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구노동사목의 김영숙, 이태숙 씨

“노동사목을 하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도 계시기는 하다. 하지만 그분들이 노동자는 아니므로 한계가 있다. 노동사목은 그래서 당연히 ‘평신도’가 하는 사목이다. 그런데 ‘사목’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웃긴다. (제도)교회야말로 양 떼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제대로 보살펴야 한다.”

평생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노동자가 존엄함을 깨우치고 노동자의 인권 향상을 위해 일해 온 대구노동사목의 김영숙(아녜스), 이태숙(가타리나) 씨에게 ‘사목’이라는 단어는 그 누구도 뗄 수 없는 소중한 이름이었다.

1986년 11월 대구노동사목을 세우고 지금까지 ‘사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김영숙과 이태숙 씨를 만났다.

대구노동사목은 만들어질 때부터 교회와 협력과 긴장의 줄타기를 통해 관계를 유지해왔다. 처음에는 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위해 가톨릭근로자회관 관장 신부와 논의를 했으나 돌아온 것은 “이곳은 사회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다. 밖에서 따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대답이었다. 이태숙 씨는 “그나마 그 신부님이 오스트리아 분이어서 그 정도지, 한국 신부님이었다면 활동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대구교구와 독립적으로 노동사목을 세우려고 했지만 명칭 역시 문제가 됐다. ‘가톨릭’과 ‘사목’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김영숙 씨는 “우리는 계속 사용하겠다고 말하고 그냥 밀고 나갔지만, 나중에 우리 스스로 ‘가톨릭’자는 빼버렸다. 하지만 ‘사목’은 결코 버릴 수 없었다”고 말한다.

사실 ‘사목’이라는 말은 신자가 아니면 잘 모르는 단어이다. 굳이 ‘사목’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김영숙 씨는 “사실 어디 가서 단체 소개할 때 ‘사목’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어려워한다. 하지만 노동자를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역할이 하느님나라를 세우는 일이라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목’이라는 단어는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 대구에서 노동사목을 25년간 이끌어온 김영숙(왼쪽)과 이태숙(오른쪽) 씨.

노동사목에 빠져 노동자ㆍ지역주민과 함께

이들의 노동사목에 대한 애착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이태숙 씨는 원래 수도자 출신으로서 집안 사정으로 휴가 중에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근무하다가 노동사목에 성소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후 수녀회에 복귀하지 않고 근로자회관에 남아 있던 이태숙 씨는 교회 담장마저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에 대구노동사목 건설에 합류했다. 이태숙 씨는 “근로자회관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한복을 입혀서 예절교육을 하는 등의 활동들이 전부여서 노동자의식을 일깨우려면 교회 밖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김영숙 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본당 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이하 가노청) 활동을 하게 됐다. 20대 아가씨로서는 가노청에 모인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녀는 “염색 공장에 다녔던 바오로 씨 옆에서는 지독한 식초 냄새가 났어요. 다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생활나눔을 하다 보면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지,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라며 가노청 활동에 깊게 빠져들게 된 계기를 말했다.

본당 가노청에서 회장까지 맡으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던 김영숙 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국가노청 여회장까지 역임한다. 전국회장의 임기를 마치면서 그녀는 가노청에서 배운 것들을 다시 대구로 돌아가 노동자들과 나눠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김영숙 씨는 이태숙 씨와 다른 동료 몇 명과 힘을 합쳐 대구노동사목 ‘나눔의 집’을 세웠다.

노동사목은 먼저 가노청 회원을 양성하는 사업을 주로 하였고, 노동자들의 인성교육과 의식화교육을 중심으로 한문교실, 미조직 노동자 소모임 등의 활동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86년부터 92년까지 전노협이 만들어지고 민주노총이 생길 때까지는 노동조합 건설과 지원 활동을 벌였다.

노동사목은 지역주민사업도 활발히 벌여나갔다. 노동자 밀집 주거지역인 비산동에 ‘나눔의 집’ 공간을 마련하면서 맞벌이 노동자의 자녀를 돌보는 ‘나눔탁아소’를 만들었고, 계명대 의대와 연계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무료진료사업도 벌였다.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자주 만나는 엄마들을 교육하는 모임도 생겼고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의식화 사업도 시행했다. 김영숙 씨는 “노동사목 초기부터 일하는 여성들을 많이 만나면서 나중에 여성노조에 대한 고민도 싹트게 됐다”고 밝힌다.

세상을 먼저 바꿔야 교회가 바뀐다

▲ 김영숙 씨.
초기 대구노동사목의 활동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진행된다. 침산성당, 고성성당에서 각종 강좌를 열었고, 비산성당의 도움을 얻어 탁아소에 필요한 물품 등의 지원도 많이 얻었다. 그러나 노동사목의 활동이 진행되면서 사측과 갈등을 빚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게 되었고, 교회와의 갈등이 시작된다.

1988년 노동사목은 베네딕도수녀원 소유인 파티마병원에서 노조활동에 관련된 주임약사가 평약사로 강등되는 부당노동행위건을 상담받게 되었다. 노동사목은 구제신청을 넣어 합의에 이르렀지만 노동자들의 분노는 남아 있었고, 이를 계기로 소모임이 결성되었다. 소모임의 결과 다시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했고, 병원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파업이 발생했다. 이 파업에서 병원은 노동사목을 노조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면서 노동사목과 교회와의 관계에 심각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영숙, 이태숙 씨가 교회에 희망을 버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청도 주신기업의 노동자 최태욱(타대오) 씨의 분신 사건이었다. 그는 회사의 상습적인 임금체납에 항의해 해고당했고, 본당 활동도 열심이던 터라 청도성당 주임신부가 노동사목에 상담요청을 해오면서 노동사목의 구제신청으로 다시 복직된다. 그러나 그가 노조를 설립하면서 회사는 그를 다시 해고하고 빨갱이로 모는 등 탄압을 가하였다. 괴로워하던 최태욱 노조위원장은 1990년 7월 8일 오후 6시경 청년미사를 마치고 성당 뒷마당에서 분신한다.

노동사목은 ‘사태해결을 위한 기도회 및 추모미사’를 여러 사제에게 부탁해 동의를 얻었으나 이틀 만에 대구교구의 이문희 대주교가 공문을 내려보내 사제들의 어떠한 협력도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렸다. 교구의 반대를 물리치고 모인 노동자와 신자들은 잠겨 있던 성당마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최태욱 위원장을 장미공원에 안장했다. 김영숙 씨는 “이제 교회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우리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 세상이 먼저 변해야 교회도 변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변하지 않은 노동환경과 노동사목의 존재 이유

▲ 이태숙 씨.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이태숙 씨는 “86년이나 지금이나 노동자의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없다”고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많은 노동자가 정리해고를 당하는 등 희생을 강요당했다. 대구는 전체 80% 정도가 30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이고 그곳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노조를 세울 수 없는 형편이다.

특히 IMF 사태 이후 가장 많이 희생당하는 노동자들은 여성이었다. 김영숙 씨는 2010년 동산병원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사례를 예로 들었다. 식당을 직영으로 운영하던 동산병원은 2007년 외주화를 단행한다. 외주화가 된 후 3년 동안 조리원의 임금은 150만 원에서 최저임금으로 곤두박질쳤다.

탁아소 운영과 엄마공부방 등을 통해 여성노동자들과 끈을 이어온 대구노동사목은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전국여성노조 경북지부와 대구여성노동자회 그리고 ‘일하는 여성 아카데미 대구’를 만들었다. 여성노동자회의 경우 노조에 포함하지 못하는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사업이고, 일하는 여성 아카데미 대구는 노동자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소통 능력을 키워주는 등 인성교육을 진행했다.

거대한 노조연맹이 세워졌어도 노동사목이 함께 해야 할 노동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김영숙 씨는 “작은 공장의 사람들을 만나보면 삶의 희망이 뭘까? 어떤 희망을 품고 살까? 참 절망적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며 “우리가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저 모여 살면서 서로 비빌 데를 만들고 정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대구노동사목의 존재 이유는 어쩌면 바로 이것이다.

노동‘사목’은 계속돼야 한다

25년의 세월을 대구노동사목과 함께 한 김영숙, 이태숙 씨는 자신들의 일이 하느님의 사업인지 지금도 끊임없이 묻고 있다. 김영숙 씨는 “일 년을 평가할 때마다 노동계의 복음화란 무엇인가?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사업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고 고백한다. 그나마 이들은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의 삶에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녹아있지만, 신자가 아닌 실무자들도 함께 일하는 요즈음에는 더욱 고민이 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 “교회의 이름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복음적 가치를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가노청을 할 때에도 신자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라고 둘은 이야기한다. 일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어야 한다는 정신을 계속 간직할 것이고 후배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 실망이 컸던 두 사람을 교회로부터 완전히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준 사제가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진 토마스 신부가 바로 그다. “고맙다는 말로 그분께 감사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김영숙 씨는 진 신부가 노동사목 실무자들에게 늘 용기와 위로를 줬다고 말한다. “저희가 과격한 투쟁 방식으로 지탄받을 때도 신부님은 당신들이 선택한 방식이라면 믿는다”고 말해 용기를 줬다고 회상한다.

진 토마스 신부는 노동사목 실무자들에게 “당신들도 교회임을 잊지 마라”며 “제도교회에 실망이 크더라도 제도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이 있고, 당신들은 노동자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사는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1년에 몇 번 씩 노동사목 실무자들을 따로 불러내 피정을 지도해주기도 한 진 신부 덕에 김영숙, 이태숙 씨는 투쟁을 하면서도 기도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제 대구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노동사목과 교회와의 관계도 다시 가까워지는 듯하다. 두 사람은 “우리가 ‘사목’자를 붙들고 지금까지 활동해왔기 때문에 교회가 다시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라고 동시에 강조한다. 두 사람은 노동‘사목’이 교회와 협력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 끝없는 사업 속에서 지쳐도 노동사목 동료와 함께라면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가운데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이가 이태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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