례로 준비되는 대로 부제품, 사제품을 받았다. 예전부터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였는지 아빠스가 되신 뒤에도 여전히 그냥 미사 때 성가대 사이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내게는 약간 생소했지만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빠스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공동체 전체회의에 손님인 나도 참석해도 괜찮다고, 아니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여 몇 번 가서 앉아 있어 봤는데, 듣고 있자니 공동체의 현안들을 기탄없이 서로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나 외에도 견학 온 성소자도 한 명 같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 공동체는 이렇게 살아가니까 앞으로 입회해서 살 수 있겠는지 잘 판단하라고 말하는 듯 했다.

이곳 수사들에게서 받은 공통적인 인상은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더 친절하고 상냥한 분이 손님 안내를 담당하는 크리스토퍼 신부였다. 다른 수도원과 달리 이 수도원에서만 본 관습이 하나 있는데, 매일 저녁식사 때 피정 온 손님들과 함께 수도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다. 수사들이 모두 식당에 모여 있으면, 크리스토퍼 신부님이 남녀가 섞여있는 손님 일고여덟 분을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와서 손님들을 식탁에 앉히고 자기도 옆에서 같이 식사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사실 수도원 식당에서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인데, 환대를 표현하는 방식이 이렇게도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뭐든지 절대적으로 옳은 관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다른 날처럼 비오는 날 오후, 주방에서 다미안과 잼 만들려고 따놓은 구즈베리 열매를 다듬고 있는데, 크리스토퍼 신부가 다가와서는 왜관에 돌아가면 시몬 아빠스께 안부 전해달라고 말했다. 어떻게 아시냐고 여쭈었더니, 로마에서 4년마다 열리는 아빠스 총회 때 만났다고 하셨다. 알고 봤더니 이분이 바로 패트릭 아빠스 전에 16년 동안 아빠스로 계셨던 분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서 좋은지 얼굴에서 행복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아일랜드 서해안의 모어 절벽Cliffs of Moher.

섬 구경을 나선 고양이 수사

한편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관광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글렌스탈 수도원이 워낙 시골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차가 없으면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데다가, 한 달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죽죽 내리니 어디 나다니기도 귀찮았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극히 단순한 생활의 연속이었는데, 이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정원에서 일하시는 브라이언 신부가 나를 위해 하루 소풍을 계획했다. 수련장 신부한테 부탁해서 운전자로 수련자 한 명까지 구해놓고는 좋은 데 같이 구경 가자고 했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는데 가보면 놀랄 거라고 말하긴 했어도,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아침 일찍 먹고 승용차에 올라타서 구불구불하고 좁은 국도를 고속도로처럼 달려서 도착한 곳은 아일랜드 서해안의 모어 절벽Cliffs of Moher이었다. 2백 미터가 넘는 높이에 장장 8킬로미터 뻗어있는 해안 절벽 위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기가 막힌 관광지에도 다 와보고 내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처럼 신나게 뛰어다니며 사진도 찍으면서 이 놀라운 장관을 마음속에 깊이깊이 담았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안개와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좀 전까지 그토록 투명하게 빛나던 해안선이 안개에 가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빠코미오! 우린 아주 운이 좋았지, 그치?” 브라이언 신부님의 말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며 멀리 도로 앞을 보니, 아마도 더블린에서 오는 차들인지 모어 절벽을 보러 오는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복도 많고 운이 좋은 게 분명해 보였다. 일 년 열두 달 이렇게 매일 비바람이 치는 바람에 아일랜드의 토사가 바다로 많이 씻겨 나갔다. 그래서 지형이 꼭 달 표면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농사와는 영 거리가 먼 환경처럼 보였다. 그나마 아무데서나 잘 크는 감자 덕분에 아일랜드에 사람이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1845년부터 1851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감자 대기근 동안 백만 명이상 굶어죽었다는 역사가 왜 가능했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가혹한 영국 식민 지배를 받으며 굶고 지친 아일랜드인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아메리카행 배에 몸을 실었던 곳. 바로 그 항구가 모어 절벽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출발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브라이언 신부와 점심 먹으러 들어간 어느 해안가 식당에서도 그런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1912년 4월 15일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에 대한 당시의 신문 기사가 스크랩되어 식당 벽 액자에 넣어 걸려 있었다.

달을 탐사하는 듯 해안 구석구석을 돌다가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차를 세우고 사진 찰칵찰칵 찍고, 다시 또 출발하고, 이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 무렵 수도원에 돌아왔다. 이 날 말고도 브라이언 신부는 내가 아일랜드 정통 아침식사가 뭔지 맛봐야한다며 일부러 리머릭 시내 관광 일정까지 마련해 주었다. 글렌스탈을 떠나오는 날, 빠코미오가 봐야할 게 아직 많은 데 이렇게 일찍 가서 아쉽다며 성탄 때 꼭 다시 오라고 당부했다.

▲ 최종근 신부.

사랑이란 다름을 인정하는 일

글렌스탈 수도원을 떠나온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간다. 성탄 때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아일랜드의 못 다한 구경 때문이 아니라 브라이언 신부와 패트릭 아빠스 그리고 여러 수사들이 보고 싶어서이다. 세상 모든 수도원을 다 다녀보고 체험해볼 수는 없지만, 가는 곳마다 참 보고 배우는 게 많다. 하느님 찾는 목표는 같아도 역사와 문화가 다르면 사는 방식도 다르다. 서로 다른 차이점을 보고 이해하면 할수록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

대신 두루뭉술한 식별이긴 해도 사랑하며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에 정주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만족에 안주하고 있는지 분별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여행을 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잠시 고양이의 삶을 버리고 들개처럼 돌아다닌 지난여름이 은총의 시간이라 느껴진다. 책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랑을 배우라는 하느님의 뜻이리라.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 사진제공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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