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방선교회 김광우 신부의 선교일지, 책으로 엮어

영화 <울지마 톤즈>로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떠난 이태석 신부가 ‘한국의 슈바이처’라면 중국의 한센인 마을에서 환우들의 신발을 만들어 주는 김광우 신부는 나환우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미안 신부’에 비길 만하다.

▲ <슬픈 이름은 부르지도 마라>, 김광우 신부, (주)이모션 덕유

전자공학도로서 삼성에서 근무하다 늦깎이 신부가 되어 한센인 사목을 펼치는 김 신부의 선교일지가 11월 20일 <슬픈 이름은 부르지도 마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여 나왔다.

그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실습을 하면서, 광둥성에서 나환우 치료실습을 하면서, 쓰촨성에서 본격적으로 나환우들을 돌보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다짐하는 사제로서의 사명을 책 속에 담았다.

남들이 좋은 직장이라고 부러워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택한 길. 김광우 신부는 세속의 달콤한 유혹을 뒤로하고 신학교 문들 두드렸고 청빈, 정결, 순명을 서약하며 명동대성당에서 서품을 받았다.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그의 바람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을까? 예로부터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여겨진 나환우들에게 봉사하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사람의 몸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발을 보호하는 신발을 만들게 된다.

한센인들은 대부분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손발에 상처가 있고, 변형이 심하다. 신발의 모양도 환우의 발 모양에 맞게 따로 만들어야 한다. 특수 주문한 신발에 그들의 상처를 염두에 두고 두께가 1센티미터 되는 깔창을 발에 대어 파준다. 여분의 깔창도 만들어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가족에게까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한센인은 이렇게 받아든 신발 한 켤레와 여분의 깔창을 들고 너무나 기뻐한다. 김광우 신부는 “신발이 닳으면 다시 만들어 준다고 해도 집안의 가보라도 되는 듯 모셔놓고 신지도 않는 분이 있다”고 말한다.

▲ 신체의 가장 낮은 곳, 발을 내려다보며 상처를 진단한다.

책 표지에 적힌 것처럼 그의 선교일지는 좌충우돌이다. 깨끗하지 못한 숙소에서 잠을 청하다 귀에 바퀴벌레가 기어들어가 한밤중에 잠자던 수녀까지 깨워서 겨우 바퀴벌레를 빼내고, 마을 밖에 나갔던 환우가 길을 잃어 3주가량이나 실종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환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김광우 신부의 역할은 신발을 만드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마을 사람 중에 아파서 병원에 가는 일이 생기면 병원에 데려다주고 뒤를 봐주는 일까지 모두 신경 써야 한다. 한번은 병원에 입원한 청년과 그를 간호하는 형의 속옷과 겉옷, 양말을 사서 챙겨준 일도 있다. 김 신부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치 않으며 주님께 감사의 고백을 바친다.

“주님! 고맙습니다. 당신께서는 그 친구를 통해 하실 일이 아직 남아 있겠지요.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면 저는 언제든지 아빠도 될 수 있고 아저씨도 될 수 있으며 애인도 될 수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그는 거리가 먼 강복촌에 신발을 전해주기 위해 비효율적인 일을 감행하기도 한다. 한 켤레에 30원(元) 하는 신발을 전해주는 데, 출장비와 운전기사의 수고비를 다 합쳐 300원(元)이 넘게 들어도 김 신부는 “한센인들을 만나서 기쁘고 그분들을 돕는 대만의 은인들에게 힘을 싣는 것이라 여기자”며 기꺼이 비효율을 감수한다.

▲ “이제는 슬픔도 원망도 없는 곳에 가셨으니 편안히 눈을 감으시고 이 세상에서 못다한 삶을 하느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이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한센인들은 언제나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산다. 한센인이 세상을 떠나고 고별식을 마치면 마을 촌장이 개인마다 1원(元)과 사탕을 하나씩 나눠주는 데 이는 ‘돌아가신 분이 우리와 항상 함께한다’는 의미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으니 달콤하고 기쁜 일만 남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명절에 죽음을 맞이한 바오로님에게 김광우 신부는 하느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바란다.

“팔월 중추절을 맞아 모두 즐거워하는 그 순간, 그는 자기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 이승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것이 한 가닥 안타까움으로 남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 중추절 월광이 밝게 비추던 날 당신 품에 안겨서 그나마 안심이 된다. 그는 힘겨웠던 삶을 뒤로하고 달빛을 타고 하늘로 곧장 올라가지 않았을까.”

몸과 마음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한센인 곁에서 김광우 신부의 몸도 언제까지고 성하질 못한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개를 넘나들다 보니 고산병으로 고생하고 쉴 새 없이 쭈그리고 앉아 신발 손질을 하다 보니 어깨도 말을 듣지 않는다. 휴가 차 한국을 방문해 눈을 검사하니 녹내장이라는 진단까지 받는다.

김 신부는 이렇게 몸이 무너지는 것도 선교사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내 것을 내어 놓아야 비로소 산 다르고 물 다른 곳에 사는 형제자매들과 하나가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 차우베이 강복촌의 학교.

4년 동안 쓰촨성 강복촌에서 한센인들과 동고동락하던 김광우 신부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발령을 받는다. 처음 김 신부가 한센인을 만났을 때 그들은 김 신부를 껴안는 것을 어려워했다.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한센병을 옮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과의 마지막 송별미사를 김 신부는 잊지 못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명씩 김 신부에게 다가와 정면으로 꼭 껴안아 줬던 것이다.

“여러분이 기도를 세게 해주시면 꼭 일찍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 신부.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사는 이들의 기도가 잘 먹혀서일까? 안식년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2011년 9월 다시 쓰촨성의 한센인들을 찾아간다.

“나 김광우는 언제나 여러분의 신기료장수이길 소망합니다. 부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소서.”

 
(한국외방선교회 선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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