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삶을 먹다> 웬델 베리, 낮은산, 2011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라는 책과 최근에 한국에 소개된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달팽이)로 유명한 리 호이나키는 자신이 스코트 니어링과 시몬느 베이유, 레이첼 카슨과 도로시 데이, 그리고 웬델 베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아마 이반 일리치도 그 반열에 들 것이다.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관료주의와 산업문명에 거슬러 ‘오래된 미래’를 다시 여는 생태적 문명을 재건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리 호이나키는 “깊은 영감으로 사는 사람은 정신과 육체 모두를 써서 살아야 하되,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에 적합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 강단에서, 농장에서, 지역사회에서 바닥의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역사의 매 순간에 자아와 사회에 대한 성찰을 행했던 이들이다. 리 호이나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그들을 주류에 합류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기금을 모으거나 큰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불가피하게 고통을 주는 상처들을 폭로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돌에서 살로 바꾸어주는 래디컬한 수 술을 받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기확대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뻔뻔스러운 사회사업 전문가주의로 떨어질 것이다.”

▲ 웬델 베리.

이러한 ‘거룩한 바보’ 중에 한 사람, 웬델 베리의 먹거리와 농사와 땅에 대한 성찰을 담은 <온 삶을 먹다>(낮은 산,2011)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웬델 베리는 미국 켄터키에서 5대 이상 농사를 지은 집안 출신으로 생애의 대부분을 농부요 교수로 살았다. 그는 ‘포트 윌리엄’이라는 상상속 농촌이 겪는 변천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 낸 유기적 연대로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했다. <온 삶을 먹다>에 수록된 그 소설 중 한 권인 <그 먼 땅>(That Distant Land, 2004)에는 한 농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농부는 하느님 신비의 분배자

▲ <온 삶을 먹다> 웬델 베리, 낮은산, 2011
1934년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사이의 몸시 추운 한낮, 농부인 톨 프라우드풋은 마차에 옥수수를 한 짐 싣고 집으로 가다가 한 사내와 그 어린 아이를 태워준다. 이 둘은 분명 대공황으로 삶터에서 밀려난 신세인 듯 보였다. 이들이 톨의 농장 식탁에서 마주한 것은 큰 대접에 담긴 흰강낭콩과 사과 소스와 으깬 감자, 그리고 갓 볶아 낸 소시지와 따뜻한 비스킷, 그리고 뜨거운 사탕수수 당밀 차였다. “으음, 그걸로 되나, 듬뿍 담아요. 넉넉히 있으니까.”

잘생겼지만 ‘엄숙한 소년’과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먹는 데만 열중했다. 너무나 굶주렸던 것이다. 이미 웃음기를 잃어버린 ‘엄숙한’ 소년 앞에서 톨은 버터밀크를 제 옷에 쏟으며 너스레를 떨고, 그 바람에 아이는 참다못한 폭소를 터뜨린다. 온 식구들이 깔깔 웃는 동안에 주방을 돌보던 미스 미니는 앞치마 자락으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잠시였지만 가련한 이들이 되찾은 행복감에 공감하는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 비스킷에 버터를 발랐고, 당밀 주전자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이게 산업문명에서 벗어난 ‘가족농’이 누리고 제공할 수 있는 행복이라고 웬델 베리는 말하고 있다. 그가 옹호하는 가족농은 “한 가족이 농사짓기 충분할 정도로 작으며,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그 가족이 ‘직접’ 농사짓는 농장”을 뜻한다. 여기서 농장은 살림과 일터를 제공한다.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팔 작물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는 동안에 해당 장소의 건강과 쓸모를 책임감 있게 지키는 것까지 포함한다. 즉, 가족농은 ‘그 가족이 적절히 돌보는 농장’이다. 가족농은 농토도 농민도 해치지 않는다. 사람은 땅을 이용할 때 애정을 갖고서 대해야 하며, 그러자면 땅에 대한 친밀한 지식과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

여기서 웬델 베리는 농장과 가정을 이어주는 ‘살림’에 대해 말한다. 살림은 가사를 돌보는 아내의 일이기도 하지만, 땅과 흙을, 집안의 짐승과 식물을 돌본다는 의미로 남편의 일이기도 하다. 즉, 사람을 포함해 우리가 사는 세계와 생명을 지속시키는 활동이다. 특히 흙은 살아있는 것들의 공동체이기도 하고 서식지이기도 한데, 농장의 가장과 가족과 동식물은 모두가 ‘흙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소개한다.

덧붙여 웬델 베리는 ‘살림’의 대상인 사람과 흙과 동식물들의 세계가 ‘신비’라는 점에서, “농부는 하느님 신비의 분배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농장의 관리자가 아니라 신비의 영역에 속한 자라서, 살림에 임하는 자세가 조심스럽고 겸손하다. “부화되기 전에 닭의 수를 세지 말라”는 격언 등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결코 식물과 동물 과학자처럼 처신하지 않는다.

동물을 ‘animal’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한때 동물이 영혼을 타고난다고 믿었던 까닭을 과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과학은 동물을 ‘동물공장’으로 인도한다고 웬델 베리는 비판한다. 그에 비해 가족농에서 추구하는 ‘가축살림’은 시편 작가가 형상화한 푸른 초장과 맑은 물로 짐승들을 인도하는 ‘하느님의 농사’로 인도한다. 여기서 농사를 잘 짓는 것은 모든 생명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고, 곧 ‘연민’을 확장하는 일이 된다. 찬비를 맞고 서 있는 양에게 외양간 문을 열어주고, 닭에게 모이를 몇 알 던져주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이게 자기 안에 쌓이면 농부는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이미 중요한 사람’이 된다.

▲ Wendell Berry's Mad Farmer: prophetic voice to a disintegrating culture


‘지옥벌’ 같은 탐욕의 경제

웬델 베리는 “건실한 농부가 꾸려가는 작은 농장은 건실한 장인이 꾸려가는 작은 작업장과 마찬가지로 일을 질적으로 우수하고 품격있게 만들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일하는 사람도 나라도 위태로워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인간이 손으로 하는 일이 평가절하되면서, 오늘날 미국인들은 ‘실업’을 바라는 게 아니냐고 웬델 베리는 빗댔다. 사람들은 업무 종료시간을 위해, 주말과 휴가를 위해, 은퇴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치있거나 유익해서가 아니라 그만 둘 때를 생각하며 일을 하는 상황을 ‘지옥벌’만큼이나 저주스런 상황이라고 비판한다.

그 배경에 ‘탐욕’이 있다고 웬델 베리는 말하는데, 윌리엄 새파이어는 “우리의 경제가 탐욕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에 탐욕은 더 이상 ‘7대 죄악’으로 분류해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을 상기시킨다. 초기교회 이후로 줄곧 가톨릭교회는 탐욕, 분노, 시기, 정욕, 탐식, 교만, 나태를 ‘7대악’으로 경계해 왔다. 그러나 새파이어는 “세계의 기아 대한 치유책은 탐욕”이라며 산업경제를 궁극적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에 웬델 베리는 “각종 광고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실은 7대 죄악 전부가 지금은 경제의 원동력”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가족농이 파멸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웬델 베리는 ‘책임있게 먹을 것’을 요청한다. 먹는 일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식품산업은 소비자가 식탁에 묶인 채 식품공장에서 뱃속까지 바로 통하는 튜브로 먹거리를 받아먹는 사람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고 비핀하면서, 이를 ‘일종의 문화적 기억상실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음식이 어디서 났는지,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어떤 재료와 첨가물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미 식품산업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주방과 식당이 주유소를 닮아가고, 집이 모텔을 닮아간다고 지적한다.

“일터로 가기 위해 서둘러 끼니를 때우고, 저녁이나 주말이나 휴가 때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기 위해 서둘러 일을 때운다. 무엇 때문에? 우리 삶이 ‘질’을 높이는데 필사적인 무슨 패스트푸드점에서 10억번째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

어디서나 무언지 모를 내용물로 범벅이 된 접시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착색되고, 빵가루와 소스와 고기즙을 뒤집어쓰고, 살균처리가 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를 웬델 베리는 “예전엔 자연과 농업의 산물이던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산업의 생산물로 변모한 것”이라며 “이제 먹는 자도 먹히는 대상도 생물학적 진실에서 떨어져나와” ‘외로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음식은 그저 ‘상업적 거래’거나 ‘식욕충족을 위한 거래’일 뿐이다.

식품산업 입장에서는 먹거리와 농사의 연관성을 은폐시키는 편이 낫다. “소비자가 자시이 먹는 햄버거가 생의 대부분을 제 배설물이 질퍽한 사육장에 갇혀 있던 비육우(肥肉牛)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서 좋을 리 없다. 접시에 담긴 송아지고기 커틀릿이 몸조차 돌릴 공간이 없는 사육 칸에서만 살던 송아지 살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좋을 게 없다. 절인 양배추 샐러드가 독한 농약에 의존해 거대한 단일경작 방식으로 자란 채소임을 알아서 좋을 리 없다.” 그저 ‘양’이 많고 ‘가격’이 싸면 그만이다. 광고업계의 역할은 소비자를 설득해, 그렇게 생산된 먹거리가 질 좋고 맛 좋고 건강에 좋으며 부부애와 장수의 증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 웬델 베리 성탄인사 "Suppose we did our work like the snow, quietly, quietly, leaving nothing out."(Red Barn on a Snowy Day, photo by Lyn Scott)

‘하느님’ 먹는 즐거움

웬델 베리는 그런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뜰이 있거나 베란다나 볕 드는 창가에 화분이라도 있다면 먹거리를 직접 길러 보라”고 권한다. 먹거리를 조금이라도 직접 길러보아야 흙에서 씨앗으로, 꽃으로, 열매로, 음식으로, 찌꺼기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에너지의 아름다운 순환을 알수 있다고 전한다. 우리가 먹거리의 이력을 알고 나면 그 진가도 알게 된다. 그밖에 음식을 직접 조리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원산지를 확인해 재료를 사며, 텃밭이라도 가꾸며 관찰하고 공부하라고 권한다.

이럴 때, “먹는 즐거움은 ‘포괄적인 즐거움’이 된다”고 말하는데, 음식을 먹으며 “잘 가꾸어진 밭에서 새벽빛 속에 이슬 머금은 작물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면, 먹는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며, 이 즐거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웬델 베리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윌리엄 카를로스의 시구는 ‘정말’ 아름답다.

“하느님이 몸 말고는 먹을 게 없으니, 있으면 찾아보라.
신성한 식물과 바다는 하느님의 몸을 상상에 내맡긴다.”


이를 두고 이 책을 번역한 이한중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시는 우리가 먹는 것치고 ‘하느님의 몸’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 무슨 말인가? 하느님을 먹다니?”하고 물으며, “만물에 깃든 하느님의 몸을 먹는 우리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다”는 게 해월 최시형이 설파한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이치라고 전한다. 권정생 선생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는다. 공기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온갖 동식물을 잡아먹고 산다. 결국 우리 몸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움직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 내 몸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또한 하느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 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신 것은 백번 옳은 말씀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고, 식품산업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이한중 씨는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게 아니라 괴물이 괴물을 먹는 죄”라고 말한다. 권정생 선생은 그래서 “하느님나라의 백성을 위하고 인간구원을 바란다면 자연을 가꾸고 농촌을 지키는 농사꾼이 되는 게 좋을 것이다. ...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읽어내야 웬델 베리가 왜 책 제목을 ‘온 삶을 먹다’라고 지었는지 알 것만 같다. 그리고 지난 1999년에 서울탈출을 감행해 무주 산골에서 6년이나 살면서 농사지었던 시절을 다시 그리워한다. 중간지대인 경주에서 4년, 서울에서 다시 2년 넘어 살고 있다. 지역이 문제겠느냐마는, 끼니 때마다 성큼 마루 밑으로 내려가 텃밭에서 상추며 컴프리며 풋고추를 따서 고추장에 찍어먹던 생각이 난다. 봄이면 고사리 따고 새로 올라온 쑥을 끊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마당 한켠에 핀 자주빛 작약을 보며 행복하던 시절이 저며온다. 다시 ‘그 먼 땅’에 갈 수 있을까? 가서 톨 프라우드풋처럼 죄없이, 죄없는 하느님을 모시고 죄없는 하늘로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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