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적 용어와 개방적 용어 사이에서.. 교회용어 여전히 ‘성서’와 ‘성경’ 사이에서 갈피 못 잡아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시작되는 연중 마지막 주간을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다. ‘성서주간’이 제정된 이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강조했고, 사도 바오로 역시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2티모3,16)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경'과 '성서'라는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해 오다가, 2005년 새번역판에서는 '성경'으로 결정되어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책’ 또는 ‘거룩하게 기록된 것들’이라는 뜻

그렇다면 ‘성경’이라는 말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성경’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biblia’에서 유래했다. 이는 ‘자세하게 기록한 쪽지’를 뜻하는 ‘biblos’의 복수형으로 ‘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라틴어 ‘Biblia’로 파생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영어권 국가들은 ‘The Bible’로, 스페인어권에서는 ‘La Biblia’ 그리고 독일어권에서는 ‘Die Bibel’ 프랑스어권에서는 ‘La Bible’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모두가 라틴어의 영향으로 ‘책’이라는 의미로 쓰인 이름들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영어로는 ‘The Holy Scripture’, 독일어로는 ‘Die Heilige Schrift’, 프랑스어로는 ‘La Sainte Ecriture’가 있다. 이 역시 라틴어 'Sacra Scriptura'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룩하게 기록된 것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Scriptura’는 ‘책’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성경의 ‘구절’ 또는 ‘내용’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한다.

‘성경’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할 무렵인 기원전 1,500년경에는 오늘날과 같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얕은 개울에서 주로 자라던 갈대의 일종인 ‘파피루스’(Papyrus) 줄기 껍질을 얇게 벗겨내 서로 엇갈려 겹쳐 놓은 뒤 그늘진 곳에서 말린 후 펴서 기록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파피루스에서 ‘종이’를 뜻하는 영어 ‘Paper’가 파생되었다.

이 파피루스를 지중해와 그 연안 국가들에게 대량으로 유통시킨 이들이 당시 강력한 고대 해상 상업민족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이었다. 이들은 ‘구불로’와 ‘시돈’, 그리고 ‘티로’같은 상업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등 점차 광대한 지역을 오가며 자신들의 상업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시돈’과 ‘티로’는 구약성경에서도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번창한 도시들이었다.

당시 이들의 무역활동에 대한 모습은 에제키엘서 27장에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특히 9절에 등장하는 도시 ‘그발’은 ‘구불로’(Gubulo)의 히브리식 명칭으로,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못한 땅이기도 하다(여호수아 13, 5 참조).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와 교역을 했을 당시에 그리스인들이 파피루스의 집산지인 ‘그발’을 ‘비블로스’(Biblos)라 불렀다. 즉 ‘그발’은 성경의 어원이 된 ‘Biblia’가 유래한 도시로, 현재는 레바논 ‘주바일’(Jbail)이다. 

나라마다 다른 이름, ‘성서’와 ‘성경’

▲중국에선 '성경'으로, 일본에선 '성서'로 사용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성경’이라는 이름에 대한 질문을 자주 듣는다. 아마 그 동안 ‘성서’라고 불러오다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2005년에 새번역성경을 출간하면서 ‘성경’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대한성서공회에서 1977년에 발간한 <공동번역 성서> 그리고 한국 천주교 전례 20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200주년 성서> 등 ‘성서’라는 명칭을 써 오다가 ‘성경’이라는 부르기 어색한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과 중국 역시 성경에 대한 명칭이 다르다. 중국에서 ‘성경’(聖經)이라 부르는데, 이는 한자 ‘경’(經)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이, 계율이나 법률적인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에 대해서는 ‘경’(經)을 사용하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서적을 들여온 우리나라에서도 초창기에는 ‘성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셩경직해광익> 또는 <셩경광익직해>라 불리던 우리말 최초의 성경이 있었고, 1892~1897년경 4복음서의 일부를 번역한 <셩경직해>가 발간되었으며, 1910년에는 불가타본을 번역한 한기근(바오로) 신부의 <사사셩경>이 출판되었다.

일본에서는 ‘성서(聖書)’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성경(聖經)은 불경(佛經)을 뜻하기 때문에 혼란을 피할 목적으로 ‘성서’를 사용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불교용어 가운데 ‘성경대’(聖經臺)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불경을 놓고 읽는 독서대(讀書臺)를 뜻하는 것으로 ‘독경대’(讀經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인가 '성서'인가

성서(聖書)과 성경(聖經), 그 논란의 중심에는 경전성(經典性)이 자리하고 있다. 개신교 진보 신학자 정강길에 의하면 “경전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비판적 접근을 강조하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라는 말을 쓰는 경향”(<미래에서 온 기독교>, 정강길, 에클레시안, 2007)이 있다고 설명한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을 사용하게 되면 성경의 규범적 차원이 강화되고, 법(法)적 권위를 드러내는 불가침의 성역으로 성경이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 사사로운 해석이 금지되고, 교회권위에 의한 해석만이 유일한 해석으로 강제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개신교의 경우에 ‘축자영감설’ 등 근본주의 교설이 힘을 얻을 수도 있겠다.

한편 ‘성서’란 이름을 쓰면, 정경(Canon)이란 뜻보다는 ‘역사적 산물인 책’의 의미로 쓰일 수 있기에,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더욱 넓혀준다. ‘성서’는 종교적 권위에 앞서 의미있는 삶을 위한 인생의 참고서로서, <탈무드>처럼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친근한 느낌을 주게 된다. ‘성서’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성서’를 자유로운 탐구영역으로 남겨두는 효과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교회의 권위에 기여하고, ‘성서’는 세상과 소통하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서(聖書)를 쓰든, 성경(聖經)이라는 명칭을 쓰든지 간에, 근본적으로 그 내용과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삶의 ‘근본’(經)으로 삼아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또한 계시를 기록(書)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서’와 ‘경’의 논란은 무의미할 수 있다.

성경으로 선포된 말씀을 듣고 살아내야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성’(聖)이라는 글자에 있다. ‘聖’은 ‘귀’를 뜻하는 ‘이’(耳)와 ‘드러내 보이다’ 또는 ‘받들다’를 뜻하는 ‘정’(呈)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글자다. 그래서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거룩함(聖)은 잘 ‘듣’고 잘 ‘드러내 보여’야 함을 뜻한다. ‘성경’(聖經)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말씀은 곧 ‘선포’다. 그리고 ‘선포’는 ‘들음’이다. 이는 전례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모든 성사(聖事) 예식의 앞부분에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선포’는 미사의 ‘말씀전례’를 통해서 최고점에 이른다.

‘선포’된 ‘말씀’을 ‘듣는’ 행위는 ‘귀’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눈’을 통해 ‘읽고’ 또 온 삶으로 그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야’한다. ‘말씀’이 우리의 ‘인격’과 섞이는 과정을 겪어야 진정한 ‘성경’의 의미가 살아난다. 그리고 그것이 ‘거룩함’(聖)이다.

우리는 성서주간을 마지막으로 연중시기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맞이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된 신비를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

덧붙여, 주교회의에 제안할 것이 있다. ‘성서’가 ‘성경’으로 바뀐 지 햇수로 6년여 되었다. 하지만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성서주간’ 등 교회용어들은 대부분 ‘성서’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신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위와 같은 명칭들도 개정하든가, 아니면 ‘성경’을 ‘성서’라는 본래 사용하던 이름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김인보 (신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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