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신대운 천주교정의구현목포연합 전 상임대표]

“저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극빈자들입니다. 저의 집은 먼지와 악취가 두려워서, 세균과 병이 두려워서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입을 옷이 없어서 기도하러 집을 나서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기운이 없어서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천한 사람들의 집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의 이 기도문을 항상 생각하며 살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 신대운 클레멘스. 남해안 서쪽 끝에 있는 소안도 출신의 신대운 씨가 <소안도에서 핀 꽃>(나이테, 2011)이라는 자서전적 책을 내놓았다. 1955년 소안도 진산리 646번지에서 태어난 신대운 씨는 세 살 무렵부터 척추후만증에 걸렸다. 등이 굽고 키가 자라지 않는 질병인데, “이때부터 내 인생은 질곡의 시작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신대운 씨는 3살 때부터 척추후만증으로 고생했으나, 시계수리공으로, 사회운동가로, 신앙인으로 올곧게 살아왔다.  

시계수리공으로 살며 하느님을 찾는 사나이

중학교 2학년으로 중퇴하면서 소안도와 목포를 오가며 방황하던 신대운 씨가 마음을 잡은 것은 ‘시계수리공’으로 살면서부터였다. 지금도 목포 항동시장에 있는 시계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분에게서 시계수리기술을 배우고, 스위스시계점에 취직을 하기도 했다. 이 분의 권유로 성당에도 나가게 되고, 세례 때 대부도 서 주었다.

4년만에 개업해 ‘명옥사’라는 시계점포를 내게 된 신대운 씨는 1974년 김종남 신부에게서 경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성령세미나를 통해 안수를 받으며 “나도 새로운 인생을 찼았으니 무언가 하느님 나라와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온몸을 감쌌다”고 한다. 이후로 인문학과 신학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삶의 방향을 찾았다.

그 후로 신대운 씨는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성가대 활동뿐 아니라 ‘사랑의 선교수사회’에 입회할 결심까지 했다. 수도사가 되어 헐벗고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아버지가 선박침몰 사고로 이승을 떠나면서 그 마저도 헛된 바람이 되었다.

그러나 신대운 씨의 바람은 다른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1992년부터 6년 동안 시청각통신성서 공부로 이어졌고, 신학통신교육 2년 과정까지 마치게 했다. 그는 여전히 ‘봉헌’의 삶을 살고 싶었다. 1996년 신약성서학 교재 답안에 쓴 ‘기도’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기도는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이다. 가도는 신앙의 호흡이다.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심리적, 피동적 호흡이다. 기도는 신앙의 몸체이며, 귀의와 허심이 있다는 점에서 신앙 그 자체이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로 이어진다.

“주여, 비오니, 기도의 은혜를 주소서. 그 은혜가 필요하여 주게 청합니다. 기도할 줄 모름을 잘 아오며, 바로 이 까닭으로 기도할 줄 아는 은혜, 우리 분수를 차릴 줄 아는 은혜를 청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알맞은 기도를 찾아내어 익히게 하여 주소서. 미소하고 빈약하고 각자의 분수에 맞는 기도를 찾아내게 하소서,”

▲ 신대운 씨.
 
가장 하찮은 이들에게 베푸는 선행과 사회적 투신

1980년 광주항쟁은 신대운 씨가 사회적 참상에 눈뜨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82년 광주에서 피정에 참석하면서 5.18의 참상을 깨닫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활동한 목포 경동성당 가톨릭청년연합회는 일종의 사회운동단체로 변신했다. 1986년에는 목포가톨릭청년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했는데, 시국기도회는 물론이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에는 목포 시민들과 더불어 최루탄에 범벅이 되어 시위에 나섰다.

신대운 씨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관심이 통합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1990년부터는 빈첸시오회 활동을 시작해서, 15명의 회원들이 매주 구역을 분담해 보육원과 독거노인과 병자들을 방문했다. 빈첸시오회에서는 경애보육원과 ‘천사 프란치스꼬의 집’에서 고아들과 놀며 친구가 되어 주었을뿐 아니라, 공부방도 열어서 서산동, 온금동 일대의 저소득층 아이들을 보살폈다. 게다가 행려병자나 걸인들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도 빈첸시오회의 몫이었다.

목포 서산동에는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가 있었는데, 회원 세 분이 허름한 슬레이트 집에 살면서 부둣가에서 오징어 말리기, 그물짜기 등 그 지역 주민들이 하고 있는 생업을 직접 하면서 생활했다. 이 자매들은 틈틈이 병든 노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보살펴 주곤 했는데, 이들은 신대운 씨에게 ‘신앙생활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그 중 한 분이 신대운 씨에게 건네준 샤를 드 푸코의 책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책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미천하고 하찮은 이들에게 베푸는 선행과 사랑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바로 예수님에게 해드리는 것임을 명심하여 이들에게 특별한 호의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뿐 아니라 이들은 고통 중에 있는 주님의 지체들이라는 점을 유의하여 정성된 마음과 사랑과 존경으로 대해야 합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정치가들이 큰 불의를 저질렀다면, 그것을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결코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잠든 불침번이 되거나, 무심한 목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서 1992년부터는 목포에서 ‘신앙인사회학교’로 출발해 ‘시민사회대학’을 열었다. 이 프로그램은 ‘천주교정의구현목포연합’에서 주관했는데, 평신도 재교육으로 시작해 당시 이돈명 변호사, 권영길 언론노조위원장, 박현채 교수,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 등을 초빙해 목포시민들과 신자들의 사회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밖에는 민선 자치단체장을 감시하는 ‘시정지기단’ 활동, 그리고 목포포럼, 무안반도 하나되기 운동, 신안군 바다모래 지키기 운동을 벌였다.

교회를 통해서 세상으로, 천주교정의구현목포연합

특별히 천주교정의구현목포연합 활동은 그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그의 사회적 관심과 신앙이 ‘예언자 직분’ 속에서 어우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 11월 14일에 발족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은 노동, 인권, 여성, 신학, 농민, 청년, 평화, 통일 등 각 분야의 단체로 구성된 천주교 평신도단체였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른 교회쇄신과 사회도덕성 회복, 민주화 실현, 창조질서 회복을 목적으로 발족했다. 목포에서도 1989년에 목포연합이 발족했는데, 1996년부터는 목포연합 대표로 활동하고, 2002년에는 전국연합 상임대표를 맡기도 했다.

목포연합에서는 <바로 찾는 세상>이라는 신문을 발간해 시민사회운동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 신문을 통해 우리밀살리기운동도 돕고, 학교비리도 심층보도했다. 이러한 보도기능 외에도 공소 탐방, ‘신부님 안녕하십니까?’를 통한 본당 탐방도 다루었다. 이 신문 역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 목적처럼, 사회 민주화와 교회쇄신이라는 소명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천주교 내부 문제도 다루게 되었는데, 사제들의 골프, 사냥 문제, 성전 신축 문제 등을 다루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교계의 지원을 한 푼도 받지 않고 5,000부 정도 발행하던 이 신문도 결국 재정문제를 신대운 씨가 혼자서 떠맡게 되면서 점점 힘에 부치게 되어 4년 만에 폐간할 수밖에 없었다.

신대운 씨는 “이 과업을 통해 나는 언론의 중요성을 지각했고, 특히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부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회의 내부 문제를 다룰 때는 이러한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천주교정의구현목포연합이 주도했지만 내부 문제에 대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또 내부 무마를 하려고 하는 움직임은 천주교 조직이건 다른 조직이건 비슷하게 나타나곤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 인생의 여성들

신대운 씨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소안도에서 핀 꽃>에서는 세 명의 여성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내다. 할머니는 이웃 노화도에서 시집와 한평생 소안도에서 살았다. 장애를 안고 있던 신대운 씨를 실질적으로 19살까지 키운 분인데, ‘무한하고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신대운 씨를 여느 성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시켰다. 항상 미소를 머금고 소안도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먹을 것을 챙겨주던 할머니였다.

“없던 시절 나에게 줄 좋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남의 모내기판, 제사집에 가서 일을 거들어주고 남은 음식을 싸와 먹이곤 했다. 항상 부엌에서 물을 떠놓고 기도하면서 손자의 무병을 기원했다. 할머니는 나이 건강을 정상으로 돌려놓았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덕을 알게 해 준 분이다.”

어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를 대신해 42살부터 생계를 책임졌다. 슬퍼할 겨를 도 없이 2남2녀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서남해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건어물을 사다 목포나 전국 각지에 보내는 사업을 했다. 신대운 씨는 어머니에게서 생활력과 부지런함을 배웠다. 신대운 씨가 성당에 다니게 되면서 어머니도 세례를 받고는 예의 부지런함으로 매일 새벽마다 성당에 나가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신대운 씨가 교회와 시민사회 안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아내였다. 아내가 금은방 명옥사를 혼자 보다시피 하고 시어머니와 자녀들을 챙겨주었기 때문에 신대운 씨가 밖에서 맘 놓고 활동할 수 있었다. 성당 성가대에서 처음 만난 아내에게 처음 구혼했지만 아내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이후 건강 때문에 수녀원에서 다시 나온 그녀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든든한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신대운 씨는 지치지 않는 사람이다. 늘 신앙에 힘을 받아 일어나는 사람이다. 늘 낮은 곳으로 시선을 모으고, 지역사회를 위해 발로 뛰는 사람이다. 사회운동에 몸을 담았지만, 곁에 있는 가련한 인생들을 돌보는데 무심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서 ‘가난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투신했다.

*신대운 씨가 이번에 출간한 <소안도에 핀 꽃> 출판기념회가 12월 2일 오후 7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다.  그 자리에는 목포지역에서 함께 일한 동지들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인사들이 다수 참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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